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철학으로 읽는 시간 (2)
월스트리트의 어느 법률사무소 2층. 창 하나 없는 벽을 마주한 자리에 젊은 남자가 앉아 있다. 하루 종일 서류를 베낀다. 남의 글자를 종이 위에 옮기는 일. 그에게는 이름이 있었지만, 이력은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조용하고 성실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이름은 바틀비.
어느 날, 그를 고용한 변호사가 서류 대조를 부탁한다. 바틀비는 대답한다.
"저는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언어적으로는 명확한 거절이 아니다. 항의도, 분노도, 설명도 없다. 이유를 묻자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다. 무엇을 그러지 않겠다는 것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다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소설가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 이야기다. 1853년 출간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이다. 당시는 컴퓨터는커녕 타자기도 아직 상용화되기 전이라 법률 서류를 직접 손으로 작성해야 했다.
이 소설은 비교적 부유한 변호사와 고독한 고용인 바틀비의 지속적인 요구와 저항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다.
변호사 '나'는 성공한 사람의 전형이다. 가장 안전한 삶을 추구한다. 그는 자본가의 채권, 담보, 부동산 소유권 등의 업무를 대행하며 사는 중상층 전문직이다.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편안한 삶이 최고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새로 채용된 젊은 직원 바틀비는 다른 직원들과 다른 태도와 반응으로 그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것이 이 소설의 주된 갈등 요소이다.
그는 왜 고용주인 변호사에게 그렇게 반응했을까. 그로 인해 해고될 수 있는 상황에도 정중하지만 분명하게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한다.
변호사인 '나'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그를 비난하고, 일을 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끝까지 하지 않는다. 해고하지 않은 이유는 꾸준하고, 근면하고 조용했기 때문이다. 직원 중 가장 나은 필사가였다. 제일 먼저 와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는다. 그런데 이것은 일종의 복선이다.
일요일에 잠시 들렀는데, 바틀비가 사무실 안에서 몰래 거주해 왔음을 발견한다. 그는 사실 거주할 집도, 의지할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가난하고, 지독히 고독한 자. 일요일의 월스트리트의 공허감. 밤 또한 텅 비는 그곳에서 혼자 견디며 살다니. 변호사는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이내 바틀비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그 감정은 공포와 혐오로 바뀐다.
시력이 먼 바틀비는 일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무실을 떠나지 않는다. 나가라고 말했지만 버틴다. 그는 갈 곳이 없다. 변호사는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사무실 자체를 이전한다. 바틀비만 남겨둔 채. 그래도 그는 떠나지 않는다. 결국 경찰에 의해 끌려가고, 감옥 마당의 잔디 위에 웅크린 채 죽는다.
나는 바틀비에게서 작가 자신을 본다. 1819년생인 멜빌은 어린 시절 성홍열을 앓았고, 평생 약시로 고생했다. 아버지의 사업 파산, 그리고 죽음. 은행 일, 농장 일을 전전하며 살았던 시간. 그 경험이 이 소설에 스며들지 않았을까.
바틀비의 저항은 기존의 저항과 다르다.
혁명가는 체제에 맞서 싸운다. 반항아는 규칙을 어긴다. 이 모든 저항에는 방향이 있다. 무엇에 반대하고, 무엇을 원하는지가 분명하다. 그래서 체제는 이런 저항을 다룰 수 있다. 진압하거나, 타협하거나, 흡수한다.
바틀비에게는 방향이 없다.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조건도, 보상도, 이유도 제시하지 않는다.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는 거절의 문장이 아니다. 거절이라면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선호를 말할 뿐이다. 아주 공손하게. 아주 단호하게. 그리고 그 공손함과 단호함의 결합이, 마주하는 사람을 당황케 한다. 변호사는 화를 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설득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체제가 작동하려면 상대방이 체제의 언어로 응답해야 하는데, 바틀비는 체제의 언어 바깥에 서 있다.
이것이 바틀비가 불안한 이유다. 그는 체제 안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체제와의 접속 자체를 조용히 끊어버린다. 그는 물론 체제 밖으로 나갈 힘도 자신도 없다. 이곳에서 더 물러설 곳이 없다.
그렇다면, 이 저항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소설 말미에 하나의 암시가 나온다. 바틀비가 법률사무소에 오기 전에 일했던 곳은 워싱턴 소재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 Dead Letter Office였다. 그가 하는 일은 죽음이나 불행으로 인해 수취인을 잃은 편지들을 처리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보낸 사람의 절박함이나 사랑이나 간청이 담겨 있었을 편지들이, 아무에게도 가지 못한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 그리고 그마저도 갑자기 해고되었다.
죽은 편지의 사무실에서 죽은 글자의 사무실로. 두 곳 모두 남의 것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두 곳 모두 창이 없었다. 두 곳 모두 바틀비를 소진시켰다.
바틀비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하다가 쓸모가 없어져 추방된 자를 상징한다. 가족도 없고, 스스로 생활할 여력도 없다. 갈 곳도 없다. 생존을 위해서는 계속 필사를 해야 하고, 고용주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 장면에서 해방이 아니라 소진을 읽는다. 바틀비의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는 자유의 선언이 아니라, 방전된 영혼이 내뱉는 마지막 숨이라고. 저항처럼 보이지만, 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의 표현이라고. 멜빌이 남겨둔 Dead Letter Office라는 단서가 그 증거다. 소통이 차단되고, 연결이 끊기고, 메시지가 죽어가는 곳에서 이미 소진되기 시작한 사람.
나는 이 해석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여전히 열어 둔다.
소진이라는 진단은 정확하다. 바틀비의 몸과 눈과 정신이 닳아 없어져 가는 과정을 소설은 천천히 보여준다. 그러나 소진된 사람이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안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이 문장에는 소멸되어 가면서도 꺼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의지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하고, 체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또렷한 무언가. 어쩌면 바틀비의 저항은 소진과 저항 사이 어딘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지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틀비에게는 타자도 없었다.
소설을 읽어보면, 바틀비 주위에는 분명히 사람들이 있다. 변호사, 동료 필경사들. 그러나 바틀비와 진정으로 접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 사무실을 옮기는 것으로 관계를 끊는다. 동료들은 처음부터 무관심하다. 바틀비 역시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변호사의 독백은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이다. 그러나 이 감탄은 바틀비가 죽은 뒤에야 나온다. 살아 있을 때는 그에게 건네지 못한다.
바틀비의 고독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에게도 연결되지 못해서 생긴 고독이었다. Dead Letter Office의 편지들처럼, 그의 존재도 수취인 없이 쌓여갔다.
이것이 2020년대의 고독과 다른가. 카카오톡 대화방에는 수백 명이 있고, 인스타그램에는 팔로워가 있고, 회사에는 동료가 있다. 그런데 정말 힘들 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눌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마음의 어딘가는 닫혀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바틀비가 도시의 사무실과 고시원과 원룸에 앉아 있을 것이다. 창 없는 벽을 마주하고, 남의 글자를 남의 서류에 옮기면서. '전 안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사람들. 말하면 낙오되니까.
이 글은 답을 주지 않는다.
바틀비가 남긴 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170년 전에 쓰인 이 문장이 오늘 밤 우리의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죽음과 소멸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하다 추방된 그는 반복해서 말한다.
"저는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문장을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몰린 주체의 소극적 저항으로 읽을 것인가, 소진이나 소멸로 읽을 것인가. 작가는 바틀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여전히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