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하지 않았다

포, 불평등기원론

by 이서림

존 쿳시의 ‘포’(1986)는 기존 이야기에 가상 리얼리티를 덧붙인 소설이다. 여기서 포는 ‘로빈슨 크루소’(1719)를 쓴 작가 대니얼 디포를 말한다. 작가는 소설 ‘포’를 통해 권력의 기원 그리고 말과 글로 이루어진 문명의 위계를 되짚어 보도록 권유한다.


외딴섬에 백인 로빈슨 크루소와 흑인 프라이데이가 산다. 우리가 아는 대로 크루소는 고독하지만 자유롭고 프라이데이는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다. 크루소는 의문을 제기받지 않는 인물, 섬의 완벽한 주인이다. 크루소는 오랜 노동으로 거대한 밭을 일군다. 심을 것이 없음에도 땅을 고르고 정리한다. 숲은 농지가 되어야 하고 농지에서는 곡식이 자라나야 한다. 인간의 의지대로 해석되고 순화된 자연, 그것이 크루소의 문명관이다.

프라이데이에게는 혀가 없다. 크루소가 잘랐을지도 모르겠다. 크루소는 프라이데이에게 묻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크루소는 명령하고 프라이데이는 순종할 뿐. 프라이데이는 ‘말을 할 수 없기에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에 대해 방어할 힘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다. 남들이 미개하다면 미개인이 되고 식인종이라고 부르면 식인종이 된다. 그는 사람과 관계 맺기를 원치 않는다. 타인과는 주인-노예, 지배-굴종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도취 상태에서 혼자 춤추고 노래하길 택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누구든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혼자 있는 외톨이는 정신적 도움이 필요하다고 들어왔다. 그러나 인간관계에는 권력이 동반한다는 괴로운 진실도 여전하다. 힘은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더욱이 공동체의 필요에 의한 효용성에 기댄다면 평등이란 더욱 요원한 일이다. 인간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추적한 선각자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떠오른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3)에 의하면 불평등은 제1단계 ‘법과 소유권의 설정’, 2단계 ‘행정 권력의 제도화’, 3단계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진행한다. 책을 읽으면서 인간 문명이 타락한 지점과 그 원인을 알아본다.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는 자연 상태의 삶 vie naturelle이, 2부는 문명의 삶 vie civile이 묘사된다. 여기서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미개인은 선악을 초월한 천진난만한 존재이다. 이들에게는 지배도 굴종도 없다. 루소는 동물과 문명의 어느 사이. 본능과 지각에 따라 홀로 자기 몸을 보존하던 시기에 주목했다. ‘원시 상태의 무위와 우리 이기심의 극성스러운 활동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인간 기능 발달 시기’다. 그는 이때를 인류사의 가장 행복하고 안정된 시기로 꼽는다. 이 시기를 벗어난 것은 공동의 유용성을 위해서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불행한 우연 때문이다. 루소는 이 ‘우연’ 이후 인류는 개선이 아닌 종의 쇠퇴를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그 우연이란 게 뭘까? 바로 타인과의 협력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협력이 필요 없는 기술에 전념하면서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았으며 상호 독립적인 상태에서 교류의 평온함을 누렸다.’ 그러나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서 이성이나 사회적 미덕은 물론 사악함도 출현한다. 선악 개념이나 자기 보존에의 불안이 생기면서 타인과의 협업도 가속화된다. 여기에 가족이 형성되고 구별이 생겨나면 일종의 소유 개념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잉여 물자에 대한 탐욕, 인정 욕구를 통해 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심지어 죽은 후에도 그 존경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2부 첫 부분이다.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의 경계로 파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동류의 인간들을 향해 "저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과일은 모두의 소유이고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얼마나 많은 비참과 공포에서 인류를 구제해 주었을 것인가.

그러나 외친 사람이 별로 없었거나 소리 없이 묻힌 건 아닐까. 이후로 소유와 노동은 숲을 농지로 바꾸었고 수확물은 강자와 약자의 힘에 맞춰 분배된다. 금속과 농업 생산물이 세상을 빠르게 바꾸었다. 토지 경작은 분배를 낳고 소유와 정의에 대한 규칙도 만들어진다. ‘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허망하기 그지없는 밭 가꾸기에 집착한 것도 일리가 있다. 그는 근대인, 문명인이다. 토지 점유가 반복되면 내 것이 되기 쉽다는 걸 안다.


내가 지은 농산물, 홀로 씨름해서 잡은 물고기로 배를 채우고 자연에서 얻은 가죽이나 풀로 몸을 두른다면 남에게 의지할 일도 없다. 웬만한 일은 혼자 해낸다. 물론 먼 옛날에나 있었던 일이다. 지금은 산속에서 산다는 사람들도 온전히 자신을 부양하지 못한다. 가끔은 고기나 생선을 먹어야 하고 옷, 의약품, 플라스틱 제품도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하다.


사람은 타인과 소통하려는 존재고 여럿이 모여야 삶을 유지한다. 어떤 식이든 유용한 존재는 공동체 내에서 대우를 받는다. 불평등을 향한 첫걸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로써 한쪽에서는 허영심과 경멸이, 다른 한쪽에서는 수치와 부러움이 나타난다. 만일 재능이 동등하다면 평등한 삶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하지만 알다시피 불평등하다. 이제는 자연적 불평등으로만 끝나는 것도 아니다. 기술, 재산, 부와 같은 환경 차이가 지속되면서 구별을 더 뚜렷하게 한다.


인간은 우위에 서려는 열망이 있다. 소유의식은 질투심, 경쟁, 대항을 불러일으켜 불평등으로 귀결된다. 재산을 잃은 사람은 지배를 받거나 복종해야 한다. 아니면 폭력과 약탈을 택하기도 한다. 반면 강자로서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다른 쾌락을 무시하게 된다. 그래서 부자들은 기존의 노예로 새 노예를 얻고 이웃을 정복해 예속시키려 한다. 소유의 권리가 힘의 권리로 전환한다. 여기에 부유한 자의 횡령, 가난한 자의 약탈 그리고 모든 이들의 정념이 더해진다. 자연적인 연민이나 정의의 목소리가 작아진 인간은 인색하고 악하게 변한다. 황폐해졌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일단 얻은 것은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소에 의하면 부자들은 교묘한 계획을 발명했다. 소위 '사회 계약'의 출현이다. 이러한 제도는 약자에게는 구속을, 부자에게는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파괴한다. '자연적 불평등'이 '제도의 불평등'으로 인해 한층 커진다. 소유와 불평등을 법률로 고정해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킨다. 루소의 말대로 국가, 정치, 법률 등이 부자들의 소유를 보장해 주기 위해 제조된 거라면 그들은 뜻을 이루었다. 자연적 동정심이나 박애 정신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대규모 집단 사이의 갈등은 전투, 살육, 복수를 빈번하게 일으켰고 피를 흘리는 명예를 미덕으로 간주하는 일도 생겨났다.


이 책은 불평등이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 인간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 강화되었으며 법률의 제정에 따라 합법화되었다는 점을 목표로 글을 전개한다. 국가는 원래 국민의 의사에 의해 존립한다. 그러나 국가가 민중의 뜻에 부합하지 않은 법과 제도를 수호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계약론'(1762)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루소는 기존 질서나 국가는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독자에게도 상당히 과격한 발언이다. 신분제와 사유 재산제도가 공고하던 18세기 전제 군주정 시대에 이런 사상이 출발했다는 점이 놀랍다. 그러나 ‘불평등은 자연법칙의 위반’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여전히 심금을 울린다.


작가의 이전글그것은 잘못된 권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