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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Jun 30. 2023

일인칭 단수

장이머우 영웅, 스탈린이 죽었다, 한낮의 어둠

장이머우의 ‘영웅’(2002)은 논란거리가 많은 영화였다. 영화의 무명이란 인물은 원래 조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가족이 몰살당한 한 후 진나라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후부터는 원한을 갚으려 마음먹는다. 그때 천하의 강자는 진왕이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자객들을 죽이는 자가 있다면 100보 앞에서 만나준다고 공포한다. 복수를 꿈꾸는 무명에게 솔깃한 제안이다. 무명은 은모장천, 파검, 비설을 만나 진왕 암살 계획은 밝히고 협조를 구한다. 무명은 왕이 자신을 믿게끔 증거물을 제시한다. 그러나 왕은 거짓말을 간파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무명의 말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진왕의 인물됨에 감탄한 무명은 그와 다른 세 사람이 연극을 벌였음을 밝힌다.   

   

진실은 이렇다. 은모장천과 비설은 무명의 계획을 받아들인다. 둘은 무명에 패한 것처럼 꾸민다. 반면 파검은 무명에게 협조하지 않는다. 비설과의 협공으로 파검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이다. 파검은 ‘천하’라는 글씨를 바닥에 남긴다. ‘천하일통 태평만민’이라는 사상이다. 전국시대 분열된 세력은 백성들에게 고통만을 안겨준다. 세상이 하나가 되어야만 평화가 올 터인데 통일을 완성할 인물로 진왕 만한 사람이 없다는 주장이다.     







 

무명은 가까운 거리에서도 진왕을 살해하지 않는다. 진왕과 신하들은 어쩔 수 없이 무명을 죽이면서도 그를 영웅이라고 칭한다. 영화는 진시황이야말로 영웅을 알아보는 진짜 영웅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하나의 제국이 완성되는 데에는 독재자 본인의 카리스마와 비전 외에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도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동의라고 말하기는 너무 섣부른 평가일지도 모른다. 작은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가 이미 그어져 있다. 그걸 넘으려고 해 봐야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물리적으로 바로 위해가 가해지는 현장에서 그걸 초월할 이가 몇이나 될까. 오히려 독재자를 인정하면 대의 완성에의 환상도 기대할 수 있다. 수많은 제국이 피고 졌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차라리 이 한 몸 사라져 천하가 평화를 누린다면 그게 더 나은 결정이 아닐까’라고 고뇌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만도 이아누치 감독의 ‘스탈린이 죽었다’(2017)는 블랙코미디이다. 1953년 갑자기 죽은 스탈린을 두고 좌충우돌 권력투쟁에 몰두하는 소련의 인너 서클을 그린 영화다. 스탈린이 죽자마자 흐루쇼프, 베리야,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등은 우스꽝스러운 암투를 벌인다. 어제까지 주인에게 충성을 다 하던 이들이 돌변해 서로 죽이려 미친 듯이 달려든다. 치졸한 합종연횡과 권모술수가 뒤를 잇는다. 이 과정에서 베리야는 느닷없이 총살당한 후 시체까지 소각 처리된다. 몰로토프는 몽골 주재 대사, 말렌코프는 카자흐스탄의 발전소 소장, 카가노비치는 우랄지방의 시멘트 공장의 책임자로 좌천된다. 한때 소련을 좌지우지하던 이들의 믿기 힘든 추락이다. 결국 흐루쇼프가 누구도 도전하지 못할 지도자로 등극한다. 1964년 10월에 실각할 때까지 고작 10여 년이었지만.       








1930년대 대숙청 기간 동안 소련에서는 적어도 7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반혁명 분자나 인민의 적, 파괴 분자 등의 혐의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하급 관리자나 노동자, 농민만은 아니었다. 고위층 당원, 직업 혁명가나 군부도 억압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때 살생부에 기록된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처음에는 ‘올바른 행동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라며 울분을 품었을 것이다. 자신이 체제의 반역자가 되었음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끝없는 심문과 자기 질문이 이어지면서 반항과 번뇌의 시간이 오간다. 대부분은 고문과 세뇌를 거쳐 당국이 원하는 대로 굴복한다. 자신도 장애물일 수 있다는 것, 장애물은 예외 없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인다. 그동안 무수한 희생을 보아왔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작은 죽음쯤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역사가 갈 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누구든 삶에 존재 이유를 부여하고 싶을 것이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매혹되어 살아왔던 사람일수록 자기 합리화에 절절할 걸로 생각한다. 그걸 찾지 못한다면 삶이 너무나 비참해질 테니.      


스탈린은 자신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걸 알았어도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까. 어쩌면 천하를 위해 제 한 몸 사악한 사람이 되기로 작정한 건 아니었을까. 이런 어불성설 논리를 경험했던 시대를 그린 소설이 있다. 아서 쾨슬러(1905~1983)의 ‘한낮의 어둠’(1940)이다. 주인공은 루바쇼프라는 골수 볼셰비키다. 그는 어느 날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요제프 K처럼 이유 없이 체포된다. 루바쇼프는 자신도 그 주인공처럼 죽을 것임을 안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 깃들인 ‘이유 없음’을 ‘이유 있음’으로 바꾸려 한다.     


헝가리 유태인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아서 쾨슬러는 매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한 인물이 이처럼 다양한 정체성을 갖기도 드물다. 만일 이 소설이 냉전 시대에 나왔다면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한쪽에서는 파시즘이, 다른 쪽에서는 사회주의가 세계를 양분하려는 때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가 쓴 글이다. 쾨슬러는 1919년 벨라 쿤이 헝가리에서 잠시 공산혁명에 성공했던 시기부터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1931년부터는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1938년에는 당을 탈퇴하는데 ‘모스크바 재판’에 영향을 받았던 걸로 보인다. 쾨슬러는 2차대전 중 영국으로 망명해 정보부의 핵심 인사로 활동한다. 극좌에서 극우로, 유물론자에서 ESP 신봉까지. 참 다재다능 신출귀몰했다.

    

'모스크바 재판'은 1936부터 1938까지 열렸는데 사법 당국이 미리 피고의 유죄를 결정한 채 보여주는 공개 쇼에 가까웠다. 스탈린 체제는 피고의 혐의와 평결을 보여주면서 반체제 인사들에게 경고를 줄 목적으로 재판을 연출했다. 피고인들은 트로츠키주의, 스탈린 암살 시도, 자본주의 책동, 혹은 간첩 혐의 등으로 체포, 처형되었다. 지노비에프, 카메노프, 부하린, 리코프와 같은 오랜 활동가들이 누명을 쓰고 사라졌다. ‘한낮의 어둠’의 루바쇼프는 이들을 형상화한 한 인물로 보인다.      


루바쇼프는 한때 ‘우리’가 해냈던 위대한 일들을 기억해 낸다. 지금은 ‘그들’이 ‘우리’의 일들을 변형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문자는 루바쇼프가 ‘우리’ 대신 ‘나’라는 일인칭 단수를 중시하기 시작했다고 경고한다. 전체주의자들에게 개인은 위험하다. 과거 루바쇼프는 ‘나중을 위해 스스로 삼가야 하는 의무가 소부르주아 도덕성의 계율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신의 무오류성을 믿지 않는다. 그런 허약한 신념 때문에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루바쇼프는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 ‘그것에 대해 너는 대가를 치러야 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심문자는 요새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친구를 배반하거나 적과 타협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요새를 보존하는 일, 그것이 역사가 부여한 과업이라 한다. 근시안적인 사람들은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한다. 지도자는 ‘넓은 관점과 집요한 전술을 가지고 반동의 기간을 견뎌 내며 요새를 지키는 자’이다. 때로 지도자는 ‘인류에 냉정하고 무자비하다. 그는 늘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하도록 저주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류를 감히 증오하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사랑’을 대표한다. 스탈린을 빗댄 넘버 원이라는 인물, 그는 그렇게도 위대했구나. 한 몸 초개같이 버려서 인류를 위한 악마가 되었으니. 루바쇼프는 이런 지도자의 고통 어린 과업을 이해하지 못한다, 진보, 역사에 대해서도 근시안적인 구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루바쇼프는 자신의 ‘물리적 제거’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물리적 제거’란 정치활동의 중단이자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술적이고도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다. 죽음은 추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것이 되었다. 실재하는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왔다. 그는 명예롭게 죽기로 한다. 일반인의 명예란 신념을 위해 살고 죽는 것, 즉 품위와 관계있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루바쇼프는 명예의 정의를 바꾼다. 즉 명예는 허영심이 없이,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최후의 결과에 이르도록 봉사하는 것이다. 그 결과 루바쇼프는 기소 내용에 사실이라고 서명한다. 당은 마지막 봉사로 침묵을 강요한다.      


그는 엄격하게 살아왔다. 논리적으로 계산했으며 이성에서 나온 비논리적 도덕성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순수 이성의 광란 속에서 살았다. 그는 자신에게 묻는다. ‘넌 대체 무얼 위해 죽는 거지?' 답변할 말이 없었다. 당과 인민에게 충성하기 위해 해온 일은 그 자신의 영혼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루바쇼프는 죽을 무렵에야 애써 지우려고 한 반혁명적 ‘대양적 감정’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은 채 사유한다. 죽음 속에서는 형이상학도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당연하게 주창하고 또 받아들였던 시간. 전체주의자들이 ‘문법적 허구’로 여긴 ‘일인칭 단수 속에 완전한 실체를 갖춘 어떤 요소가 있음’을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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