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인간은 누구 하나 제대로 알 수 없다지만 그 ‘누구 하나’도 소설의 주인공이 되면 그의 말, 행동 그리고 사유조차 쉽게 따라갈 수 있다. 그가 오래전 살았던 사람이든, 미래 인간이든 관계없이. 역사나 기록으로 남은 인물들이란 얼마나 건조한가. 그들도 희로애락을 알았을까. 언젠가부터 인간을 통계 숫자로 들여다보는 일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제주도에서 4•3 사태(1947~1948)로 희생된 이가 14,822명이라고 한다. 공식 문서에 남은 기록이므로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때 제주도 인구가 28만 명, 짧은 기간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다. 더 기막힌 일은 희생자의 80% 이상이 정부 군경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점이다. 진압대가 87개의 마을을 소개하면서 유아, 노인을 포함한 부락민이 마을 단위로 떼죽임을 당하거나 유랑민, 이재민으로 내몰렸다. 우리 현대사에는 집단 공포와 혐오가 만든 끔찍한 일들이 너무 많다. 희생자 하나하나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크지도 않은 나라지만 이 비극이 비교적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제주 4•3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현기영의 ‘순이 삼촌’(1978) 덕분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제주 북촌리에 살던 순이의 한 맺힌 삶에 다가갈 수 있었으니.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2021)도 4•3을 다룬 작품이다. 제목이 훅 와닿았다. ‘작별하지 않겠다’, '작별하지 않으리'도 아니고 ‘작별하지 않는다’라니. 기본형, 현재형 시제에서 느껴지는 영원성, 시적 결의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은 ‘순이 삼촌’처럼 사건을 직접 겪었던 이의 PTSD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4•3 사태가 아직 마감되지 않았다는 것, 처참했던 그날, 애절한 사연을 잊지 않을 것임을 굳게 다짐한다. '가장 큰 패배는 결국 망각'이니까.
내레이터 경하는 제주도 주민이 아니다. 이전에는 4•3 사태와 관련 있는 인물을 만난 적도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역사 기록물로만 접했을 것이다. 그녀는 책 편집 작업을 하면서 제주 출신 촬영기사 인선을 알게 된다. 인선의 부모는 4•3 사태로 가족을 잃었다. 인선 부모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의 고통이 경하에게도 깊이 스며든다. 이 소설은 현장성 있는 고발이 아니라 애도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애도 문학은 살아있는 우리가 죽은 당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다. 그 노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담는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국가가 금한 오빠들의 장례를 위해 기꺼이 반역자가 된다. 애도는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윤리적 요청'이며 파괴력을 지닌 '정치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 어떤 위정자에게는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제주 4•3 사태는 1999년 말에야 수면 위로 부상해 진상 규명이나 명예회복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영혼을 위로하는 레퀴엠에 가깝다. 소설의 주제와 연결되므로 애도를 위한 몇몇 장치들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시간순으로 알아본다.
첫째, 경하는 꿈속에서 수천 개의 검은 통나무와 마주친다. 이들은 마치 바닷물에 잠긴 묘석들처럼 보인다. 크고 작은 검은 무리는 애도받지 못하는 사자들에의 메타포이다.
둘째, 제주의 거침없는 눈은 상처를 치유하는 초월적인 힘이다. 경하는 제주 인선의 집을 향하면서 화이트 아웃을 경험한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환상의 세계로 접어든다. 눈은 ‘온다, 떨어진다, 날린다, 흩뿌린다, 내린다, 퍼붓는다, 몰아친다, 쌓인다, 덮는다, 모두 지운다’와 같이 점층적으로 강화되며 세상을 정화한다. 세상의 환멸과 어둠을 초기화하려면 거대한 순백의 힘이 필요하리라.
셋째, 경하는 눈을 뚫고 겨우 도착한 인선의 어두운 제주집에서 검은 팔을 흔드는 종려나무에 서늘한 충격을 받는다. 이 나무는 그녀가 꿈에서 보았던 검은 통나무들 중 하나로 연결된다. 무리는 하나로부터 출발한다. 반대로 인선의 모친 강점심에 대한 애도는 4•3 희생자 전체를 아우를 것이다.
넷째,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일 아미와 아마라는 두 마리 앵무새 이야기이다. 경하가 눈이 퍼붓는 제주도 산간마을을 가야 하는 이유는 인선이 키우던 작은 새를 보살피기 위함이다. 연약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시간과 돈, 위험을 무릅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마는 경하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지만 삐이이 우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로 부활해 흰 벽 위를 활공한다. 소설의 진혼적 분위기는 이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다섯째, 서울 병원에서 누워있어야 할 인선이 손끝 하나 다친 데 없이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인선이 죽은 걸까? 그녀의 영혼이 돌아온 걸까? 아니면 눈구덩이에 빠진 경하가 죽기 전 환각 상태에 빠진 걸까? 인선은 경하에게 부모가 겪은 비극과 그 후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살았지만 끝내 정신이상을 겪다 사망했다는 것, 어머니는 악몽을 꾸지 않으려고 실톱을 깔고 잤다는 것, 젊고 용감했던 어머니가 처형된 외삼촌의 흔적을 찾아 수십 년을 헤맸지만 실패했다는 것.
여섯째, 인선은 경하를 검은 통나무들을 심을 자리로 안내한다. 경하가 꿈속에서 본 어두운 넋들이 쉴 곳이다. 인선은 촬영감독이다. 한때 경하가 학살 관련 영화를 만들자고 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적이 있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을 아는 사람은 그 영화가 너무 얕고 가벼워질 수 있음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눈밭에 앉은 그녀들은 촛불을 담은 종이컵을 맞잡는다. 둘의 만남은 가사 상태의 헛된 꿈일지도 모른다. 경하는 인선의 손을 붙잡으려 한다. 만일 그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인선은 서울 병원에서 눈을 뜰 것이다.
국가가 폭력의 진원지가 되었을 때 가녀린 사람들의 고통은 누가 치유해 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은 크고 작은 고통의 대명사 격인 나라다. 20세기 전반부 세계를 양분했던 이데올로기 논쟁은 우리를 비켜 가지 않았다. 해방 후 건립된 남쪽의 친미 자본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발흥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4•3 사태는 위정자들의 기괴한 과민반응, 극우적 망상의 결과다. 북쪽은 어땠을까? 그곳에서도 거의 같은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자유, 자본주의, 종교를 두려워한 그곳의 정권 역시 끔찍한 숙청으로 손을 더럽혔을 것이다.
나는 통계보다는 문학을 믿는다. 이 소설을 교감에 관한 글이라고도 보는 이유다. 소설에는 진실을 향해 눈 떠 가는 두 여자의 우정이 아름답게 묘사된다. 그들은 타인의 불행에 진심으로 아파하고 그 고통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공감대를 쌓는다. 경하와 인선은 아마 좋은 영화를 만들 것이다. 문학만이 사람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보듬는다. 광대한 시간을 살았던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진실에 가깝다. 역사보다는 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혜안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