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여행기4
오울루에 온 첫날 포스터를 통해 알게 된 오울루 프라이드 축제에 참여했다. 이벤트가 열리는 오울루 성당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제대 정중앙에 프라이드 플래그, 무지개 깃발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예수와 프라이드 플래그가 공존하는 모습을 살면서 처음 보았다. 성소수자와 종교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던 나는 성소수자도 드디어 종교의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뭉클했다.
그곳에서는 LGBTQ+(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 그 외의 모든 성소수자)를 위한 미사가 열렸다. 미사가 진행되는 내내 감동적이었다. 지금까지 시스젠더 헤테로(심리적 성별과 생물학적 성별이 같은 이성애자)로 살아온 내가 성소수자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아직도 심지어 서구사회에서도 LGBTQ+로 사는 것이 편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었을 거라는 것은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소수자로 사는 삶은 쉽지 않다. 인종이든, 성별이든, 신체적 능력이든, 성적 지향이든 사회가 생각하는 기본형에서 벗어난 범주에 속하는 것은 직접적인 차별이 아니더라도 소외감과 억울함을 가져다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단점인 것마냥 여겨지는 것, 그것을 조금은 알고 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소망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닌 세상.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미사를 드리는 동안 주위에 성소수자 커플들을 볼 수 있었다. 커플들은 각자 개성이 다양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짝꿍과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사랑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핀란드 오울루의 성소수자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LGBTQ+가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당당하게 성당과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그들이 존중받고 인정받는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바란다.
그날 저녁, 나는 프라이드 축제의 또 다른 이벤트인 디스코 파티에 참석했다. 디스코 파티라고 해서 음악소리를 따라가려 했는데 알려준 주소에 가까이 가도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기숙사 같기도 하고 아파트 단지 같기도 한 굉장히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디스코 파티가 열렸다. 조용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관계자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디스코장을 지나 레인보우 라운지에서 웰컴 드링크를 받고 간단한 간식을 접시에 담으며 조용히 자리에 착석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프라이드 축제를 대표하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그리고 있었고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색한 나는 용기를 내어 옆자리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고 그렇게 헨리와 오스카를 만났다.
헨리와 오스카는 4년째 연애 중인 커플이었다. 둘 다 여성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를 남자친구라고 부르며 he, him 등 남성 대명사를 사용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나는 무례하고 싶지 않아 그들의 성별을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we나 you 또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성별이 지칭되는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헨리와 오스카는 에어비앤비의 무하와 밀레나처럼 장거리 연애를 청산하고 함께하게 된 장기연애 커플이었다. 헨리가 올린 인스타그램의 그림으로 둘은 연결되어 핀란드와 루마니아 간의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고, 루마니아 출신의 헨리는 핀란드어를 배우는 학교에 다니며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을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그 둘은 나와 비슷한 20대 초반이었는데 용기 있게 삶의 중대한 결정을 그 어린 나이에 했다는 것이 대단한 정도를 넘어 나에겐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았다.
내가 18살 때에는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학교 다니고 그 밖에 삶이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성인이 되고 대학교에 다니는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 하나만을 보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굉장히 많은 고민을 거치고 용기를 내어야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 나는 솔직히 두렵다. 그래서 용기를 낸 사람들을 보면 그런 사랑과 용기와 결단력이 대단하고 부럽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감정이 든다.
헨리와 오스카 덕분에 디스코장에서 뻘쭘하게 서있지 않고 같이 춤을 추며 즐길 수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았던 디스코장에서 우리는 핀란드 음악에 맞추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차를 만들고 루마니아 전통 춤을 추었다. 마카레나를 생각하게 하는 동작과 스텝을 밟으며 음악에 몸을 맡기는 시간이었다.
행사 마지막 순서로 아까 전에 그린 프라이드 축제 캐릭터를 선정하는 이벤트가 있었고 랜덤 뽑기를 통해 내가 그린 캐릭터가 당첨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정성을 쏟아서 그릴 걸 결과물이 부끄러웠지만 상품으로 대왕 큰 초콜릿과 프라이드 배너 플래그를 받았다.
오울루 프라이드 축제의 많고 많은 이벤트 중에서 단 두 개에 참여했을 뿐인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개념이 있고, 무언가를 이분법으로 나누거나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근에 스페인 넷플릭스 시리즈 ‘요즘남자들’(원제: Machos Alfa)을 정주행했는데 그 작품에서도 현대의 성(性)은 남성과 여성 두 가지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에게 (또한 관계에) ‘무엇’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정된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게 되는 것 같다.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너는 이거, 나는 이거, 쟤는 이거’로 정의하는 순간, 편협한 사고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프라이드 플래그 참고하기: 나무위키, https://namu.wiki/w/%ED%94%84%EB%9D%BC%EC%9D%B4%EB%93%9C%20%ED%94%8C%EB%9E%98%EA%B7%B8
- 다음 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