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을 제대로 해 본 적 있습니까

내 안의 결핍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채우려 할 때 벌어지는 일들

by 이화윤 Lee Hwa yoon



영화 <500일의 썸머>의 주인공 톰은 이 세상 어딘가에 운명적 만남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직장 동료 '썸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그녀도 좋아하고,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비슷한 취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하나의 완성된 사랑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둘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상대에게 기대하는 관계가 다르다. 그녀는 사랑이나 운명 같은 걸 믿지 않으며, 가볍고 자유로운 관계를 선호한다. 두 사람은 함께 있으나 서로에게 거는 기대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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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사랑이라는 영원한 구원의 신화에 길들어 있다. 완전하고 이상적인 사랑. 자신의 결핍을 온전히 채워줄 사랑 이야기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한다. 톰은 썸머 그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사랑의 방식을 사랑한 것이다. 톰이 사랑한 것은 썸머라는 실제 그대로의 여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사랑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 낸 환상이다.


썸마는 점차 그에게서 멀어져가고 마침내 결별을 선언한다. 이 불일치가 결국 관계의 파국을 만든다. 썸머가 그 환상의 틀을 벗어나는 순간, 톰은 깊은 배신감을 느끼며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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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강렬하게 끌리는 순간이 있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지 않을까?’

‘이 사람과 함께라면,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상대방을 향한 설렘과 영원한 사랑의 기대가 가득하다. 우리는 자신이 필요한 때에 나타나 내 상처와 아픔을 아물게 하고, 흔들리는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줄 사람을 갈망한다.


하지만 마음이 깊어지기 전, 자문해 보아야 한다.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나와 나란히 발을 맞춰 걸어갈 '연인'인가, 아니면 내 삶의 무게를 대신 짊어져 줄 '구원'인가.


"처음엔 내 모든 상처를 다 감싸줄 것처럼 굴더니, 결국 그 사람도 똑같았다."

이별의 문턱에서 우리는 흔히 상대를 원망한다. 하지만 그 원망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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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를 찾는 사랑은 처음부터 위태롭다. 내 안의 결핍이 클수록, 상대가 그것을 완벽하게 채워주기를 바라는 기대도 커진다. 나의 감정 상태, 나의 행복, 심지어 나의 존재 가치마저 상대의 연락 한 통과 다정한 말 한마디에 흔들린다.

이때부터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집착'이 되고 관계를 질식시킨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의 완벽한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상대방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때로는 지치고 상처받는, 평범하고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다.


연애 초기, 감정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시기에는 상대가 기꺼이 나의 부족함을 완전히 채워줄 역할을 자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일상의 무게가 짓눌러오면, 상대 역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너무 피곤해서 나의 슬픔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날도 있고, 자신의 상처를 감당하느라 내게 무심해지는 순간도 반드시 온다.


구원을 바랐던 이들에게 이처럼 느슨해진 나태함은 '배신'으로 다가온다. 결핍을 채워주지 못하는 상대를 원망하며, 우리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가장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낸다. 상처받지 않으려 시작한 사랑이, 도리어 서로를 찢어놓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상대를 내 삶의 결핍을 채워줄 도구로 쓰지 않기 위해서는, 내 안의 공허함을 직면하고 끌어안아야 한다. 연인이 외로움을 잠시 다독여 줄 수는 있어도, 그 고독의 깊은 곳을 채워줄 수는 없다. 우리 삶의 구원자는 자기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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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는 살 수 없어"라는 절박함이 아니라,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지만, 너와 함께라면 더 좋을 것 같아"라는 동반자적 관계. 사랑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환상의 껍질을 깨고 나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불완전하지만 사랑스러운 존재로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신의 연인은 당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는 당신과 함께 이 고단한 삶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자 기꺼이 손을 내민, 다정한 동행이다. 그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상처 주지 않는 성숙한 사랑의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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