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림 Aug 20. 2023

어둠과 고요에의 예의

마이노리티 리포트,

                                     

눈, 코, 입, 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이 소중한 감각기관은 쉴 틈이 없다.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늘 분주하다. 평온함이란 게 어떤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여전히 인권 부재 현장이 드물지 않다. 이 문제는 사람을 기능화된 부속품으로 보는 일과 관련이 있다. 신속한 택배, 지나치게 친절한 서비스, 턱없이 위험한 노동 등은 값싼 노동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근본적인 문제까지 생각이 확장된다. 어둠과 고요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통찰하고 사유하는 여건을 방해하려는 무언가가 있다. 이것은 값싼 인권 의식과 더불어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의 감각은 나의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보고 듣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구심이 날이 갈수록 선명해진다. 이곳은 도시다. 도시는 소음과 원치 않는 빛의 집합소임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는 소음과 전파, 빛에 예민한 이는 아예 도시에서 떠나면 된다고 충고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싶다는 희망도 품는다.     

 

듣고 싶지 않은 데도 누군가 목청껏 소리 지는 일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제 목을 써서 큰 소리를 내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로 처리한다. 더 큰 문제는 기계음, 마이크로폰 그리고 끊임없이 속삭여대는 미디어들이다. 소음은 사람들을 서로 밀어내고 고립시킨다.       


어디서든 소리를 통제해야 한다는 건 반민주, 비민주적인 발상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큰 소리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일방통행의 하수인이 되는 건 알고 있다. 그들은 전체주의의 신민이 되었던 이력이 있다. 기계 장치가 내는 큰 소리에 부합하는 말 잘 듣는 사람들은 권력에 통제될 가능성이 크다. 누구든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그 권리가 타인을 강요하는 순간, 자신들을 일으켜 세웠던 과거의 그 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음량을 조절하는 건 남을 배려하는 일이다. 모두가 큰 소리를 내면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건 혼란이니까.      


지하상가를 지나다 보면 수많은 매장에서 흘러나온 음악과 노래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이 잦다. 누구도 집중해서 들으라고 한 적은 없으니 무죄일까. 소리에도 눈에 보이는 마수가 있다면 제각기 움직이는 에너지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또 잡아먹어 아수라장이 되고 말 테지. 영업용 차량이나  선거유세 차량도 무차별 소리로 광고를 대신한다. 나는 듣고 싶지 않아도 방법이 없다. 합법적이라 용납해야 하나.      


요즘은 너도나도 스마트폰이 있으니 모두 잠재적 소음유발자가 될 수 있다. 숲 속에 가는 이유는 잠시 속세를 벗어나기 위함이다. 잡념을 잊고 오로지 걷는 행위에 몰두한다. 새소리, 바람소리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향연을 펼친다. 몰아의 경지에 접어든다. 산책자들을 고독하게 남겨두는 배려가 필요하다.   


짧은 엘리베이터 운행 중에도 영상이 흘러나온다. 심폐소생기나 기타 장비들을 무료로 지원받고 대신 광고를 야한다. 그 덕분에 공공 서비스 가격이 조금은 낮아진다는 논리다. 다양한 시각 강탈자가 매일 탄생한다. 어두운 벌판을 달리는 광역 버스 안에서도 머리를 들기가 겁난다. 고개를 들자마자 번쩍이는 광고판을 마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닌 것 같다. 눈을 감지 않으면 피할 수 없는 온갖 화면들. 간판이나 네온사인은 정지해 있기라도 했지만 큰 벽면을 도배한 거대한 동영상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눈을 사로잡는다. 사유를 빼앗기로 작정한 것 같다. 이런 데서라면 플라톤도 곤란하다.

    

고요 그리고 침묵 그게 정성이고 정상 아닐까. 적어도 서로 조용하게 지켜주는 것. 그건 의도적 노력이고 배려다. 우리 인간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내는 소리 외의 소리는 고요함의 법주에 들어간다. 자연의 소리는 합격이다. 어느 . 그곳에는 눈부신 빛이 없다. 별들만이 깜박인다. 풀벌레, 먼 데서 흘러가는 개울물, 산속 어딘가에서 울어대는 이름 모를 새들만이 있다. 원래는 그게 정상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그로테스크한 미래를 그렸다. 그곳은 ‘빛’과 ‘소음’이 충만한 곳이다. 미래 기업은 대중 광고가 효율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광고는 개인 맞춤으로 서비스된다. 홍채에 칩이 이식되어 있으므로 각자가 필요한 상품에 즉시 반응한다. 자기 눈에만 보이는 광고 홀로그램이 끊임없이 신제품을 읊어댄다. 유튜브나 구글의 알고리즘은 이제 망막을 자극해 눈앞에서 소비자를 유혹한다. 이 시대 소비자들은 자기 감각의 주인이 아니다. 누군가의 하수인처럼 꼼짝 없이 보고 들어야 한다.  존재 이유는 소비. 밑도 끝도 없이 소모하기 위해 태어났다.


 ECM 레이블의 모토는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The most beautiful sound next to silence’다. 음반 제작사도 최고는 임을 알고 있다.     


소중한 감각기관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퇴행한다. 멀리 있는 건 보여도 가까이 있는 건 보이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감내해야 한다. 세상이 온통 우유 빛깔로 보이거나 늘 작은 먼지가 떠다닌다는 이들도 있다.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일도 일어난다. 그런가 하면 음식에서 도통 냄새를 못 맡거나 지구가 자전하는 굉음에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빛과 소리에의 노출을 지속적으로 줄이라.’ 노인이 되어가는 까탈스러운 이들을 위한 충고만은 아니다. 카뮈는 ‘작가의 목적은 문명이 스스로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라고 했다. 문명은 ‘나’를 뺀 상대방을 유린해 내 것으로 취하고 이용해 왔다. 자연은 이미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나도 상대가 있어야 성립하는 상대적인 존재임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문명은 ‘너’와 ‘나’ 모두를 파괴하고 종국에는 스스로를 망가뜨리려는 건가. 과도한 빛과 소리는 문명의 가장 시끄럽고 야비한 측면이다. 그것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다. 자연은 인공적인 빛과 소리를 반기지 않는다. 우리는 태곳적부터 두려워한 어둠을 피해 빛의 천하를 만들었다. 인간은 무서운 것이 없다. 야생 동물을 쫓아냈고 귀신, 정령, 요정, 도깨비도 지웠다. 신비도 사라졌다. 신들마저 오그라들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허전하다. 빛이 어둠을 쫓아내고 자연음이 아닌 온갖 소리에 중독이 되었는데도 뱃속이 늘 비어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큰 띠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게 옳다. 흙으로 돌아가면 모두 하나가 될 게 분명하니까. 내 흙이나 네 흙이나 섞인다. 나는 ‘너’을 나로 대우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둠과 고요를 인정하는 일은 신비를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자연과 인간, 너와 나, 공생과 사랑은 불가능한 걸까.  

작가의 이전글 마트료시카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