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캐릭터대부분을주변에서 취했다. 젊은 프루스트는 번영을 구가하던 19세기말 20세기 초 프랑스 사교계의 총아였다. 좁게 말하자면 사교계란 구귀족이나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의 안주인들이 운영하던 살롱을 말한다. 그는 그곳에서 정계, 재계를 주름잡던 이들, 댄디즘이나 데카당스에 빠진 멋쟁이들 그리고 미래를 예고하는 각양각색의 모더니스트들이 만날 수 있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이 소설에는 무려 6,023,707명이 나온다고 한다. 이 인물들을 현실감 있게 뭉치고 흩어지게 하려면 웬만한 직관과 논리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나마 인물들의 비중이 대등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어서 어떤 이는 줄곧 등장하고 어떤 이는 슬쩍 사라지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꾸준하게 등장하는 이들이 몇몇 있는데 샤를뤼스라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특히 4권 ‘소돔과 고모라’(1913~1927)의 주요 인물이라 할 법하다. 샤를뤼스는 대귀족 가문 출신이다. 재산도 많거니와 학식, 예술품에의 안목 또한 일급이다. 누구든 그와 알고 싶어 하고 그를 통해 명사들과 사귀기를 꿈꾼다. 말하자면 사교계에서도 최고 명사인 셈이다.
프루스트가 ‘소돔과 고모라’를 쓴 이유는 샤를뤼스로 대변되는 당대 사교계 인물들의 풍속도를 그려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샤를뤼스는 동성애자다. 근엄하게 상층계급의 위엄을 뽐내도 모자랄 형편에 얼굴 반반한 젊은이들만 보면 노골족으로 침을 흘리는 중년 남자다. ‘회색 머리털에 검은 콧수염을 기른, 입술을 붉게 칠한 뚱뚱한 남자’. 그다지 호감 갈 만한 타입은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샤를뤼스가 한 남자를 유혹해 격렬한 동성애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비교적 정적인 이 소설에서 별안간 선명한 색채감, 심지어 폭력성까지 느껴져 놀란 기억이 있다.
프루스트의 주변 인물이 된다는 건 그리 반갑지 않을 것 같다. 그 많은 캐릭터 중 누군가에게는 투사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가는 몇몇을 제외하면 주변인들을 그리 사랑하지 않는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혐오감 같은 것이 있다. 샤를뤼스의모델은 로베르 몽테스큐(1855-1921)라는 사람이었다. 탐미주의자, 럭셔리 애호가’로 도데, 포레, 사라 베른하르트, 단눈치오, 공쿠르, 말라르메, 마네, 프루스트 등과 친교를 맺고 있었던 ‘데카당스의 왕자'다.
이 시대 문화 예술 장면에 관심을 기울이자 로베르 몽테스큐라는 이름이 반복 등장한다. 이 인물은 자신을 포장하려는 욕망이 과했던 건지 아니면 미에 대한 안목이 지나치게 섬세했었는지 남의 이목을 끌었음이 확실하다. 제스처나 행동은 모두 계산되어야 했다. 옷 액세서리는 말할 것도 없고 종이나 펜도 최상급이어야 했다. 선물을 보낼 때는 실크로 포장한 후, 자신을 상징하는 박쥐 문양을 더했다. 몽테스큐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가 그린 ‘Arrangement in Black and Gold(1891~1892)에 그 모습이 남아있다. 휘슬러답게 '검은색과 황금 색의 배열‘이라는 추상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몽테스큐의 초상화이다. 회화 작품 속의 몽테스큐는 30대이다. 아직은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샤를뤼스와 같은 '노와 추‘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Arrangement in Black and Gold: Comte Robert de Montesquiou-Fezensac(1891~1892)
아래는 나다르가 찍은 사진(1895)이다. 사진 속 몽테스큐는 날씬한 멋쟁이다.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진 모델이어야 하므로 온갖 노력을 다했을 테다. 헤어스타일, 수염, 모자, 지팡이, 옷차림 무엇하나 최고가 아닌 게 없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샤를뤼스처럼 남자를 좋아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성적 취향도 이 방면이기 때문에 샤를뤼스 혹은 몽테스큐를 그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넌지시 하는 중일 테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알베르틴이라는 여자와의 사랑과 이별을 그리고 있지만 알베르틴이 사실은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라는 남자임은 잘 알려져 있다.
몽테스큐를 또 마주친 곳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1848~1907)의 ’거꾸로‘(1884)이다. 이 소설은 아주 특이한 구조와 내용을 가지고 있다. 1장에서 15장까지는 데 제쌩트라는 주인공이 어떻게 은신처를 꾸미고 사는지 자세히 나타나 있다. 각 장은 가구, 그가 모은 책, 희귀 식물, 장식품, 모로나 르동이 그린 회화 컬렉션, 향수, 술 등이 묘사되어 있다. 참 이러기도 쉽지 않다. 주인공은 지인들과의 모든 관계도 끊은 채 최고급 예술품과 취향에 둘러싸여 사는 삶을 택했다. 말 없는 하인 부부 두 사람만이 눈에 띄지 않게 시중을 든다. 재미있게도 이 소설에는 '일러두기' 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일종의 프리퀄로 제쌍트가 히키코모리로 살게 된 배경을 알려주는 서론이다.
벨 에포크 시대, 사교와 환락에 겨운 한 탐미주의자가 자기만의 인공 유토피아를 만든다. 고도로 세련된 이 남자의 오감을 자극하고 만족시킬 수 있도록 선별된 음식, 예술품, 장신구만이 이 집안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 남들이 환호할 작품들은 당연히 배제된다. 자신의 세계는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야 한다.
눈을 끈 건 4장의 금박 거북이이다. 거북이 등딱지에 보석을 입힌 럭셔리 제품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진짜 거북이도 아니고 진짜 등딱지도 아니다. 거북이를 흉내 냈을 뿐이니 애처로울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의 금박 거북이는 진짜 거북이이고 등을 장식한 건 번쩍거리는 진품 보석들이다. 거북이는 '적색과 마호가니색을 지닌 콩포스텔의 풍신자석, 녹색과 청록색인 남옥, 주홍색과 선포도주색인 홍옥, 창백한 쥐색인 쉬데르마니산 루비’를 등에 졌다. ‘제쌩트는 완벽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의 눈은 황금빛 바탕 위로 불타오르는 이 화관들의 찬란함에 도취되었다.’ 물론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는 없었다. 그의 거북이는 곧 죽어버렸다. ‘사람들이 강요한 황홀한 사치, 사람들이 입혀준 번뜩이는 덮개, 자신의 등을 마치 성체함처럼 뒤덮고 있는 보석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실제로 몽테스큐의 집을 방문한 말라르메는 그 집안의 인테리어와 금칠 거북이를 보고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위스망스는 하급 공무원이었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 취향을 지녔다 한들 ‘거꾸로’의 유사 낙원 같은 집을 꾸밀 재력은 없었다. 위스망스는 몽테스큐의 가구, 수집품,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쓴 글들을 읽었다. 만일 돈이 많다면, 일할 필요도 없다면 그처럼 살아 보리라 꿈꾸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 후줄근한 것은 혐오스럽다. 장인들이 최고 감식안을 가진 이들을 위해 만든 것만을 선택할 것이다. 위스망스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상사나 민원인이 없는 곳, 방해꾼 없는 곳에 혼자.
마지막 16장에서제쌩트는 어쩔 수 없이 세상 속으로 가야 한다. '자, 무너져라, 사회여! 제발 죽어라, 낡은 세계여.' 그러나 이렇게 끔찍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이 세기의 파렴치하고도 굴종적인 패거리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니!'
위스망스처럼 심리적 극단을 경험해 본 사람은 그 반대로도 치솟는 경향이 있다. 젊은 시절 데캉당스 기질을 지녔던 위스망스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악마주의에 빠져든다. 그러나 결국에는 신비주의자, 신실한 종교인으로 정착한다.
몽테스큐를 또 한 차례 만난 작품은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890)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 혐의로 2년을 복역했고 출감하자마자 바로 출국해 파리에서 사망했다.
도리언 그레이는 헨리라는 인물로부터 쾌락주의 철학을 배운다. 미와 감각적 만족, 젊음만이 지향할 가치다. 도덕 법칙, 책임감, 성적 자제심은 아무 쓸모 없는 멍에아닌가. 도리언은 자신의 초상화에 대고 자신의 영혼을 팔 것임을 선언한다. 이제부터 실제 도리언 대신 그림 속 도리언이 그의 죄만큼 늙고 추해진다. 깊숙하게 감춘 초상화는 악덕에 물든 이 남자의 끔찍한 내면을 드러낸다. 오스카 와일드는 세기말적 증후군을 드러내는모델로 몽테스큐를 택했다고 한다. 소설 속 도리언 그레이는 위스망스의 ‘거꾸로’를 읽으면서 깊은 타락으로 접어간다.작가는 처음부터 '거꾸로'의 주인공과 도리어언 그레이가 연결된 인물임을 암시한다.
로베르 몽테스큐는 19세기말 작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 사람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미와 쾌락의 대명사로 불렸다. 프루스트는 성적 취향을, 위스망스는 댄디즘을, 오스카 와일드는 허무주의 철학을 그로부터 취했다. 어쩌면 작가들은 윤리적 책임감을 스스로 일깨우기 위한 장치로 한 인물을 변조했을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경계를 넘어서려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그렇게 강한 존재는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