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 읽을까요? 저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좀 우습네요. 흠흠 예전에는 시 좀 읽었죠. 20대 아니 30대까지도 말입니다. 빛바랜 시집들이 아직도 몇 권 있어요. 수십 년 동안 들추지도 않았지만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이생진의 ‘섬마다 그리움이’는 감성적인 A로부터 얻었죠. 늘 마음이 아픈 B에게서는 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받았고요. 80년대에 사둔 서정주, 김수영, 김용택, 이기철, 장렬, 유치환, 황지우, 오규원, 김남주의 시집들은 앞으로도 남겨둘 것 같습니다. 오래된 책들답게 누렇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긴 하지만요.
시집을 닫은 지가 한참 됐어요. 책을 아예 안 읽은 것도 아닌데 시집에는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논픽션류나 소설에는 나름의 기능이 있습니다. 지식도 주고, 교훈도 주죠. 때로는 킬링타임용으로도 그만이고요. 시는 그렇지 않아요. 실생활에 도움을 주지 않았거니와 재미도 느끼지 못했답니다. 바쁜 직장인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시집을 놓아버리니 다시 잡기가 쉽지 않더군요. 40대쯤 몇 권의 시집을 읽으며 느꼈던 좌절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충격이라니요. 도무지 이해 불가한 구와 절이 줄을 잇더군요. 분명 우리 글인데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성복, 신대철, 신용목, 이윤학. 이들이 그 문제의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독해력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음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감수성의 결여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게서 뭉텅 사라진 걸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습니다. '노란 병아리의 가녀린 깃털', '실뱀처럼 반짝이며 뒤척이는 개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심상, 운율, 비유법에 절로 민감했던 파릇파릇한 시절은 막을 내린 것 같았습니다.
시와 거의 절교하면서 산문 하고만 친했습니다. 무엇이든 이성적인 줄글로만 읽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행간의 간격이 점점 커지더군요. 문장과 문장 사이를 흐르는 사유와 이야기도 건너뛰었고요.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결은 알 수 없는 검은빛으로 출렁거렸습니다. 편리를 존중하고 질서에 순응하느라 나와 사물 사이의 유연하고 섬세한 연결고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걸 찾고 싶었어요. 확정하는 문장, 말, 이성을 대신할 만한 것. 저는 그 연결고리를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시는 언어 예술의 정수이고요.
다시 시집을 펼치게 된 건 정신적 여유 덕분입니다. 일상에 얽매이지 않게 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대부분은 시간이 많이 들고 실용성이 떨어지며 경제적 이익과도 무관합니다. 관조하려는 자세, 평온에의 관심이 없다면 계속 이어 나가기 어려운 활동들입니다. 시 읽기도 그중 하나죠.
몇년 전 몇몇 지인들과 시 모임을 가졌습니다. 혼자 하기 어려운 일들도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면 한결 수월하니까요. 시 읽기는 ‘굵고 짧게’ 보다는 ‘가늘지만 긴’ 수행에 알맞은 일이기도 해요. 그분들과 같이 시를 읽고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를 깨달았어요.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더 깊고 넓은 곁을 내주더군요. 이상한 일이죠. 산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고 축소된 글인데도 함축된 내용은 긴 글 못지않다는 게 말이죠. 시를 읽어서 좋은 점을 세 가지만 골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시를 읽어서 쪼그라든 감수성을 회복하고 싶었어요. 주변 사물이 가청범위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주파수가 잘린 채 재생되는 MP3 파일 같다고 여겼거든요. 사물의 한계가 명료하다는 게 폭력같이 느껴졌습니다. 물기 없이 거칠게 사라지는 감정이나 경험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어요. 프루스트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네요.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들은 언제나 우리의 참된 인상과는 무관한 지성의 개념에 상응하며 이런 개념과 관계없는 것들은 모두 우리의 인상에서 제거하도록 강요한다.’ 저는 이 문장에 공감합니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 아름다움, 메타포, 심미성 이런 것들은 지성보다는 인상에 호소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를 ‘움직이는 비애’라고 말한 김수영은 비에 대한 지식보다는 인상과 감각에 먼저 사로잡혔을 것 같습니다. 김광균의 ‘설야’에는 ‘어디서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구절이 있어요. 눈이 내리는 밤 풍경을 관능적으로 청각화했습니다. 선별된 시어들은 삶을 더 깊이 경험하게 도움을 주더군요. 계속 읽다 보면 제가 가졌던 기대가 조금은 이뤄지지 않을까요.
어떤 활동을 하다 보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이 있죠. 약간은 뒤로 미뤄지던 추후 효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시를 읽으면 감성 회복 외에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더군요. 어떤 예술도 결국은 시대의 소산이므로 당대의 이념, 아이디어, 소망이 집약되게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시의 내용적 측면에 주목하게 됩니다. 시는 언어 형식이므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반영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에 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사회적 메시지를 주고받게 됩니다. 가벼운 표상이 주류로 떠다니는 세계에서는 직설화법이나 걸러지지 않은 표현이 난무하기 쉽습니다. 비유나 상징, 아이러니 등의 시적 기법들은 언어의 테러로부터 세상을 보호하고 우리의 내적 고통을 승화시키는 힘을 부여합니다. 김광규는 소시민이 되어가는 4•19 동지들에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느낍니다. 변한 친구들을 소리 높여 비난하기보다는 인간으로서 측은지심을 더 많이 떠올립니다. 그런가 하면 김수영은 ‘눈’에서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고 합니다. 순결한 눈과 대비해 자신에의 비판과 반성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은밀함이 가슴을 울립니다.
시를 읽으면 아무래도 언어의 형식 실험에 대해 섬세한 감각에 신경이 쓰입니다. 우리말의 활용 범위가 참 크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시인들은 비유를 써서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독자들은 더불어 사유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요, 유치환은 ‘그리움 2’이란 오행시에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는 문장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고 강조했어요. 만일 일반 산문이었다면 이 유치한 글은 예전에 사라졌겠지요. 시를 독해, 해석하는 건 기쁨이자 고통입니다. 기형도의 ‘랄라라, 기쁨들이여!/過誤들이여! 겸손한 친화력이여!’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감탄문이 아닙니다. 지독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의 기억과 관계있어요. 반어법이 슬픔을 더 진하게 만들어냅니다. 황병승의 ‘시코쿠’에는 ‘(너무도 키스를 원하는데 프랑스에서 프렌치 카스를 잔뜩 배웠는데 아무도 입술이 없구나 호주에서 호치키스나 배울 걸 수챗구멍에 대고 외로운 신사숙녀 시코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사람 참 외롭다는 게 와닿습니다. 진정성 있는 언어에는 특유의 아름다움과 전달 기능이 있어요. 언어의 조탁을 거친 문장들이 우리의 사고를 풍요롭게 한다는 걸 확인합니다.
처음에는 매몰되어 가는 감성을 부여잡기 위해 시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시를 다시 접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무용해서 유용하다는 건 이런 거겠죠. 우리 시 읽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