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절한 크기
출구없는 방, 인간불평등 기원론
인터넷 댓글을 보면 겁날 때가 있다. 평범한 의견에도 꼬투리를 잡아 비난하는 글들이 줄을 잇는다. 내 생각과 다르면 차이를 혐오하는 발언도 예사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는 게 두렵다.
샤르트르는 '출구 없는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거울 없는 방에서 나는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내가 타인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는 현실, 진정한 나는 없다는 자괴감에서 출발한 말이다. '나'라는 존재 의미를 부정한 상태다. 내가 나이고 싶은데 그 많은 타인들에 의해 가치를 부여받아야 하고 평가받아야 하는 데 대한 모욕감, 불안, 절망을 뜻한다.
내가 나일 수는 없는 걸까. 타인이 규정하는 나 말고 저절로 의미가 부여된 나라는 존재는 없는 걸까. 인간은 타인과 소통하려는 존재이니 혼자서는 살 수 없겠지. 여럿이 모여야만 연약한 존재를 이어나갈 수 있는데 그러자면 남에게 쓸모가 있으면 좋겠지. 유용한 존재는 공동체 내에서 안전하다. 대우도 받고 자존감도 높아진다. 미국영화를 자주 봐왔음에도 그들의 소통방식에 동의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뭐든지 혼자 해결하려는 등장인물이 많다. 가족 포함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아주 낯설고 서툰 사람들이 답답하다. 꼭 이렇게 해야 내가 나라는 건지 의문이다.
산업 사회 이전 사람들은 대개 신분제나 계급의 구성 요소였고 신분은 세습제였으므로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개인이라기보다는 덩어리 중 한 부분 아니었을까. 그들은 대개 주어진 대로 살았다. 이것도 참 마음에 안 든다. 이래서야 개인은 존재 불가능하다. 요즘 사람들을 순간 이동시켜 이런 곳으로 데려간다면 숨이나 쉴 수 있을까. 왕년의 권력자들은 종교, 제도를 자기들 입맛에 맞춰 조절할 수 있었다. 산업이 보잘것없었기에 가능했다.
문제는 산업 사회 이후다. 도시로 무작정 나와서 살게 된 전직 1차 산업 종사자들은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하기도 했지만 사회에서 자기의 역할을 발 빠르게 취득하는 일도 필요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기 쉽다. 같은 직군에서는 생산량이 높은 자가 성과 낮은 자를 압도하며 얻은 이익이 커지면서 소독 차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점차 다른 직군에서도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게 된다. 제로섬 게임에 종사하고 있다고 여긴다. 다른 사람이 큰 파이 조각을 얻어가면 내 파이 조각은 줄어든다고 여긴다. 한 때는 다른 사람이 큰 조각을 가져간다고 해도 걱정을 하지 않는 시기도 있었다. 새로운 대륙이 발견되거나 새로운 블루오션이 개척될 때 그랬다. 파이 조각이 스스로 커져 내가 돌아오는 것이 풍부하므로 남들이 가져가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경쟁심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다.
미국에서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용어가 나올 수 있었던 건 경쟁이 타인에게 위화감을 줄 정도로 치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넓은 땅, 자원이 널려 있는데 서로 도와야지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거니까. '파 프롬 히어'의 톰 크루즈는 남들보다 빨리 달려 말뚝을 박고 내 땅임을 선포한다. 서부는 드넓고 사람은 없었다. 옆집에 가려면 말을 타고 달려야 한다. 여기저기 다 빈터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인간의 본성은 약탈기질과 우월감, 과시 충동의 측면이 크다고 비판했다. 문화는 지배 계급의 명성과 그들의 품위를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이렇다 보니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의 경쟁 심리는 누구 못지않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가장 먼저 달려들 태세로 공격한다. 그들의 큰 키와 강한 두 발은 힘없는 작은 사람들을 가차 없이 밀어낸다. 내가 먼저 올랐다면 사다리도 차버린다. 나를 위협할 법한 이들은 잘 돕지 않는다.
큰 나라도 가득 찼다. 블루 오션은 붉게 변했다. 작고 연약한 물고기들은 내몰려 떼죽음을 당하기 일쑤다. 빈부격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 독식을 실컷 즐겨온 승자들은 더 강해지기 위해 갖은 기술과 권력, 돈을 이용한다. 중산층은 점점 줄어들고 소수의 부유층이 국가 GDP의 큰 부분을 소유한다.
한국은 국토에 비해 인구가 많다. 수도권까지 합하면 인구의 2/5이 좁은 곳에 모여 산다. 외국에서 레드오션 논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한국은 이런 훈련을 충분히 받아왔다. 한국은 불균형하게 발전해 왔다. 자원, 산업, 문화 대부분이 중심부에 이루어지고 정책도 편향적으로 결정된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은 청정부지로 치솟고 있으나 임금 근로자의 대부분은 임금이나 자산규모가 이를 따라잡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새로 진입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정의가 없다고 여긴다. 부유함이 존경받지 못하며 그것을 이루어 낸 이들을 우연과 암투, 불합리한 시장과 부패한 행위가 합작한 결과라고 여긴다. 잘 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인정을 받아야 건강한 사회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미 전통적 부도 없고 합리적 부도 사라졌다. 근거가 없는 것이다. 틀은 자본주의적인데 돈을 버는 건 부정부패와 부조리의 결과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사회가 건강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이렇다 보니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경멸하고 미워한다. 실생활에서는 표현하지 못하다가 기회만 생기면 쉽게 표출한다. 이제는 대면하지 않고서도 의견을 표현하는 창구가 다양하다. 그런 점이 문제를 크게 일으키곤 한다. 안 보이는 남들을 향해 자신의 익명성을 폭력적으로 발휘한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들은 적은 있지만 알다시피 불평등하다. 아래 글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 주었을 것인가.
맹자는 '우리나라'의 이익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양혜왕에게 충고했다. 왕이 이익을 말한다면 그 아래 정승, 양민들도 다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취하려 할 거라고. 맹자의 말이 맞다. 모두 자기의 이익을 말한다. 한치라도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처럼 '서로가 서로의 적'으로 가는 건가. 한 때 고생하던 시절, 먹고살기 위해 협력하던 마음은 허물어져가는 걸까.
타자가 무섭고 혐오스러워서 자기 공간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 보면 무섭긴 하다. 수많은 눈과 귀와 입이 있는 세상이니. 거기서 버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익명의 눈과 손이 서로를 결정하고 판단한다. 큰 입들이 난무한다. 침묵이 드물어진다. 좁고 빠르고 선명하다. 넓고 느리고 미지근한 곳이 사라진다. 너무 감정적인 거 아닌가. 개인의 크기는 질과 양 모두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늘 의문이다. 타인이 지옥이길 원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