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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는 고작 26살, 아빠는 28살이었다.
나는 젊은시절의 부모님 나이에 가까워진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깨닫는다. 늦은 밤 잠든 나를 깨워 치킨 먹을래? 하던 술이 잔뜩 취한 빨간 얼굴의 아빠, 7살 때 폐렴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던 내게 조퇴를 맞고 오라던 엄마는 내가 그랬어?라고 말하는 50대가 되었고 나는 그들의 어린 날과 가까운 25살이 되었다. 당시에는, 그러니까 7살 15살 스무 살의 과도기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행동이, 힘든 날 딸 얼굴 한번 더 보고 힘을 내려던 어린 아빠와 성실함을 모르고 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던 어린 엄마로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현실의 우리에게 홍차와 마들렌을 주는 프루스트 부인 같은 사람은 곁에 없지만, 스스로 찾는 ‘기억’은 ‘나이’와 ‘경험’에 비롯된 것일까?
프루스트를 느껴야 했지
이번 주는 오래간만에 아이디어를 내야 했다. 들었던 한 마디, 경험들을 모두 불러내 뭔가를 만드려고 이틀간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고 풀린 눈으로 좀비처럼 어슬렁거렸다. 생각을 거듭해서 ‘프루스트 효과’와 관련한 아이디어를 내긴 했는데, 사실 영화도 책도 보지 않았던 터라 써놓고 나니 찜찜했었다. 겉핥기식으로 내놓은 느낌이랄까. 시간이 촉박해서라고 핑계를 다 내놓고, 죄책감에 그다음 날 영화를 다운 받았다.
쭉 다 보고 나서 내가 만든 ppt를 보는데, 마음이 놓였다. 신기하게도 영화의 소재와 아이디어의 방향이 딱 맞다. 프루스트 효과에서 시작해, 컨셉 방향을 내놓았어서 아이디어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생각과는 달랐다.
프랑스의 문호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는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과자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출처 네이버 사전
첫 번째 달랐던 것. ‘향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책에서는 냄새라지만 영화에서 마르셀은 단지 먹는다. 먹으면 순간 정신을 잃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두 번째 달랐던 것. 영화에 대한 선입견. 사실 작년에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이 영화에 대해서 글을 썼던걸 보고 ‘정말 재미없는 영화’ 겠구나 싶었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었나 깨달았다. 동시에 일부 글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선입견으로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느꼈다.
글을 쓰려니, 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나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짧은 리뷰?
"잊었던 기억을 떠올려 유년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정도로 이야기하기엔 한 문장이 110분이라는 영화의 러닝타임을 담기엔 말도 안 되는 줄거리다.
영화는 꽉 차있다. 원색들이 화려하게 표현되는 색감, 벙어리 주인공 그래서 더욱 집중되는 배우의 표정, 내용 흐름의 구성, 연출들로 어디 하나 모자람이 없다. 또한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구성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같다. 각자의 개성들이 넘치고 공통점은 없는데, 그저 그것이 하나의 그림이다. 영화를 보며 단한 순간도 딴짓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넘쳐흘러 느끼느라 바쁜데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글은 영화 줄거리 요약도, 평론도 아니다
'마담 프루스트의 정원'이 나에게도 그랬듯, 당신의 오감을 자극시킬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만 또는 좋지 않은 기억들 때문이다. 주인공 마르셀은 어릴 적 일부의 기억으로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되었다. 대신 피아니스트로서는 훌륭하게 자라났다. 본인의 선택은 아니었고 키워준 두 이모의 뜻으로.
당신은, 나는 같은 세상에 어떻게 살고 있는가
당신은 마냥 자유롭게 컸는가? 아니면 부모님의 뜻과 사회의 가르침대로 살았는가? 본인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는가? 나는 평범한 중학교, 인문계 고등학교, 4년제 대학교를 다니면서 한 번도 내가 잘 하는 것, 좋아하는 것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적은 없었다. 아르바이트나 공모전 토익 또한 했지만 뚜렷한 이유보다는 남들이 다 하는데 뒤쳐지는 것 같아서, 조급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나여서, 사회의 고용시장에 내던져지고 진로를 선택해야 했을 때 나는 혼란스러웠다. 사실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분명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나는 쓸모없는 '무경력'신입으로 취급받았다.
생각 없는 삶은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어찌어찌하여서 취직을 하긴 했었지만 고민은 더 커졌다. 나는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좋아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나만의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민했던 시간과, 노래를 했던 것, 만화를 그렸던 것 그 모든 것이 필요했던 과정임을 문득 새로운 취직의 면접에서,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지금 깨닫고 있다. 지나고 나니 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머리 터지게 고민했던 방황은 경험과 성장으로 남았다. 그 누구도 이런 것들을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내 삶의 길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많은 방황이 따랐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자료를 찾고 기억을 더듬는 하루 속에 사노라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혹은 나는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의 한국을 바라보는 25살 보통 여자의 시선
생각이 많은 성향의 사람으로서 관점일 수도 있지 않나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져보았었다. 그러나 주변 친구들이 취업을 준비하며 혹은 퇴사를 하며 같은 이유로 급격히 우울해지는 것을 봤을 때 필시 이것은 개인의 성향보다는 구조의 탓이란 결론을 내렸다. 문과생들에게 답은 하나다. 열심히 스펙을 쌓아서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하기. 누군가는 말했다. 이 시대 청년실업의 이유 중 하나는 눈이 높아서라고.
중소기업에 들어가면 시스템은 대부분 체계적이지 못하며 월급도 짜다. 돈은 똑같이 쓰는데 모이지 않는다. 결국 또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게 된다. 대기업으로 이직 시 중소기업의 경력을 깎기도 한다. 처음부터 기업문화와 프로세스를 새로 배우는 것도 태반이다. 그런데 눈이 높아서 취직을 못하는 거라고? 이과생들보다 수는 훨씬 많은데 취업문은 좁다.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아야만 사회가 가르쳐온 답대로 갈 수 있다.
막상 가이드대로 따라오면 경쟁에서 이기든 도태되든 20대들은 혼란에 부딪히기 시작한다. 언론에서는 백세시대에 대해 떠드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말 잘 듣는 사무직들은 은퇴 후 갈 곳이 없단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뻔히 인생의 답이 보이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사회도 모르는 미래의 길을 가르쳐주지 않으니 멘붕에 빠진다. 결국 스스로 준비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답을 창업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창업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헬조선을 부르짖게 된다.
나는 강렬히 생각한다
예술가적 마인드를 가진다면, 창의적인 무언가를 펼치길 꿈꾼다면 아마도 기존의 루트에서 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득 '생각한다'라는 말을 쓰면서 기억이 떠오른다. 이전 직장의 국장님은 내 말투의 '제 생각에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를 고치라고 말했다. 아무도 네 생각이 궁금하지 않다고.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주'님들은 확실한 팩트만을 원한다고. 생각 없는 아이디어가 어디 있는가? 뭘 그렇게 확신하는가? 정말 당신이 본인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면 생각해야 한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고 삶의 의미를 느끼고 누려야 한다.
처음 맞이 하는 나날들에 혼란스럽고 수없는 선택 앞에 놓여있노라면, 누군가가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나의 처음을 선택하고 앞으로의 내 인생의 주인공은 오롯이 '나'임을 잊지 않기를. 선택이 옳든 그르든 내가 선택했을 때 훗날의 더 큰 후회가 없음을 새기기를.
주인공 마르셀은 마지막 훌륭한 피아노 연주를 끝으로, 손가락을 세게 부딪혀 다시는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이, 이모들이 설계했던 삶이 끝난다. 그러나 본인의 선택으로, 우쿨렐레 연주자가 된다.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그의 표정이 훨씬 밝아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은 아닌 것 같다.
'모든 기억들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음을' 당신도 나도 잊지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