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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창인 Aug 14. 2023

114. 실종

3

실종 사건이 일어났다 온 지구가 들썩였지만 들썩임도 이내 실종되었다

박스에 포장된 사람들이 떠들기를 멈추었다 남은 이들만이 끈적한 침방울 사이에서 허우적댔다 그들은 아직도 무엇이 실종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는 의미라 했고 누구는 방법이라 했다 누구는 온정이라 했고 누구는 예술이라 했다 그리고 누구는 실종이 실종되었다고 했다 그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또 다른 남은 부류는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그들에게는 오직 실종을 막는 것이 중요했다 누구는 서로를 껴안았고 누구는 법조문을 외웠다 누구는 예쁜 이야기를 만들었고 누구는 팔뚝에 감긴 힘줄을 부풀렸다 그리고 누구는 가장 밝은 빛으로 어둠을 긁어내려 애썼다 그래도 실종은 실종되지 않았다 실종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실종뿐이었다


2

너는 최후의 보루가 아니다 너는 나머지의 나머지 너는 모두가 통과한 칸막이를 여전히 들락거리는 고장난 날개

너의 협탁에는 먹다 남은 제로콜라 캔이 있다 날파리 두 마리가 너의 단내를 핥는다 너는 날파리가 단내를 모두 핥아내려면 며칠이 필요할지 가늠해 본다 그것을 너의 수명으로 삼기로 결정한다

먹다 남은 제로콜라 캔 뒤로 작은 액자가 있다 너는 액자가 도려낸 구름을 감상한다 갑자기 고양이가 액자 속으로 불쑥 들어온다 고양이도 액자 뒤에서 너의 단내를 핥는다 너는 수명을 앞당길 수 있음에 행복하다

너는 시를 쓴다 너는 더욱 빨리 닳고 싶어 시를 쓴다 그러나 너의 시는 단내가 나지 않는다 너의 죽지에 오직 자국만이 난다


1

나는 쓰여도 쓰이지 않는다

쓰게 만들거나

쓰지 않게 만들거나

이따금 당신을 휘감는 근원 모를 바람처럼

나는 늘 여기에 있으나 어디에도 없다


이제 우리의 언어가 흩어지는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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