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 다운사이징
현대차 노조가 산업현장에 로봇 도입을 반대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현대차가 공개한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를 겨냥한 것이다. 앞으로 생산 현장에서 로봇 투입이 본격화하면 갈등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득 영국의 19세기 초반 러다이트 운동(1811~1817)이 떠오른다. 기계가 지속적으로 개량되던 시기였다. 공장주들은 굳이 숙련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었다. 미성년자나 여성을 포함한 비정규, 비숙련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노동자 대부분은 살인적인 노동 시간과 낮은 급여에 시달리며 불황과 빈곤을 겪어야 했다. 이들은 ‘이럴 거면 차라리 기계를 부수어 버리는 게 낫겠다’며 기계나 공장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경제적, 심리적으로 벼랑에 몰린 사람들의 최종 선택이었다.
러다이트 운동 참여자들은 비합법 폭력까지 휘둘렀지만 결국 기계에 패했다. 그 후로 200년이 더 지났다. 인류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덕으로 문명을 누려왔다. 우리는 효율성을 최고 가치로 숭상해 왔다. 효율성(Efficiency)이란 ‘최소한의 시간, 비용, 노력 등 자원을 투입하여 최대한의 성과(산출)를 얻는 <과정의 경제성>을 의미’한다. 지구 구석구석 이런 가치관이 스며들었기에 미래를 인공물에 맡기는 일에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자연 예찬이나 휴머니즘 운운하는 건 구식이라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반면 에너지 줄줄 새는 장치로 형편없는 효율성을 증명하는 경우도 있다. 매컬리 컬킨이 나온 ‘나 홀로 집에’(1990)에는 ‘최소의 결과를 얻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하는’ 장치들이 등장한다. 이 설치물들은 루브 골드버그(1883~1970)가 1930년대 그의 만화에서 처음 시도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쉽고 단순한 일상 작업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기계는 인정도, 감정도 없다. 기계를 쓰는 건 일을 빠르고 수월하게 한다. 편리하고 시간도 절약된다. 반면 루브 골드버그 장치들은 시간을 많이 소모하고 에너지도 터무니없이 낭비한다. 인간보다도 더 오래, 더 느리게 시간을 들인다. 정상 속도가 아닌 슬로 모션이다. 에너지와 시간을 한없이 사용하는 작업을 통해 역설적으로 시간을 늦추려 한다.
루브 골드버그 장치는 쓸데없이 힘쓰는 일을 찬양한다. 바로 해결될 일도 이런저런 방해 공작으로 지그재그 서서히 성취된다.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비실용적 낭비를 찬양하랴. 그런데 그 스타일이 미묘하고 암시적이다. 그게 바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닌가. 인간에게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이한 어리석음이 공존한다. 제대로 가던 길을 엉뚱하게 바꾸기도 하고 단 오 분이면 될 일을 긴 긴 시간 매달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행위를 ‘구시대적이다’, ‘뒤처졌다’의 동의어로 매도한다.
사람들은 모던한 세계에 몰입해 왔다. 말끔하고 반듯한 곳, 빈틈없이 척척 돌아가는 곳. 그런데 그 세상이 날이 갈수록 두렵게 느껴진다. 뭔가 불쾌하다. 물건에게 효용, 실용을 강조하다 보니 인간도 그 대상이 되는 것 같아서다. 쓸모가 없으면 폐기한다는 원칙이 인간에게도 적용되리라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효용이 떨어지는 인간이란 병자, 노인, 아이, 외국인, 이민자, 장애인 등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누구든 약자가 될 운명이라는 점이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노인이나 환자가 되지 않나. 인간에게는 공리주의적 효용성을 요구할 수 없다고 답하고 싶다. 그러나 현재 세상이 움직여 가는 방향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영화 두 편을 들어 답변의 어려움을 대신해 본다.
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2025)는 효율을 위해 기계를 도입한 인간이 드디어 기계에게 장악되는 세태를 풍자한다. 영화 초반 주인공 만수는 기계 반대론자에 가까웠다. 기계가 장악하는 세상에 맞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동료 직원들을 선동해 파업을 주동하다가 해고된다. 그는 기계에 밀려났다. 이제부터는 일할 곳을 기웃거려야 하는 실직자다. 반드시 취업해야 한다. 실력이 좋은 다른 실직자들은 나의 길, 내 가족의 행복을 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인정사정 두지 말고 라이벌을 없애야 한다. 만수는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재취업 도전에 성공한다. 그러나 차가운 마음으로 무장한 그에게는 인간 동료가 필요 없다. 주의, 주장을 펼치던 시끄러운 인물들이 죄다 사라졌다. 인간은 품이 많이 든다. 남들과 협잡을 하거나 드잡이를 하고 모욕을 주기도 한다. 에너지 소모의 달인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 없고 생각 없는 기계만 남아 공장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니까. 공장은 에너지 낭비라고는 없는 완벽한 공간이다. 만수는 조용한 기계 동료들과 함께 최상의 품질을 생산할 것이다.
다음 영화는 알렉산더 페인의 '다운사이징'(2017)이다. 영화 속 과학자는 인구과잉, 에너지 부족, 환경파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알아냈다. 사람을 13cm로 줄이는 기술을 발명한 것이다. 각자 자기 손바닥보다도 작아진다. 이렇게 작은 몸으로는 생태계를 교란시키기도 쉽지 않다. 지구 크기나 에너지 양은 같은데 작은 사람들이 아무리 써봐야 자원의 절대량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욕망도 저절로 해결된다. 현실에서 1억 원이 그 세계에서는 120억 원의 가치로 커지기 때문이다. 웬만한 중산층은 작은 세계에서 재벌처럼 거들먹거릴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환상적이다.
우리 인류가 각자 작아지면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참새나 생쥐가 사람만 하다. 장미꽃이라도 한 그루 키우려면 수도 없이 물을 이고 져야 한다. 벌레에게라도 물리면 치명적이다. 개나 고양이에게도 밟히지 않으려면 늘 신경이 곤두선다. 갑자기 작아져 버린 사람들에게 지구 생태계는 너무나 거대하고 압도적이다. 우리 행성이 인류를 위해 다시 줄어들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현생 인류는 지구에서 더할 나위 없이 제대로 적응해 온 존재들이다. 영화에서처럼 수세에 몰려 몸을 줄이거나 굴속으로 피신할 수는 없는 노롯이다.
칼 폴라니(1886~1964)는 인간과 자연을 상품으로 본 후로부터 우리의 세계관도 왜곡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위의 영화 두 편은 자연에 효율성을 따지는 순간 인간도 사라지거나 변형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의 DNA가 ‘호기심’보다는 ‘감동’에 더 민감했더라면 어땠을까. ‘더 나은 내일’이라는 환상보다는 ‘가장 아름다운 오늘’에 가치를 부여했더라면 어땠을까. 루브 골드버그 식 지극히 비효율적인 삶을 상상해 본다. 미련하게 그러나 혁명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