첫사랑이 끝난 후에 질문하게 되는 것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처음 읽고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던 적이 있다.
첫사랑은 왜 자꾸 이루어지지 못한 쪽으로 기억될까.
한 사람의 부재가 하루 전체를 텅 비게 만들고, 그 사람이 없는 세상에 남아 있기조차 어려울 것 같은 마음.
베르테르는 왜 그 사랑을 삶보다 더 큰 상실로 받아들였을까.
한때는 나도 그렇게 믿었다.
한 사람에게 자꾸 마음이 가고,
그 사람을 위해서는 내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고 싶고,
내가 잃더라도 그 사람이 괜찮으면 그것으로 된다고 여겨지는 마음.
젊은 날 나는 오랫동안 그런 마음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어설프고, 조금 무모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진실한 감정.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해 마음을 한없이 기울이고, 함께하고픈 마음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처음의 사랑은 그렇게 온다.
별것 아닌 하루가 달라진다.
그 사람이 없는 시간은 길어지고, 그 사람이 있는 자리는 유난히 밝아진다.
혼자 보던 하늘도 그 사람에게 먼저 말해 주고 싶고,
커피가 유난히 쌉싸름하던 어느 오후도, 마트에서 고른 과일의 향기도
왜인지 그 사람에게 닿아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그게 다인 줄 알았다.
보고 싶고, 기다려지고, 자꾸 생각나는 것.
사랑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흔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첫사랑이 지나고 나면, 감정보다 질문이 먼저 남는다.
나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던 어떤 마음을 붙들고 있었던 걸까.
왜 그렇게까지 흔들렸을까.
왜 그렇게까지 쉽게 상처받았을까.
좋아한다고 말했던 마음은 왜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가까워질수록 왜 더 편안해지지 않고 불안해졌을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질문은 더 단순해진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 내가 느끼고 싶었던 감정을 사랑한 것이었을까.
첫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마음은 앞서 갔는데 관계는 거기까지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나간 뒤에도 자꾸 돌아보게 된다. 처음에는 내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만 중요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만들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첫사랑은 바로 그 자리에서 아프다.
사람을 흔드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외로움도 사람을 흔들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사람을 흔들고,
버려지고 싶지 않은 두려움도 사람을 흔든다.
나는 사랑하면서 내 좋은 마음보다 내 미숙함을 더 많이 보았다.
한 번은 답장이 몇 시간 늦은 적이 있었다.
별일 아닌 몇 시간이었는데, 나는 그 사이에 혼자서 지레 짐작했다.
그 사람이 나를 점점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라고,
서서히 멀어지려는 것이라고.
막상 답장이 왔을 때 그 사람은 그냥 급한 일이 있었다고 미안해했다.
그 사람이 피곤하다고 말하면, 그 피로보다 내 서운함을 먼저 느꼈다.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이해받고 싶어 했고,
기다린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반응해 주기를 바랐다.
나는 사랑이 내 마음을 넓혀 줄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랑은 먼저 내가 얼마나 좁은 사람인지 보여 주었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생각보다 조급했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지쳐 버렸고,
상대를 이해한다고 믿었는데 실은 내 마음부터 이해받고 싶어 했다.
예전에는 그런 마음을 순수하다고 불렀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본다.
한 사람에게 다 주고 싶어지는 마음이 언제나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매달림이고,
때로는 불안이고,
때로는 내 공허를 남에게 건네는 방식일 수도 있다.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실은 그 사람을 통해 덜 외롭고 싶었던 순간이 많았다.
그 사람을 보고 싶었던 것만이 아니다.
그 사람을 보고 있어야 내가 덜 흔들리는 것 같았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루가 텅 비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랑은 그 지점에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그대로 보기보다,
내 쓸쓸함을 덜어 줄 대상으로 보기 시작할 때.
그가 어떤 하루를 살았는지보다,
그가 내 하루를 어떻게 채워 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질 때.
가까이 갈수록 편안해져야 할 텐데,
오히려 더 자주 확인하고, 더 쉽게 상처받고, 더 빨리 지친다.
한때 나는 그 불안을 사랑의 깊이라고 착각했다.
많이 흔들릴수록 더 깊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더 아플수록 더 진짜라고.
그러나 한 사람 때문에 크게 흔들리는 일과, 그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하는 일은 다르다.
첫사랑이 아픈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은 그쪽으로 앞서 가지만, 관계는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충분하다. 다만 관계를 감당할 힘이 아직 없고, 서로를 향한 감정은 있는데 그것을 선택과 조율의 언어로 바꾸기에는 이르다. 그래서 첫사랑은 아름답기보다 먼저 아프다.
사랑한다고 상대를 다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때가 많다.
가까워질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왜 그는 어떤 순간에 갑자기 조용해지는지,
왜 별일 아닌 일 앞에서 오래 망설이는지,
왜 괜찮다고 하면서도 표정은 그렇지 않은지.
가까워졌다고 다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쉽게 알았다고 말하지 않는 일이 중요해진다.
내 추측으로 상대를 미리 판단하지 않는 것.
내가 상처받았다고 해서 곧장 그 사람을 나쁜 쪽으로 몰아가지 않는 것.
침묵이 곧 불편함은 아니고, 망설임이 곧 거절은 아니라는 것을 속단하지 않는 것.
이건 생각보다 어렵다.
사람은 사실보다 주관적 해석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사랑은 감정이 부족해서 무너지기보다, 생각이 앞질러서 무너진다.
조금 늦게 화내는 것.
조금 늦게 실망하는 것.
조금 늦게 단정하는 것.
내 상처를 곧장 관계의 결론으로 바꾸지 않는 것.
이 멈춤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랑에서는 중요하다.
사랑은 사람을 조금씩 천천히 성장하게 한다.
예전 같으면 바로 끝내버렸을 생각 앞에서 한 번 더 멈추게 한다.
말을 고르는 버릇,
판단을 늦추는 버릇,
내 감정보다 상대의 사정을 더 들어보려는 마음.
처음에는 그 사람 때문에 하루가 달라진다.
조금 지나면 그 사람 앞에서 내 말이 달라진다.
더 지나면 그 사람을 대하는 동안 내가 누구인지가 달라진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의 나는 그것을 더 이상 감정 하나로 말할 수 없다.
전적으로 다 주고 싶어지는 마음, 물론 그것도 사랑의 일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랑이 오래 남지 못한다.
사랑은 한 사람 때문에 크게 흔들리는 일이 아니다.
그 흔들림을 지나, 내 욕망을 관계의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나를 확인받기 위해 그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와 다른 삶과 상처와 속도를 가진 사람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선택으로,
설렘을 조율로,
충동을 책임으로 옮겨 가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은 내 외로움의 해답을 찾는 감정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견디고 배워 가며 둘 사이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첫사랑이 아픈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지만,
아직 둘 사이의 세계를 세우는 법은 몰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감정처럼 온다.
그러나 사랑이 정말 사랑으로 남는 것은,
그 마음이 관계가 될 때다.
한 사람을 내 삶의 구원으로 쓰지 않고,
그 사람과 함께 더 넓고 더 깊은 삶을 만들어 가기로 선택할 때.
어쩌면 사랑은 바로 그 순간부터,
비로소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