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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에르떼 Oct 28. 2024

찬란한 유산

우리 집에는 가을이 되면 찾아오는 연례행사가 있다.

감을 수확하는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소위 감을 따고 곶감을 만든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외할아버지의 표현을 빌려 감공장을 돌린다고 표현한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그때 우리 가족은 아빠의 고향으로 이사를 왔다. 이미 예정된 이사였지만 하루아침에 도시 생활에서 촌 생활이라니. 불편한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다행히 우리는 이곳의 생활에 적응을 해나갔다.


우리 중 적응왕은 단연 아빠였다. 아빠는 취미생활로 할아버지께서 일구셨던 밭에 농사를 시작하셨다. 흙을 만지며 밝아진 아빠를 보는 게 참 좋았다. 그런데 아빠의 취미 생활은 점점 본업을 위협할 만큼 커져갔다.


아로니아, 고구마, 깻잎 등등 가짓수가 하나하나 늘어나더니 어느새 봄과 가을이 되면 아빠는 농사일로 동네 어르신만큼 바쁜 진정한 농사꾼이 되어있었다. 감나무도 그 많은 농사일 중 하나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감나무인만큼 아빠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정성과 애정을 쏟으며 키우셨다. 그 마음을 아는 듯 감나무도 이에 화답을 했다. 작년보다 더 탐스럽고 빛깔 좋은 감들이 열린 것이다.


드디어 감공장을 오픈하는 날이 밝았다. 우리 가족은 전날 동생과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함께 사온 꼬막무침으로 아침을 먹었다. 엄마는 일할 땐 밥심이라며 평소보다 더 두둑이 공깃밥을 채워주셨다.


어느새 노란 상자와 비료 포대, 감 따는 장비를 챙기신 아빠는 경운기에 시동을 걸고 계셨다. 엄마와 나와 동생은 아빠가 운전하는 경운기를 타고 밭으로 가기로 했다. 털털털 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밭으로 가는 길은 마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한 장면을 찍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밭에 가는 길에 만나 뵌 동네 어르신마다 인사를 드렸고 그분들은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셨다. 길바닥의 오돌토돌한 돌들이 엉덩이에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즐거웠다. 경운기를 몰고 가는 아빠의 등이 그 어느 때보다 태평양같이 넓어 보였다.




밭에 도착한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역할을 나누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낮게 달린 감을 손으로 땄다. 커다란 봉지에 담으니 양이 꽤 되었다. 그리고 아빠와 나는 장대 같은 장비를 들고 높게 달려있는 감을 땄다. 엄마와 동생은 떨어진 감을 줍고 노란 상자와 비료포대에 옮겨 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때마침 맞은편 밭에서 작업을 하시던 분이 시원한 두유를 가지고 오셨다. 밭일을 하시던 아빠와 안면을 트고 인사를 하고 지내던 분이셨다.


그분은 농막이 있어서 냉장고가 있다고 하셨다. 차가운 두유를 들이켜니 갈증이 시원하게 가셨다. 그리고 가족들 얼굴을 봤는데 서로 웃음이 나왔다. 모두들 엄청난 모기 부대에 공격을 당한 것이다. 아빠는 얼굴과 목에 집중 공격을 당했고 동생과 엄마의 목에도 모기 부대의 공격이 남아있었다.


나는 주로 다리에 많이 물렸는데 의식을 하니 더 간지럽기 시작했다. 최대한 다리의 감각을 잊고 감 따기에 집중했다. 감나무를 따는 장비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가위처럼 똑하고 자를 수 있는 것과 신발주머니 같은 주머니가 달려있어 감이 쏙 하고 떨어지는 장비가 있었다.




처음에는 가위 같은 장비로 감을 따기 시작했다. 타격할 곳에 집중을 한 뒤 장비를 대서 톡 하고 자르면 후두둑 감이 떨어졌다. 높은 곳에서 감이 떨어지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보자기를 펼쳐야 했다. 나는 닥터스트레인지의 망토처럼 보자기를 갖고 다녀야 했다.


감이 있는 곳을 발견하고 장비를 대서 톡하면 떨어지는 게 쾌감이 있었다. 톡톡하고 잘리는 소리도 좋았다. 사격선수처럼 또 양궁선수처럼 비장하게 감 따는데 집중했다.


동생이 찍어준 감 따는 내 모습 :-)

더 높은 곳에 있는 감들은 가위 장비로 따긴 힘들었다. 고무고무 열매를 먹은 것처럼 길이가 쭉쭉 늘어나는 주머니가 달린 장비로 교체가 필요했다. 감에 그 장비를 대고 당기면 주머니 속으로 톡 떨어졌다. 주머니에 쏙쏙 담기는 그 손맛도 좋았다.


감을 따는 건 생각보다 하체의 근력이 필요했다. 애매한 경사에 서서 흙에 발바닥을 파묻은 채 감을 따면서도 다리가 흔들리지 않게 힘을 딱 줘야 했다. 시간이 지나자 목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왔다.




그렇게 서른 개 남짓 땄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아빠와 동생은 환상의 콤비가 되어있었다. 아빠가 감을 따면 동생은 주머니에 쏙 빼서 바로 비료포대에 넣었다. 엄마는 내가 딴 감을 주워서 정리해 주셨다. 엄마의 손도 제법 빨랐다. 역시 경험자는 달랐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휴식이 필요했다. 노란 상자에 걸터앉아 엄마와 등을 마주대며 아직도 징징하게 남은 감들을 바라봤다. 나는 저 정도는 까치에게 양보하자며 심심하게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다시 힘을 차린 나는 아빠와 다시 감 따기에 돌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무리가 되었다. 파김치가 된 동생은 경운기에 걸터앉아 잠깐 졸고 있었다. 이 힘든 일을 작년엔 아빠와 엄마만 하셨다니 대단하고 또 죄송하기도 했다.


집으로 내려온 우리는 급격히 허기졌다. 동생은 짜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했고 엄마는 계란 프라이를 올린 기가 막힌 짜파게티를 해주셨다. 파김치와 곁들여먹으니 환상이었다.





본격적인 감공장 가동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어야 했다.

부모님은 이만하면 충분히 도왔다며 나와 동생보곤 쉬어라고 하셨다.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이미 퍼져버린 나는 쉴 수밖에 없었다. 곶감을 만들 감을 제외하고 외갓집과 지인 등등 소중한 분들께 보낼 감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상자에 예쁜 모양의 감을 하나씩 담았고 아빠와 동생은 포장을 담당했다.


그렇게 많던 감은 어느덧 각자의 자리에 가있었다. 곶감이 될 준비를 하는 감들도 있었고 상자 안에 살포시 담겨 누군가의 기쁨이 될 감들도 있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한 보람이 느껴졌다.


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찬란한 유산, 감나무 덕분에 가족들과 재밌고 보람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매년 이렇게 감공장을 돌릴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득해진다.


너무 고생스럽지 않게 2~3그루의 감나무만 남겨두면 좋겠다. 그럼 더 즐겁고 행복하게 감공장을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감나무와 쭉 함께 하겠다는 대쪽 같은 아빠의 생각이 바뀌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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