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1853)는 허먼 멜빌(1819~1891)의 단편이다. 바틀비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처음 만난 40여 년 전부터 이 왜소한 남자는 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 멜빌은 세상의 황폐와 불모를 증거하기 위해 우리를 순교자에게 안내한다. 바틀비는 모비딕(1951)의 반영웅 에이하브의 뒷면이다. 에이하브가 적극적인 파괴자라면 그는 자신을 와해시켜 스스로 사라지는 소멸을 택한다. 바틀비는 종교, 철학, 주류 이데올로기에 도전한 프로메테우스. 비관과 허무감이 농후한 세계관, 반문명적 역사관을 드러내는 희대의 반항아이다.
소설의 화자는 바틀비를 고용한 변호사이다. 경쟁이 치열한 월가에서 자수성가했다고 자부하는 남성이다. 그는 근대의 합리성, 성취를 지향하는 사회에 익숙하게 적응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 19세기 중엽, 미국에서는 자본주의가 정착해 절정으로 향하는 중이다. 뉴욕 월스트리트에는 한 해가 다르게 높은 빌딩이 들어섰고 금융과 법률이 눈부신 조화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월가의 변호사는 늘 바쁘다. 그에게는 이미 두 명의 필경사가 있지만 광기와 조울증으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변호사는 바틀비라는 전직 우체국 직원을 새로 채용한다.
바틀비에게도 서류를 베끼고 오류를 찾아내는 일이 주어졌다. 필경사에게 고유의 해석이나 견해를 묻는 이는 없다. 대신 치밀함, 반복, 정확함이 이들의 덕목이다. 처음에는 바틀비도 제대로 일을 수행한다. 맡겨진 일을 문제없이 해낸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부터 달라진다. 이 단편의 부제는 ‘월가의 이야기’(A Story of Wall-Street)이다. 바틀비가 바라보는 창밖에는 고층 건물이 벽처럼 줄지어 서 있다. 이곳에서 일꾼들은 빠르면서도 빈틈없이 또 단순하게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인간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다른 필경사들이 우울감에 시달리면서도 그런대로 일을 해내는 것과 달리 바틀비는 조용한, 그러나 치명적인 반란을 시도한다.
그러나 사소한 반란은 제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로부터도 비웃음거리만 된다.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라는 그 유명한 문장을 거듭하며 지시나 명령, 권고 따위를 거절한다. 일을 하지 않는 데에 대한 설명이나 이유는 생략한다. 퇴근도, 사직도 하지 않는다. 견디다 못한 변호사는 바틀비를 내버려 둔 채 사무실을 이전한다. 사무실의 새 주인은 방과 함께 남겨진 불법침입자를 경찰에 넘기고 경찰은 바틀비를 유치장에 수감한다.
변호사는 교도소로 바틀비를 방문한다. 그는 음식도 거부한 채, 거의 아사 직전이다. 이 가련한 자는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자비도 동정도 원치 않는 이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변호사는 끝내 사망한 기묘한 남자의 흔적을 따라간다.
처음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을 때에는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한국도 절대 빈곤에 익숙했고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도 표출되기 시작한 때였다. 공정함과 평등에 대한 논의도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때는 바틀비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물로 생각했다. 얼마 전 다시 읽어보니 인물, 사건 모두 초현실/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먹고살 만해져서일까. 아니면 자족하고 체념하는 버릇이 생겨서일까. 바틀비에의 충격이 추상과 우의의 경지로 승화 혹은 경감되었다.
그러니까 세월이 흘러도 이 단편에 사로잡힌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 셈이다. 나도 변호사처럼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바틀비는 과거 수취인 불명 우편물 dead letter을 처리하는 일을 했다.
편지는 발신인들의 절실함을 담았다. 이해나 친절을 구하거나 극도의 두려움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무치게 그리운 상대는 사라져 찾을 길이 없다. 글쓴이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허공을 향해 SOS를 외친 거나 다름없다. 바틀비의 업무는 수신자 없는 편지들, 그 간절함을 불길 속으로 집어넣어 없애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어떤 한계를 직시하게 한다. 인간은 닿지 않을 곳을 향해 애원하는 존재라는 것. 무언가에 대한 갈구, 절실함 따위가 한낱 불쏘시개감에 불과하다는 것. 바틀비는 월가에서 다시 한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 일과 사람 사이의 소외 그리고 신을 향한 헛된 절규의 몸짓을 확인한다.
'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문장은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Ah, Bartleby! Ah, humanity!’라는 변호사의 참회로 끝난다. 인간이고 싶었으나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바틀비들에 대한 후회와 연민의 고백이다. 이니, 어쩌면 신을 향한 '소리없는 아우성', 그 허무에의 확인이다. 변호사는 특이한 인물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나중에야 발견하는데 나도 비슷한 경로를 밟은 것 같다.
허먼 멜빌의 생애는 보상 없는 가난과 좌절로 얼룩져 있다. 그가 기댔던 문학 세계마저 비통함을 안겨주었다. 독자들은 그의 실험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고 믿었던 문우들마저 등을 돌렸다. 애타게 손을 내밀었으나 응답은 없는 삶이었다. 이 단편은 자본주의 비판을 넘어 실존의 무게에 비틀거리는 인간 전반에 대한 멜빌의 음울한 보고서이다.
21세기라 한다. 요즘에는 인간에 대한 정의도 점차 변화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종의 고민 또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아직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라서 다행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괴이하고도 수상쩍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전시회 타이틀을 보면 분명 '휴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익숙한 이 휴먼이 아니고 낯선 저 휴먼을 지칭하는 일도 자주 접한다. 트랜스 휴먼, 포스트 휴먼이 어서 빨리 도래하기를 바라는 이도 많은가 보다.
사람만 이종과 뒤섞여 변종이 되는 게 아니고 동식물도 한 몸처럼 뒤섞인다. 로봇이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는 작품도 있다. 누구든 단순하고 고된 노동에는 대가가 필요하니까. 예전에는 백인 남자들이 점유했던 영역이 다인종, 여성, 소수자로 점차 확대하는 것까지는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투 머치 민주화되는 거 아닌가 싶다. 한 때 하등 생물이라고 분류되었던 미생물에게도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까지는 인정할 만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병뚜껑이나 전자제품에게 마저도 그렇다. 그런데 인간 아닌 섬씽도 인간이라고 봐야 하는 시대라니. 나중에는 '공각기동대'의 괴물 같은 캐릭터들도 우리 종처럼 취급하자고 할 테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끄적거리는 일이 참 낙후된 일로 보였다.21세기에 휴먼, 휴머니즘이라니. 그런데도 중얼거린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