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라는 말은 언제 써야 할까

진심의 밀도

by 선하게


시험에 또 떨어졌다.

이번에는 이상하게 다르다.

무너졌는데, 감정이 터지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내려앉은 느낌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미 끝나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그동안 한 게 아깝잖아.”

“조금만 더 하면 붙을 거야.”

그 말들 속엔 분명 응원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도움이 아니라 압박처럼 들렸다.

내가 진짜 듣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힘들면, 멈춰도 돼.”

그 말 하나면 됐는데.

맹자의 말처럼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은 먼저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며

시련을 견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은 때론 잔인하다.

희망은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 될 때가 있다.

“계속하면 언젠가 된다.”는 말은

지금 당장 그만두고 싶은 사람에겐

삶의 여지를 앗아가는 주문처럼 들린다.

그렇게 ‘멈추지 못하는 구조’ 안에서

사람은 점점 부서진다.

성공은 당연한 것이 되고

실패는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무한 반복의 숙제처럼 된다.

그러다 문득, 나는 묻게 됐다.

실패라는 말은 도대체 언제 써야 하는 걸까?

그 말은

누가 쉽게 정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단어를 붙일 권한은 오직 나에게 있다.

내가 끝났다고 느껴졌을 때.

더는 그 길을 원하지 않을 때.

아니, 이젠 나를 지키고 싶어 졌을 때.

그때 비로소

“여기까지만 해볼게”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실패가 아니라,

나와 타협한 용기다.

도망이 아니라,

다른 길을 찾기 위한 멈춤이다.

실패는

어쩌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넘어졌고,

다시 생각하고 있고,

다음 선택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더 이상 세상의 잣대로 나를 구기지 않기로 했다.

실패라는 말을

나를 향한 모욕이 아니라

이만큼 애쓴 나에게 보내는 인사로 바꾸기로 했다.

“충분히 애썼어.

멈춰도 돼.

그리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내 삶의 실패는

세상이 정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나에게만 붙일 수 있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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