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 이불, 1998 이후
리움의 ‘이불: 1998 이후’를 관람했다. 전시에서 이 작가가 개인을 넘어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회고와 전망을 촘촘하게 엮는다는 인상, 보편사를 기술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대 예술가로서 이불의 고민은 관객에게 깊게 투영된다. 작가가 수단으로 가져온 시대적 산물이 우리들의 지난 역사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불을 알게 된 건 1988년이다. 그때 20대였던 그녀는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저녁 뉴스에서 어떤 젊은 행위예술가가 오징어 괴물 같은 의상을 입고 거리를 기어 다니는 영상을 보았다. 어른들은 혀를 찼다. 나는 저 사람이 지나치게 도발적이라고 느꼈지만 공감가는 점은 있었다. 저런 기괴함은 기성에 대한 반발 같은 게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행위다.
나중에야 이 작품이 ‘갈망 Craving’이라는 것, 그 의상들이 ‘몬스터 핑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무렵 이불은 굉장한 싸움꾼처럼 보였다. 관객의 심장을 관통하는 무기를 온몸에 지닌 전사.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불의 초기 10년의 퍼포먼스 작품들을 사진, 영상으로 전시했었다. 그때 전시 제목이 ‘이불 시작’이었다. 남성중심사회, 페미니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격렬한 항의가 전시장을 꽉 채웠었다.
이번 리움의 ‘1998년 이후’는 위의 ‘이불 시작’ 퍼포먼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열정적이다. 대신 시적이며 서정적인 여운을 깊이 남긴다. '환상, 해체, 기억'의 키워드로 글을 써보려 한다.
1964년생 이불 작가 세대는 미래에 대한 동경과 희망으로 성장했다. 정치적으로 어두웠지만 경제적으로는 점점 윤택해지는 세상을 경험했다. 물론 예술가들은 이 와중에도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리움의 이불은 문명 발전을 순진하게 바라봤던 20세기초 미래파적 인식이 스스로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금에 와서는 음울한 시대 인식이 점점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것 같으니 그 예리한 촉감에 다시 감탄한다.
다른 작가들처럼 그렇지만 이불 역시 독재 정권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해빙(다카키 마사오)’은 일본식 이름의 박정희가 누워 있는 작품이다. 얼음 속에 박제 상태로. 빙하에 묻혀 썩지도 못하고 보존된 고대 생물처럼.
1990년대에 모스크바의 레닌묘를 가본 적이 있다. ‘해빙’ 앞에 서니 그때 느꼈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죽어서도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끔 얼음이 녹을 때마다 죽은 이로부터 검은 구슬이 흐른다. 우리는 아직도 누군가의 검은 그림자, 어두운 영향에 갇혀 있을지 모른다. 카네티(1905~1994)는 ‘군중과 권력’(1960)에서 권력이 끊임없이 군중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군중을 먹이로 삼아 양분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떤 점에서 군중 또한 권력자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자유보다는 구속’이라고 외치면서.
전시장에는 뜬금없이 일인용 노래방 기계가 우뚝 서 있다. 우리의 20세기에는 밀폐된 비밀 공간이 많았다. 스탠드바, 삼청동 안가, 기무사 고문실 그리고 오락거리조차 늘 은폐되어 어두침침했다. 그때는 카페도 칸막이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 많았다. 이 설치물은 ‘노래방 프로젝트’ 중 하나다. 90년대에는 노래방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좁은 공간, 인테리어라고는 소파, 금영 노래방 기계, 탬버린, 마이크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곳도 음악이 나오고 머리 위로 번쩍번쩍 미러볼이 빛나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신비한 공간이 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순간 이동한다. 이공 beyond space라는 낱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현실 부정 아니었을까.
노래방 화면의 배경에는 교복 입은 여고생들이 숲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왠지 아서 밀러의 ‘시련’(1953)과 비슷하다. '시련'은 금기된 행위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하는 소녀들이 다른 이들에게 마녀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스토리다. 그때 한국에는 내식대로 편하게 사는 게 쉽지 않았다. 간섭이나 명령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 소녀들도 다른 이들처럼 약간의 가식과 적당한 교양을 겸비한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불이 바라본 세기말 소비문화를 들여다본다. 1998년 사이보그 연작이 약간의 답을 마련할 것 같다. 작가의 끊임없는 주제인 ‘몸’에 대한 인식도 살펴볼 수 있다. 사이보그는 말 그대로 인간과 기계가 융합된 괴이한 형체다. 일본 애니 ‘공각기동대’나 ‘인노센스’를 보면 전자 기계를 장착한 사이보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전투에 과감하고 능수능란하게 대처한다. 다치거나 죽어봐야 다시 태어나니 큰 두려움도 없다. 몸은 늘 젊음과 미를 추구한다. 여자 캐릭터는 옷을 입든 벗든 지나치게 육감적이다.
이불의 사이보그는 1998년 아트선재에서 선을 보였다. 여기저기 허공에 매달린 사이보그 사이로 바닥에는 소프트 몬스터들이 촉수를 늘어뜨리고 서 있는 전시였다. 이 전시는 화보로만 봤다. Y2K 신드롬이 기억난다. 그 당시 분위기로 이미 2000년 이후의 기술문명에 대한 불안이 팽배해 있었다. 그녀의 여전사들은 그리스 조각처럼 아름다운 몸으로 관객의 머리 위를 장악한다. 마치 숭배를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재료는 어울리지 않게도 실리콘과 안료 아닌가. 몸도 절단되어 있고. 저건 뭘까. 에로티시즘을 머금은 아마조네스인데 불구라니. 새 문명은 몸의 해체와 변형을 가져올 것이다.
헤매다가는 물신 숭배, 외모지상주의, 몸과 마음이 불구가 되기 쉬웠다. 나아가 우리 관객들은 길을 잘못 든 현대 문명, 불안한 테크놀로지의 향방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불은 설치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다. 동시에 시대를 깊이 사색하는 본격 예술가로 비쳤다.
2024년 이불이 뉴스를 장식한 적이 있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The Genesis Façade Commission)'시리즈로 마련된 전시에서 그녀의 작품이 건물 정면 외벽(파사드)을 장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메트로폴리탄에 세워졌던 작품과 유사한 작품이 있었다. ‘롱 테일 헤일로 long tail halo’라는 이름이다. 전시 설명처럼 루브르의 ‘사모트라케의 니케’와 같은 분위기다.
니케는 흰 대리석이지만 이건 검은색 스테인리스 스틸이 주 재료다. 물론 이불의 특기인 혼종적 기계장치, 파편 등이 뒤섞여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금속 덩어리, ‘당신의 차갑고 어두운 눈동자 속 무한한 섬광’이나 ‘티탄’도 롱 테일 헤일로와 비슷한 주제로 보인다. 거대한 제목을 지녔으나 내면은 텅 빈 세계의 말로, 문명의 공허가 연상된다.
이불의 작품 목록을 살펴보면 이 작가가 모더니즘의 외피를 얼마나 뜨겁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우선 전시장 전체를 덮다시피 하는 거대한 유리 작품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사이보그시리즈, 애니그램, 몬스터, 오바드, 몽그랑레시 등은 거의 같은 사유의 다른 형태로 보인다.
바닥의 유리 설치 작품은 ‘태양의 도시’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톰마소 캄파넬라(1568~1639)의 ‘태양의 도시’는 17세기 사람들이 꿈꿨던 유토피아 고전물이다. 정치/경제/사회 모두 완벽한 공산 사회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공상적 사회주의 작품의 효시라고 할 만하다. 이런 사회가 가능할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나 조지 오웰의 ‘1984’(1949)을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작가는 모더니즘이 추구한 인간 문명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한다.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깨지고 갈라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 세계는 차갑고 어둡게, 불안하고 위험하게 반짝인다. 물론 미래가 멋질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세계 평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도 엄연하게 있다. 그들의 바람일까? 위태로운 빙하 조각처럼 부유하는 희망을 제단 삼아 작은 불빛을 피워둔 사당 같은 곳이 있다. 아름다웠다. 그런데 작가는 이거 가짜다, 곧 그 불도 꺼진다고 말한다.
이 전시에서도 러시아 유물론 미술가 중 블라디미르 타틀린(1895~1956)이 자주 등장한다. 타틀린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작가들이 즐겨 인용한다. 2022년 세종미술관에서 있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들과 동시대 인물이다. 이 작가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이유는 구축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모더니즘과 공산주의의 이념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가들은 이루지 못한 꿈을 표현할 때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응용한다. 인류는 먼 하늘, 닿을 수 없는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거대한 뾰족탑을 만들어 왔다. 고대에는 바벨탑이, 중세에는 고딕 건축물이 대표적이다. 타틀린 시대에는 에펠탑을 들 수 있겠다.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는 실제 건물을 위한 모형이다. 타틀린은 당시 시대정신에 맞게 실용적인 현대건축재료(시멘트, 철근)를 바탕으로 엔지니어링과 순수추상을 결합하려 했으나 정치적, 기술적 이유로 실패한다. 원래 400m 높이로 상/중/하단이 제각각 빙글빙글 따로따로 돌아가도록 기획되었으니 당시 기술과 재정으로 실현되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이 기획은 ‘성취되지 못한’ 모더니스트들의 꿈으로 기록된다. 이번 작품들 중 ‘몽그랑레시를 위한 모형’이나 오바드Ⅴ, 몇몇 회화 작품들이 타틀린의 잃어버린 꿈을 소환한다.
Vladimir Tatlin and a model of his Monument to the Third International, Moscow, 1920
이러한 사고는 브루노 타우트(1880~1938)의 공상 건축에도 들어 있었다. 독일 표현주의를 건축에 적용했다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어떻게 이런 신기한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채 번역되지 못한 그의 스케치는 대담한 유토피아적 비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바우하우스, 유겐트 스틸 운동에 참여한 어느 누구보다도 공상적이고 대담한 사회혁명가였다. 목적도 기능도 없이 단지 순수를 지향하는 건축물이라니. 그의 꿈은 나치 치하에서 당연히 실현할 수는 없었지만 르 코르뷔지에나 발터 그로피우스 그리고 일본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전시장의 ‘애프터 브루노 타우트’는 그에게 바쳐진 연가로 보인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의 헌사 같다.
부르노 타우트, Glass Pavilion의 내부 계단과 폭포, 1914
전시장에는 이렇게 이루지 못하고 좌절된 환영들이 많다. 어쩌면 지난 세기의 모더니즘은 도취와 환영이 만들어낸 백일몽 아니었을까.
1920~30년대의 발터 벤야민은 집단적 무의식, 꿈, 유토피아에의 관심들을 바탕으로 기억과 역사를 탐구했다. 이제 기억을 발굴해 보려 한다. 이불의 전시장에는 환영을 뜻하는 거울(비아 네가티바)과 현실의 경계선인 동굴 이미지(수트레인, 벙커)가 여럿 보인다. 프랑스어 퍼듀perdu는 ‘잃어버린’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단어는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덕분에 많이 알려져 있다. 그 긴 소설에서 작가 찾으려고 한 것은 바로 과거, 시간, 기억 같은 것이다. 지난 시절 우리가 잃어버린 건 뭘까. ‘진실’ 아닐까.
윤미애는 ‘발터 벤야민과 기억’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과거는 억압되고 망각된 것을 묻도록 촉구하는 과거다. 과거가 비판받는 이유는 그 안에 강력하게 세력을 떨친 인간적 폭력과 결점이 망각되고 은폐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인물 마르셀이 우연으로 무의식을 기억해 내듯이 과거는 언젠가 우발적, 비의지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한강의 소설들처럼 망각으로 사라지려는 기억을 애써 두레박으로 퍼올리는 작업을 한다고 생각한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처럼.
진실을 마주해서 직면한 과거는 해체되어 흩어진다.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나온 이불의 평면 작업은 고통으로 흩어진 파편 조각들이다. 퍼듀 주제의 평면 작업은 성북동 BB&M 갤러리 개관전에서 처음 봤다. 부드럽고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들뢰즈의 말대로 '기관 없는 신체‘만 떠도는 것 같다. 자개, 돌가루를 안료와 섞어 만든 작품들은 추상이나 구상의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기억을 다시 재구성할 수 있을지, 올바른 시간 쌓기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사이보그나 아니그램이 아닌 온전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작가는 퍼듀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되묻는다.
애써서 길어 올린 진실이 암담할 때 느껴지는 분노는 참기 어렵다. ‘몽그랑레시: 이상의 초상’이라는 작품이 나온 이유일 것이다. 페데리코 벨리니의 ‘달콤한 인생’(1960)에는 이불이 구현한 스타이너의 비극적 최후가 잘 그려져 있다. 교양 있고 관대한 40대 가장이 권총 자살한다. 사랑스러운 두 아이를 먼저 사살한 후, 자신도 뒤따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장을 보고 돌아온 아내는 오열할 뿐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인생이 달콤하기는커녕 비참하기만 하다는 것. 진실을 알면 제정신으로 살기는 어렵다는 거다.
들여다보기 끔찍한 것들을 들춘다는 것, 그게 현대 예술가의 역할 중 하나다. 그들은 예쁘고 평화로워 보이는 것들의 이면을 폭로한다. 어둡고 험해도 진실을 밝히려고 부단히 나아간다.
덕분에 관객들은 한 방씩 세게 얻어맞게 된다. 진실은 벌거벗었다고 한다. ‘나부의 진리’, 그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 단지 그거다. 이 전시는 망각을 두드려 기억을 일깨우려 한다는 것, 우리를 고통에 밀어 넣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예술가의 의무라고 말한다.
이불의 ‘불昢’은 새벽을 의미한다. 의미심장한 미래의 새벽을 알리는 작품들을 또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