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철학으로 읽는 시간 (1)
세계가 일그러졌다.
유럽에서 인천공항을 거쳐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순간이었다. 멀쩡하던 시야가 갑자기 뒤틀리더니,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망막이상. 의사는 즉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장기간의 과도한 일과 스트레스의 결과였다. 다행히 불완전하게나마 시력을 회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안대를 쓴 채 지냈다. 생활은 멈출 수 없었다. 묵직한 일들은 어김없이 발생했고, 나는 그것들을 평소처럼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그냥 견뎌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안대를 쓰고 맞은 첫 번째 사월, 나는 한쪽 눈으로 벚꽃을 보았다. 놀랍게도 그 벚꽃은 두 눈으로 보던 어떤 봄날보다 강렬했다. 세계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때 비로소 알았다.
창밖 난간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한참 깃털을 고르더니 아침을 알리고 날아간다. 벚꽃이 안개처럼 흩날리고 떨어진다. 평화로운 아침이다. 희망의 부드러운 숨결이 코끝을 스친다.
나는 사월을 사랑한다. 그런데 T.S. 엘리엇은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 봄은 대개 시작의 계절로 불린다. 햇빛은 부드럽고, 꽃은 환하며, 사람들은 그 계절 앞에서 다시 생명력이 넘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데 그는 왜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한 줄을 남겼을까.
엘리엇이 본 전쟁의 폐허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엘리엇은 유럽에 있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공부를 이어가던 젊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남았다. 결혼을 했고, 은행에서 일했다. 낮에는 외환 업무를 처리하고, 밤에는 평론과 시를 썼다. 그는 참호 속 병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이 지나간 도시의 공기는 우울했고, 그 이후에도 오래 동안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전쟁이 무너뜨린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역사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오래된 믿음도 함께 부서졌다. 문명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인간이 대량 살상과 파괴를 자행하는 역사적 현장에서, 근대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나 낙관은 허상에 불과했다.
총성이 멎은 자리에 남은 것은 단지 폐허만이 아니었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감각, 그리고 삶의 의미를 처음부터 다시 묻게 만드는 공허함이 남았다.
그 균열 위에서 『황무지(The Waste Land)』가 나왔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전후의 불안을 한 개인의 내면으로 끌어들였다면, 엘리엇은 파편화된 인용과 여러 목소리를 통해 문명 전체의 흔들림을 드러냈다. 『황무지』는 한 편의 시이면서, 동시에 부서진 시대의 지도처럼 읽힌다.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이 연재의 첫 번째 텍스트가 『황무지』인가. 이 시가 우리가 사는 현대 문명에 대해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어떤 땅 위에 서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영혼이 메마른 사회. 사람 간의 신뢰 관계는 무너지고, 상대를 도구로 이용하려는 욕망과 본능만이 차갑게 꿈틀거리는 황무지. 이 황폐한 사막과 같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시의 화자도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익숙한 언어가 더는 삶을 붙들어 주지 못하는 자리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황무지』의 밑바닥에는 아서 왕 전설 속 어부왕(Fisher King)의 이야기가 놓여 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왕이 치유되지 않는 한, 그가 다스리는 땅에도 비가 오지 않고 곡식이 자라지 않는다. 왕과 땅은 떨어져 있지 않다. 한 존재의 상처가 세계의 불모로 번져간다.
이 전설이 붙들고 있는 것은 단순한 신화적 장치가 아니다. 무엇이 세계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힘일까. 지식일까. 승리일까. 전설은 조금 다른 곳을 가리킨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대를 쓰고 출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가 내 앞에 와서 물었다.
"괜찮으세요? 수술은 잘 되었나요?"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 짧은 관심과 멈춤이 오래 남았다. 그 순간 나는 치료를 받는 몸이 아니라, 다시 한 사람으로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무너지는 사람 앞에서 잠깐 멈추어 서는 일. 빨리 해결하려 들지 않고, 먼저 그 사람의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 우선인지 모른다.
시의 마지막에서 엘리엇은 인도 우파니샤드(Upanishads)의 말을 가져온다.
베풀라. 공감하라. 스스로를 다스리라.
그러나 그것이 폐허를 단숨에 복구하는 해답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메마른 땅 위에 가까스로 남겨진 몇 개의 음절처럼 들린다. 완전히 무너진 뒤에도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마지막 언어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황무지』는 그 희미한 가능성만은 놓지 않는다.
저마다의 황무지가 있다
무언가를 잃어본 사람만이 아는 감각이 있다.
엘리엇이 마주한 것은 시대의 붕괴였고, 내가 겪은 것은 한쪽 시야의 일시적 상실이었다. 둘은 같지 않다. 그러나 일그러진 세계 앞에서 다시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닮아 있다. 이전과 같은 믿음으로는 버틸 수 없는데도, 사람은 다음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렇게 무너진 사회에서도 살아내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엘리엇의 사월은 낯설지 않다. 죽어 있던 땅에서 무엇인가가 다시 올라오는 일은 아름답기 전에 먼저 잔인할 수 있다. 잊고 있던 불편한 기억과 감각을 깨우고, 덮어 두었던 상처를 다시 드러내기 때문이다. 봄은 누구에게나 같은 얼굴로 오지 않는다.
그해 봄, 나는 한쪽 눈으로 벚꽃을 보았다. 완전하지 않은 시야였다. 그런데도 그 풍경은 오래 남았다. 모든 것이 온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채로도 세계가 아직 내 앞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그 잔인한 사월 한가운데서 시를 썼다. 폐허를 외면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성급하게 희망을 말하지도 않았다. 먼저 메마른 땅을 보여주었고, 그 위에 아직 남아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러니 질문은 이제 시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에게 돌아온다.
당신은 지금, 어떤 황무지를 지나고 있는가.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 내고."
— T.S. 엘리엇, 『황무지』 제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