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학교에 전혀 다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테니, 누구나 동창회 하나 정도에는 가입해 있을 것이다.
아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건 나같이 나이가 좀 든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여하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초, 중고, 대학의 동창회에 하나 이상은 들어가서 지속적인 모임을 갖는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또한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중고등학교 동창회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해 왔고, 더 전에는 대학 동문들 모임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장 재미있다고 얘기를 하는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에는 아직까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내 어린 시절의 가정 환경이 남들과 달랐던 원인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거의 3년 사이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도 세 곳 정도는 이사를 다녔던 걸로 알고 있다.
예외적으로 내가 입학해서 5년 동안 다녔던 강원도 영월의 거운초등학교는 아버지가 유난히 오래 근무했던 곳이었다.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 마을은,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게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거리들이 많이 간직되어 있는 곳이었다.
영월 읍내에서 북쪽으로 15 키로 정도 올라간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경치가 빼어난 데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명절 때는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자주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을 정도로 인심이 좋은 동네였다.
지금은 분교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거운초등학교는 남한강의 상류인 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만약 아버지가 거기서 1 년 더 있어서 내가 그 학교를 졸업했다면, 나는 훨씬 오래 전부터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6학년에 올라가던 해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기 때문에, 그건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거기서는 졸업생이 아니니까, 그리고 새로 전학간 학교는 한 해밖에 다니지 못한 관계로 정이 들지 않아서 그런지, 양쪽 다 졸업 후에 가끔씩이라도 만나는 친구 하나도, 졸업사진 한 장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항상 초등학교 5학년까지 살았던 영월읍 거운리를 고향으로, 거운초등학교를 모교로 생각하면서 살았다. 게다가 그 학교에 같이 다녔던 어떤 여자애를 깊이 연모했던 상태라 더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교통망이 너무 안 좋은데다가 전화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이라, 그 시절의 친구를 만나본다거나 모교를 찾아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거의 50대까지는 대학에 다니느라, 직장에 근무하느라, 서울로, 전라도 광양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겨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고향은 물론 모교도 내 의식 저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던 중, 광양에 살면서 해마다 한두 번씩 참석하던 영호남 중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한 친구가 내가 다녔던 바로 그 초등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이라고 해도 정말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초등학교 동기생을 모두 합쳐 봐야 고작 30 명 남짓이었다. 게다가 너무 산골마을이라서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가 두세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동창 400여 명 중에 영호남에 거주하는 친구는 20 명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희박했을까? 어쨋든 이 친구를 만나면서 나는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 볼 수 있는 통로를 찾게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사실상 내가 이름이라도 기억하고 있던 초등학교 동창은 거의 매일 강가에서 함께 놀던 남자애와 남몰래 마음 속으로 좋아하던 여자애, 딱 두 명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얼굴이나 이름은 물론 같이 공부하거나 놀았던 희미한 이미지도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엄밀하게 얘기하면 나는 이 학교 졸업생도 아니었다.
그래서 동창회에 한 번 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또 몇 해가 흘러갔다. 코로나가 몇 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아, 이제 이 세상 끝날 날도 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가보자는 심정으로 친구에게 먼저 의사 타진을 해 달라고 부탁했고, 얼마 후에 친구에게서 동창 친구들이 다들 환영한다고,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매년 11월 둘째 주 토요일에 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그날 오후에 ktx로 제천역에 도착해서, 친구의 차를 타고 청풍호 옆에 자리잡은 호텔로 갔다.
그날 저녁에 남자 9명, 여자 6명이 모였고, 내일 2명이 더 온다고 했다. 간단한 회의를 마치고 사담이 시작되었는데, 의외로 나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말을 거는 친구가 많아서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지만, 거기에 대한 내 기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서 엄청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나도 미리 사진이랑 이름을 카톡으로 받아놓고, 나름대로 열심히 외워서 모임에 갔지만,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건 상대방이 몰랐고, 상대방이 중요하게 여겼던 화제는 내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특히 마음은 그 옛날 어린 시절로 돌아가 파릇파릇한데, 주위에 둘러 앉아 있는 친구들은 얼굴과 몸매가 세파에 시달려 형편없이 무너진 노인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바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즐거웠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불리고, 주거니 받거니 마신 술로 우리는 매일매일 만나는 소꿉친구처럼 서로 어울렸다.
밤늦게까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도 췄다. 다음날은 청풍 관광단지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도 오르고, 함께 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메산골에서 자라나,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 동창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다리를 절고, 이빨이 여러 개씩이나 빠진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다들 배운 것도 부모의 도움도 없이, 맨주먹으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런 동창들이 모임에 사과 상자를 기부하고, 자기가 회식비를 부담하겠다고 서로 나서는 걸 보니, 어린 시절의 그 순수한 마음이 그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 저절로 발현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3년 만에야 모임을 갖게 되니, 더욱 서로간에 애틋한 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특히 여자 동창 하나가 몇 달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겨우 회복되었는데,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모임에 참석했고, 여러 친구들이 그 친구를 처음부터 끝까지 케어해주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우리는 워낙 가난하던 때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탓에 그 시절 사진이 한 장도 없는데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친구가 진짜 그 옛날 코흘리개들이 맞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까운 지역에 살면서 가끔씩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면 길 가다가 마주쳐도 모르고 지나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런 동창회라는 것이 옛친구 다시 사귀기에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인지, 직접 참석해 보니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여럿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서로 이름이나 얼굴을 익히기도 쉽고, 협력해서 조각난 퍼즐을 맞추다보니 까마득한 옛날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기에도 용이했다.
나는 이 모임에 참석한 후에 곧 이름이나 얼굴이 거의 생소하던 동창 친구와 친해져서 카톡도 자주 주고받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놀러도 한 번 갔다 왔을 정도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만일 초등학교 동창회에 남자들만 모인다면 이런 분위기가 날까?
일반적으로 아주 어릴 때는 남녀 관계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고, 내 경우 이성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11 살 무렵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보니 남녀 관계가 꼭 초등학교 학생들이 취하는 태도와 많이 닮았다. 모임에서 가만히 관찰해 보면, 주로 남자들 여자들 모두 끼리끼리 모여서 놀지만, 항상 이성들의 동태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눈치로 알 수 있다. 이건 인간도 생물의 한 종이기에,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고 싶어하는 모든 생물이 가진 본능이 저절로 작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뉴스에서 어떤 50대 여성이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소를 했다는 보도를 보았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모임은 보통 한 해 한 번씩 갖는 것이라, 오랫만에 만난 데다가, 어릴 때부터 허물 없이 지내던 가락으로 조심성 없이 행동하다 보니,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개연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흉허물 없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지켜야 할 선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
내가 이 모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이유 중에는 마음 속으로 좋아하던 여자애를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동창과 특별한 관계를 갖겠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라도 붙잡고 싶고, 또 꽃다운 날들의 추억들을 다시 떠올리며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심 이번 한 번만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려고 했다. 거기에 딱히 친하게 지내던 친구도 없고, 내 성격상 열 명도 넘게 모이는 왁자지껄한 모임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모임에 참석해 보니, 친구들 모두 오래 만나왔던 사이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예순이 넘으면 다시 태어난 것처럼 제 2의 인생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두번째 인생에서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아닌가?
이번에 내가 난생 처음으로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할 수는 없으니, 동창회에라도 들어가 활동해 보라는 내 운명이 보내는 신호인지도 모르겠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여하튼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