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럴과 길티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by 이서림

성해나의 ‘혼모노’라는 단편집에 관심이 갔다. 세태를 깊이 있게 그렸다고 생각한다. 이중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를 먼저 읽어보았다. 작품에 등장하는 감독의 영화 제목으로 플롯의 방향을 바꾸거나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섬세한 내면의 변화를 잡아내는 솜씨에 감탄한다. 얼핏 오세연 감독의 ‘성덕’(2021)이 연상된다. 오랜 덕질 대상이었던 ‘오빠’가 범죄자가 되었단다. ‘우리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열변을 토했던 과거는 어떻게 되는 거지?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길티 클럽’. 죄의식 있는 클럽인가 했더니 ‘길티 플레저’ 클럽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작품에 나오는 영화제목이기도 하고. 죄의식을 즐기는 모임이라니. 그 클럽의 지향점이 죄의식이 있음에도 즐긴다는 소리인지, 아니면 죄의식 자체를 즐긴다는 건지 불분명하다. 죄의식이란 건 윤리의식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이 단편은 주제는 제목인 길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모럴이라는 말 또한 자주 등장한다. 글에서는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정신적 태도.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의 구분에 관한 태도’로 정의한다. 당연하지만 모럴은 사회적 합의에 바탕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낱말이 더 이상은 그렇게 쓰이지 않는 것 같다. 작은 공동체, 아니 개인의 일시적 선택으로까지 하강한다. 세상의 모럴이 패거리만의 모럴로, 심지어 나만의 모럴로.


김곤, 실력과 외모를 갖춘 스타급 감독이다. 요즘 이런 사람에게는 열혈팬이 들끓게 마련이다. 이들에게 김곤을 모르는 이는 ‘필리스틴’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최근 김곤이 자기 작품 ‘인간 불신’에 출연 중이던 어린아이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있다.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팬 활동을 중단한다. 주인공도 물론 소문은 들었으나 부정하고만 싶다.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믿어야죠. 우리는 그래야 되는 거 아녜요?’가 논리라면 논리다. 그녀는 ‘사실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사건을 멋대로 공론화하고 거짓말까지 덧붙여 온갖 데로 퍼 나르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인간 불신러들이 징그럽게 여겨진다.


김곤의 신작 ‘안타고니스트’ 해외 출품을 계기로 길티 클럽 존버들이 모였다. 사생팬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아이돌을 개발지로 삼는 측이 있나 하면 낙원으로 기대려는 이들도 있으니까. 사랑의 순도는 다르지만 그래도 여기서라면 덕질도 정당하다. ‘영혼 보내기’가 아깝기는커녕 ‘우리 고니’에 대한 사랑을 계속 증명하고만 싶다. 이곳에서 김곤은 진정한 영화의 신이다. 그들은 편집실이 편의를 위해 화면 비율을 바꾼 것도 인간의 가변성을 상징하는 장치라고 멋대로 해석한다.


이 안전한 방에도 빌런은 등장하는 법. 그녀가 이 자리에 참여한 이유는 김곤과의 영상통화 시간에 아동학대 사건을 직접 캐묻기 위해서이다. 이번 영화 제목처럼 안타고니스트인 셈이다. 그러나 찐팬이라면 반동적 인물의 등장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주인공은 ‘안타고니스트’ 국내 개봉에 맞춰 김곤 감독이 등장하는 GV에 참여한다. 여기서 그녀는 김곤의 데뷔작이기도 한 ‘미몽’에서 깨어난다. 감독이 어린이 학대를 스스로 고백했기 때문이다. 우상은 실수를 한 게 아니다. 명백하게 잘못했다. 그녀는 ‘무언가 터졌’고 ‘눈앞이 뿌예졌’으며 ‘땅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경험한다. 모럴의 근원 자체가 흔들리고 붕괴한다. ‘인간 불신’을 일삼던 이들이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도, ‘안타고니스트’의 예리한 공격에도 ‘길티’를 ‘플레저’할 정도로 굳건했던 믿음이 하루 아침에 깨진 것이다.


주인공은 치앙마이에서 호랑이 만지기 체험에 참여한다. 호랑이는 이빨도, 발톱도 뽑힌 채 마치 상품처럼 전시되고 있었다. 그걸 만지는 건 두렵다기보다는 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막상 만져보니 그 털이 제법 부드럽고 반질반질하다. 역겨운 냄새도 사그라든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까지 들 정도다. 어쩌면 김곤은 전시될 때에만 본성을 감추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의 내면에 역겨움과 악취가 늘 불온하게 도사리고 있는지 누가 알랴. 그러나 팬덤에 취한다는 건 속 편한 일이다. 군중 속에 있다는 건 더없이 안전한 일이다. 같은 질문과 답이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곳. ‘패거리 모럴’을 확인할 수 있는 곳.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되는 곳이다. 길티 플레저 맞다. 죄의식은 좀 있지만 즐겁지 않나. 관광 상품으로 호랑이를 만지는 것처럼.


미몽에서 깨어나면 환멸이 남는다. ‘실패한 영화, 너절한 서사, 치덕치덕 처바른 클리셰, 싸구려 엔딩’을 갖춘 지독히도 못 만든 영화인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무치도록 믿었던 인물에 배신을 당한다는 건 처참한 일이다. 진실이 아닌 허구를 신뢰했으므로.


죄의식이 있다면 즐길 수는 없으련만 이런저런 길티 클럽은 앞으로도 존속할 것 같다. 정치, 종교, 학문 어느 방면이든. 나름의 자기 합리화에 기대 '순정한 마음'을 계속 이어가려는 이들도 있을 테니. 자기만의 모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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