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이 나를 지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우량주를 보유한 사람보다
든든한 일이다. 명절이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향에 내려오지 않던 제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석에 와서 알밤 줍기 체험을 하고 돌아간 슬기가 설날에도 찾아왔다. 당당하게 딸에게 세배를 받고 용돈과 두 쪽 쿠키를 건넸다. 우리 아이들에게 언니이자 누나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제자 중 한 명이다. 슬기는 영화감독이자 아이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그 일이 당장 넉넉한 수입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닌데 명절마다 이렇게 마음을 건넨다. 그 마음을 받을 때마다 나는 수억 원의 빚을 진 기분이 든다.
“슬기야, 카페 어디 가봤니?”
“글쎄요. 집에 오면 카페는 잘 안 가요.”
나는 답답할 때마다 드라이브 겸 글을 쓰러 가는 해안도로 카페로 차를 몰았다. 차 안에서는 요즘 읽는 에세이 이야기부터 영화 이야기, 유튜브 숏의 유해성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딸은 그 사이에서 최신 게임과 아이돌 이야기를 꺼냈다. 나보다 슬기와 더 잘 통한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나는 잠시 그 대화 속에서 행복한 소외감을 느끼며 운전에 집중했다.
기저귀를 차고 계단을 기어오르던 슬기를 기억하는 나처럼 슬기도 뱃속에 있던 우리 집 막내가 중학생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내가 슬기의 성장을 바라봤듯 슬기도 같은 눈과 마음으로 내 딸의 성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를 만드는 슬기는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게 이런 부탁을 한다.
“선생님이 해주신 말 중에 이 부분을 아이들 대사로 썼어요. 한 번 봐주세요.”
나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고 공부한 아이가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이유는 아마도 지식이 아니라 세월 속에서 얻은 경험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늘 부족하고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 오히려 내가 더 많은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슬기는 알고 있을까? 그래도 슬기가 내가 힘이 되고 있다고 믿어 준다면 좋겠다.
햇빛을 가득 실은 차는 해안도로를 달려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카페에 도착했다. 명절이라 카페는 북적였다. 자리가 없어 한 층 아래로 내려갔다. 여러 번 와 본 곳이지만 처음 앉아 보는 자리였다. 위층에서 보던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바다가 더 가까웠고 카메라를 들면 바다와 조형물이 겹쳐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졌다.
“한 곳만 고집하는 게 참 어리석다는 걸 오늘 또 느꼈다.”
슬기에게 같은 장소라도 1층과 2층에서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맞아요. 지난번에 아이들 갈등 상황 의논 드린 거 기억나세요?”
“그래. 기억난다. 잘 해결했어?”
“선생님 말씀대로 다시 관찰했는데 제가 한쪽 아이 편에서만 보고 있더라고요.”
같은 풍경을 어디에서 보는지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듯 아이들의 상황도 그랬다며 웃었다.
슬기는 그 말을 하며 내 조언은 항상 훌륭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나보다 훨씬 훌륭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서로를 칭찬하던 말을 멈추고 딸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집으로 돌아와 슬기가 두고 간 선물을 풀어 보았다. 정성껏 포장된 종이 안에는 에세이집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책갈피 사이에 편지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슬기가 내게 남긴 문장이었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선생님을 생각하면 알 수 없는 든든함을 느껴요.
고민이 있거나 서글플 때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가고 싶어 져요.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소중하고 근사하다는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짐 자무시 영화감독님이 하셨던 말을 공유하고 싶어 적어 보내요.
"가장 단순한 것들이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죠.
예를 들어 대화라던가, 누군가와의 산책,
또는 구름 한 점이 지나가는 방식,
나무 이파리들에 떨어지는 빛,
또는 누군가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일.
이러한 것들이 온갖 유식한 잡동사니 헛소리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어요."
순간순간 사소한 기쁨들이 선생님 곁에서 반짝이는 2026년이 되시길 바라며 슬기 드림
이 짧은 편지가 내 자존감에 조용히 날개를 달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