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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Apr 16. 2024

아무도 당신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 하마구치 류스케의 장편 영화를 몇 편 보았다. 감독은 깊숙하게 가슴을 울리는 벅찬 주제들을 형상화하는 데 익숙하다. 이번에 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 역시 다른 영화들 못지않게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마음의 강에 던져진 돌은 파문을 일으키며 지워지지 않는다. 제목은 악이 존재한다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 순수한 것을 지키고 싶어 한다. 물론 이건 남들의 의무이다. 내 책임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우리는 악을 위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먹고살다 보니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고 큰 악에도 가끔 눈을 감을 뿐. 이런 골치 아픈 일은 내 영역 밖의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고 간주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품었다. 대체 어디까지 내 책임 범위일까.


미즈비키는 첩첩 산골이다. 패전 후 무상 분배된 곳으로 원주민이라야 고작 3세대를 거쳤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에 지친 사람들, 깨끗한 물과 공기가 그리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정착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겨울이다. 숲이 깊어서 외부인이라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 사이로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눈과 얼음을 헤치며 숲 가장자리를 흐르는 시냇물은 깊이를 알 길 없는 호수에 이른다. 가끔 먼 산 어딘가에서 총소리가 들려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뼈만 남기고 죽은 오래된 들짐승들의 사체가 눈에 띈다. 구역에 따라서는 사슴이나 꿩과 같은 야생동물 사냥이 허가되기 때문이다. 이곳의 자연은 신성하고 경외할 만한 곳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위험에 대한 경고는 순식간에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도쿄의 한 회사가 지자체로부터 숲 일부를 싼값에 불하받았다. 땅을 친환경 용도로 사용하는 조건이기에 보조금도 수월치 않게 받았다. 컨설턴트는 글램핑 사업에 대한 반발을 막을 겸 눈가림 용 주민 설명회를 권고한다. 전문 지식이라고는 없는 남녀 사원 두 명이 설명회를 마련한다. 이 사업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정수 시설 위치, 둘째, 야간 보안 직원 결여. 둘  모두 사업 비용이 부족해 손을 댈 수 없는 사안들이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회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지 않다.  대충 넘어가지도 않는다. 마을을 청정하게 보존하려는 의식도 있고 하류 지역에의 책임감도 있다.    


회사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속셈으로 설계안은 그대로 유지하되 리더 격인 타쿠미를 보안 직원으로 채용하려 한다.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을 무마시키는 데에 이 남자만큼 적절한 대안이 없다. 변변한 직업도 없으니 직원으로 채용된다면 대만족 하리라. 물론 타쿠미는 거절한다. 그는 돈보다는 자신의 소소한 삶에 관심이 다. 글램핑 사업은 쉽지 않다. 영화는 선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다. 설명회에 파견된 두 직원마저 이 지역 사람들과 자연에 감화되었다. 남자는 이곳에 정착하려 하고 여자는 회사를 떠나려고 한다. 미즈비키라는 파라다이스는 계속될 것만 같다.        


그러나 악은 그렇게 단순하게 물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깊은 생채기를 남기고야 만다. 두 남녀 직원은 파견 직원일 뿐이지 사장이 아니다. 두 사람이 그만 두어도 다른 직원이 돌아온다. 침입자들은 계속 문을 두드릴 것이다. 직원, 고용주, 다른 회사 혹은 정부, 제도 등. 마을이 청정 지역을 유지하려면 큰 희생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파문이 일어난다. 타쿠미의 어린 딸 하나가 실종되고 만다. 소녀는 숲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다. 경찰과 동네 사람들이 밤새 아이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새벽녘에야 타쿠미는 숲 속 벌판에서 하나를 찾는다. 그 아이는 아마 사냥총에 맞은 것 같다. 사슴을 향해야 했을 총구가 소녀를 향했을까. 사슴이 놀라 바라본다. 놀란 눈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탓하지도 않는다. 단지 큰 눈을 들어 문명을 바라본다. 하나가 사슴이고 사슴이 하나다. 아이는 마치 찰스 디킨스의 '오래된 골동품 상점'에 나오는 순결한 희생양 처럼 보였다. 제단 위에 바쳐진 깨끗한 제물은 세상의 죄악을 대속한다.


오늘 순수의 세계 한 점이 사라졌다. 침범자들은 그 흰 점을 복구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타쿠미를 포함해 미즈비키를 지키려는 사람들조차 자연에의 침입자들이다. 숲은 ‘당신들을 초대하지 않았다’라고 소리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신비를 벗기고 또 해체한다. 자연을 인공화하는데 온 힘을 다 하는 한국도 생각할 점이 많은 주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영화에서 대단한 알레고리의 세계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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