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위그 '리미널'

질 들뢰즈, 프란시스 베이컨

by 이서림

리움의 전시 ‘리미널’을 보았다. 리움의 '리미널' 전시를 앞두고 피에르 위그는 '내 작업은 인간 존재론에 대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고 그 원형에 대한 탐구다. 나는 전시가 이것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전시는 상당히 감각적이고 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를 의미하듯 빛, 소리, 물과 촉각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제국' 같은 분수와 빛으로 이루어진 설치작품으로 시작한다.



현대 미술은 회화, 미디어, 설치, 퍼포먼스가 주류다. 이번 전시장에는 회화를 제외한 세 가지 영역이 모두 보인다. 그중에서도 미디어 작품이 압도적이다. 실재하지 않는 인물인 안리(UUmwelt – Annlee)의 뇌 활동을 기록하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화면 이미지로 보여 준다는 게 이 동영상 전시의 모티브.


어두운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전체 전시 제목이기도 한 ‘리미널’이라는 영상물이 보인다. 보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스토리도 일관성도 없는 것 같은데 한도 없이 길게 촬영했다 싶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았다. 센서가 포착한 환경 조건과 인공 신경 조직 등을 바탕으로 작품 스스로 데이터를 학습하고 쌓아가며 송출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이미 예술가-관객이 상호 작용해서 만들어 가는 예술품의 목록을 알고 있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죽은 애인을 뜻하는 ‘사탕 79kg’을 기억한다. 관람객들이 사탕을 자유롭게 가져가도 즉시 채워져 그의 연인은 끝없이 부활하는 거다. 필립 파레노가 리움 지붕에 설치했던 에너지 흡수장치도 생각난다. 유사 발전기가 주변 환경의 ‘기’를 빨아들여 아래층 작품들을 움직이게 했었다. 관람객은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작품의 작은 부분에 기여하는 셈이다. 이제 테크놀로지를 활용할 줄 알게 된 영민한 작가들이 새로운 개념의 공감 예술을 현실화하고 있다. 애니미즘, 기, 에너지 그래서 결국 현상학으로 이어지나 보다.


‘리미널 liminal’은 '문턱'을 뜻하는 라틴어 '리멘(Limen)'에서 유래하는데 '경계 공간', '중간적인 전환 상태'이다. 인류는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안전한 문턱에서 막 벗어나려고 한다. 예술 세계는 고전미-우아미-숭고미-비장미-골계미-풍자미 등을 실험해 왔다. 심지어, 추醜까지도.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독창적인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버릇이 있다. 그 세계는 더 이상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구세계를 붕괴시키고, 신문명을 예고하는 것 아닐까. 관 속에 누운 뒤샹의 승리이다.


현대 미술을 말할 때 언캐니 uncanny, 데페이즈망 dépaysement라는 용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렇듯 작품들은 낯설고 불쾌하고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무시무시하다기보다는 은근하게 소름이 돋는 장면들이다. 막스 에른스트, 론 뮤익, 아니쉬 카푸어,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을 생각나게 한다.


첫 영상물 ‘리미널’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시간과 공간이 지워진 바닷가 비슷한 곳에 한 여자가 있다. 광량을 줄여 어둡게 촬영됐다. 언캐니 하다. 저렇게 무서운 곳에서 저 여자는 어쩌자고 저렇게 배회를 하고 있을까. 그녀의 동작에 의미 있는 행위는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원시 종족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 인간으로 여겨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구석기 인류는 벌거벗은 눈 naked eyes를 지녔다. 전달된 정보라고는 없는 존재들이 광활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감각하고 지각하느라 얼마나 바빴을까. 그런데 이 여자는 오히려 감각을 거부한다. 저 사람의 검게 지워진 얼굴은 어떤 의미일까요?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2014 번역)를 번역자의 강의로 들은 적이 있다. 전부 출석하지는 않았다. 책이 너무 어렵기도 했지만 들뢰즈가 말하는 ‘-되기’, ‘탈영토화’ 개념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20세기 질 들뢰즈(1925~1995)와 같은 철학자들은 '덕의 폭정 The tyranny of merit'에 본능적으로 저항했던 것 같다. 이 정신이 인류에 가져온 것은 전쟁, 엘리트주의,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이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강자의 논리이다. 들뢰즈는 ‘감각이 먼저, 지성은 나중’이라는 모토에 딱 어울리는 철학을 전개했다. 데카르트적 코기토에서 벗어나 신체의 코기토로 깊숙이 나아간다. 그는 과거의 철학에서 지배적이었던 ‘관조’, ‘관념’에서 벗어나 ‘살’, ‘욕망’, ‘촉각’과 같은 행동 체험을 강조한다. 그때 그의 눈을 끌었던 화가가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이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미래'를 묘사하는데 이 화가만 한 분도 드물다. 이 두 사람은 삶은 고통이라는 공식에 동의한 것 같다. 들뢰즈는 베이컨처럼 ‘추출 혹은 고립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으로서의 회화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베이컨은 재현할 모델도, 재현할 스토리도 없는 단절, 격리를 회화로 표현했다. 형상들이 ‘서로 서사적 연관을 맺지 않은 채, 고독해야 할 것’, 들뢰즈가 말하는 재현적 인식 모델의 파괴에 걸맞은 작품들이었다. 그럼 베이컨이 그린 건 뭘까. 바로 ‘감각’이라고 본 거다. 감각으로만 순수 형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베이컨이 충격적인 형태와 색채 효과로 우리를 감각의 체험 속으로 몰아넣는 건 맞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시각적(이성적, 지성적)이라기보다는 촉각적이다. 말하자면 감각을 느끼는 체험을 매개하는 거다.


이런 모습으로 접근하는 베이컨의 회화는 몹시도 폭력적이다. 재현된 폭력이 아닌 ‘감각의 폭력’이다. 현실의 잔인함을 스토리텔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회화를 통해 비로소 존재하는 폭력의 현시이다. 베이컨은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라고 말했다. 들뢰즈는 ‘동물-되기’, ‘아이-되기’ 등에 대해 자주 말하곤 했는데 그 ‘되기’는 퇴행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한정시키지 않고 창조적으로 넓히는 방식을 의미한다.


‘리미널’의 여자는 아예 얼굴을 지웠다. 알다시피 얼굴에는 오감이 모여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감각하는 얼굴,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얼굴이 특권이자 압제를 가져온다고 봤다. 그렇다면 형상에서 얼굴을 지우는 것이 낫다고 보는 거다. 들뢰즈의 탈영토화가 여기서 나온다. 얼굴을 해체하는 건 영토나 주체를 해체하는 거다. 그는 이런 문명이 파괴되고 망가져야 인류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탈주체성, 탈영토화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완전히 다른 비인간성은 새롭고 낯선 생성과 다성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바탕이다. 얼굴이 지워진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세계는 공산주의자들도 생각해보지 못한 지독한 유물론적 세계, 혹은 기계들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혼종 유기체(식물+인간, 동물+인간)나 기계+인간의 괴상망측한 SF적 세계일 수도 있겠다.


‘가면 마스크’라는 영상물도 있었다.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에서 촬영된 것 같다. 벽에는 얼핏 창문 밖 풍경으로 보이는 녹색 숲이 가득 그려진 커튼이 걸려 있다. 주인공일 법한 괴물을 보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가 생각난다. 가오(かお)'는 얼굴, '나시(なし)'는 없음을 뜻한다. 영어로는 No-Face. 이 동물이 사는 세계는 어차피 얼굴-주체가 없으니 서로 구분할 필요도 없는 평면 세계이다.








그런데 사람 가면과 원숭이류 동물의 몸이 합체된 신종 동물이 사람 같은 행동을 한다. 신체는 다르게 변했어도 기관들은 악착스럽게 과거의 기억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나를 거울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신체 속에서 나를 느끼고, 옷을 입고 있는데도 이 벗은 신체 속에서 나를 본다.’ 들뢰즈의 이 문장을 이 영상물에 적용하자면 관객들은 사람도 아닌 요물에 사람으로서의 사유방식과 행동을 투사했을 것 같다. 나도 히스테릭한 감정을 느꼈다. 소리 지르는 아픈 존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베이컨이 이 영상을 봤다면 자신이 그렸을 법한 괴이한 형상이 돌아다니는 데에 감명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런 세계를 3차원 대신 회화로 그렸다. 피에르 위그는 회화 대신 영상물로 표현했고. 인간이 만든 문명은 후쿠시마나 체르노빌 같은 디스토피아를 낳았다. 원숭이 소녀가 늘 커튼을 닫아 놓는 이유, 그녀가 괴물로 변한 건 아무래도 원전 붕괴와 같은 대재앙 탓이다. 그곳을 돌아다니는 저 혼종 동물은 우리에게 다가올 무시무시한 미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기관 없는 신체까지도 꿈꾼다. 제 몸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 ‘유기체의 면, 의미 생성의 각, 주체화의 점’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데 이를 벗어나야 ‘탈영토화를 향해 몸체를 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관 없는 신체에 이르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유기체는 ‘속성’(힘의 감수성)과 ‘양태’(파동, 진동, 강렬함)로 남는다. 전시장 여기저기 흩어져 기괴한 소리를 내던 황금마스크를 이들을 기억한다. 그들의 퍼포먼스 제목은 ‘이디엄이다. 가면을 쓴 이들은 알 수 없는 이상한 언어를 뱉는다. 그 언어들이 ‘이디엄’이다. 리듬, 그 자체. 해석도 번역도 필요 없는 언어의 원형질. 주체이기를 포기한 얼굴 없는 사람들의 이상한 중얼거림, 제게는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들이 이른 ‘양태’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런 변환을 들뢰즈의 말대로 파괴, 생성, 창조로 보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는 퇴행이 아니라고 우기겠지만. '암세포 변환기'는 해체된 유기체의 저 내부, 신의 심판마저 거부하는 순수 감각 주체로서의 몸을 기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영상물에서는 기관 없는 신체가 감지하는 ‘리듬’ 속에서 여러 감각의 교차와 횡단을 보게 된다. 인간 신체는 이제야 의미 작용이 없는 완벽한 평면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본 영상물은 '카마타'이다. 사막에서 발견된 인간 해골을 상대로 기계가 장례 의식을 수행한다. 그야말로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다. 기중기 같이 생긴 기계는 장례 의식에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 기계는 인간의 유해를 탐사하는 새로운 신화의 시작을 알린다. 주체는 완전하게 해체되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 이 기계는 들뢰즈가 말하는 추상기계(어떤 것을 표상하는 기능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도래할 실재, 새로운 유형의 현실을 건설하는 장치)일까? 문명은 들뢰즈의 말대로 힘과 움직임, 리듬이 살아 숨 쉬는 잠재성의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 걸지 생각해 봐야겠다.



전시 공간을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도록 설계 한 건 시간의 순환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해체한 유기체가 다시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느낌이다. 현존 인류 중 그걸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의문스럽긴 하다. 잠 바티스타 비코 식의 순환론적 역사관의 실현을 예고하는 건가. 어떤 종인가 또 한차례 이 땅의 문명을 시작하려는 건가.


감각의 위계 전통이 파괴되는 순서를 시간별로 본 것만 같다. 전시 영상물의 순서를 생각하며 들뢰즈의 용어를 바탕으로 ‘감각의 해체(리미널)-신체 변형(가면 마스크)-기관 없는 신체(암세포 변환기)-의미작용 무효화(이디엄)-생성(카마타)’ 순으로 이야기를 꾸며 보았다. '시간, 감각, 변화, 해체, 몸, 진화, 순환'이 키워드였다. 과감하고 과격한 한 철학자의 이론을 내 나름대로 적용시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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