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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6. 2021

그전과 그 후

꽃핀 소녀들의 그늘,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


남녀 이야기는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을 화수분이다. 예전에는 낯 모르는 남녀가 사랑하는 사이로 진행하는 과정을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다루었다. 이렇게 일반적인 애정물도 있지만 병적인 집착형도 있어 스토킹, 치정 살인이라는 범죄물도 종종 등장한다. 최근에는 익숙하거나 지루한 관계를 참지 못하는 남녀의 이야기들도 많아지는 추세다. 이들이 서로 속고 속이는 스토리 전개는 흥미진진한 드라마 소재다. 누가 평범한 일상을 되풀이하는 부부, 애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둘까.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그리 어렵지도 않다. 제도에 포박된 삶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들은 자연성이 넘치는 변화무쌍한 테마에 관심이 많다.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1965)은 잔인한 영화다. 인간이 유니크하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지에 대한 실험이다. 남편은 외도 중이다. 그는 애인을 사랑하지만 아내에게도 최선을 다 한다.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의 행복에 기쁘다. 흠, 그런데 그건 남편의 생각이었을 뿐. 가족 나들이를 간 어느 날, 아내는 호수에 뛰어들어 삶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 무엇도 이 가족의 행복을 막지 못한다. 남편의 애인은 죽은 아내의 뒤를 이어 새 아내가 된다. 그녀는 예전 아내와 똑같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나간다. 전 아내는 완벽하게 새 인물로 교체되었다. 남편은 또다시 깊고 충만한 감정을 느낀다. 그전처럼 이하동문. 그러나 겉과 다르게 내부는 또 금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한반복은 지루하니까.

이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들여다보련다. 그만큼 자주 개봉하는 감독도 흔치 않다. 이 감독의 영화를 습관처럼 보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강원도의 힘’(1998)부터 최근까지. 작품들이 친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너는 우아하지 않다. 그리고 나도 한심하다.’ 같은. 감독은 사람들이 감추고 속이려 들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내는 구질구질한 모습을 잘 포착한다. 겉으로는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균열 투성이 관계들, 그걸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씁쓸함, 남을 비웃지만 사실은 자신도 그만큼 주접스럽다는 자각을 드러내는 데에 선수급이다. 그래서인가. 작품에는 남녀 간 부적절 관계가 자주 등장한다. 흔히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고 불린다. 인간관계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원초적인 테마는 흔치 않을 테다.

홍상수의 ‘그 후’(2017)를 보면 여전한 자기 어투 반복에 쓴웃음이 절로 난다. 인물들은 늘 마주 앉아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다. 침묵 반, 어색함 반을 안주 삼아 뻔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카메라는 가만히 있다가 별안간 클로즈 업에 가깝도록 쑥 들어가 상황을 더 민망하게 만든다. 감독 본인을 변명을 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자기모멸에 파묻힌 건가.


초로의 출판사 사장, 봉완이 밥을 먹는다. 주름진 얼굴에는 흰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많다. 혼자서 우적우적 먹고 아내나 직원 하고도 마주 앉아 연신 고 마셔댄다. 먹는 것 말고는 인간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 같다. 궁금하지도 않을 내용을 가끔 묻고는 적당하게 대꾸도 한다. 케세라세라. ‘사실 하나도 안 궁금하다.’, ‘너도 대충 대답하라.’ 뭐 그런 투다.

그는 난감하다. 새로 들어온 여직원, 아름 앞에서 있는 대로 망신을 당했다. 전 직원 창숙과의 러브 어페어를 알아챈 아내가 아름을 창숙으로 착각하여 폭행했기 때문이다. 봉완은 아름에게 참 미안하다. 그래서 그만두려는 아름을 다시 앉혀보려고 한다.

그러나 민망함과 참담함의 시간은 완료되지 않는다. 애인이자 전 직원인 창숙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름은 사장 아내에게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았고 사장의 애인에게는 일자리까지 빼앗긴다. ‘운수 없는 날’이란 건 바로 오늘 같은 날. 폭력과 해고가 같은 날 벌어졌다.

그래도 사장은 괜찮다. 아내 모르게 창숙과의 사랑을 계속할 수 있고 그런대로 가정도 유지할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기 아닌가. 봉완과 창숙은 영원히 사랑하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끝.

그러나 모든 관계는 영원할 수 없고 사랑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성스러운 야만인’의 세계는 쉽지 않다. 홍상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 후로도 변함없이'란 쉽지 않다. 이 주제는 나쓰메 소세끼의 ‘그 후’(1910)에서 이미 중후하게 다루어졌다. 다이스케와 히라오카, 두 남자는 미치요라는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다. 다이스케는 공연한 의협심에 사로잡혀 친구에게 미치요를 양보한다. 히라오카와 미치요 부부는 결혼 후 잘 살지 못한다. 아이도 잃었고 생활도 궁색하다. 다이스케는 부부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그렇지만 결국은 친구의 아내와 간통을 저지르게 되고 그녀를 가로챈다. 여기까지가 다이스케와 미치요, 두 남녀의 애정 투쟁사이다.


자기들끼리는 로맨스의 승리라고 자축할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 시작된다. 다이스케는 직업 한 번 가져본 적이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집으로부터도 파문당하고 말았으니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먹고 살 수나 있겠나? “모든 신성한 일이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빵과는 무관한 법이야.”라며 고상함을 추구하던 백수 남자는 앞길이 막막하다. 미치요는 불륜을 겪고 겨우 얻은 대가가 또 다른 궁핍의 세계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후’의 세상은 늘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 거기에서는 선남선녀도, 불타는 정열도 없다. 그건 ‘그전’까지의 일이다.

소세끼의 말대로 결혼까지의 과정은 ‘자연’이다. 연애든, 간통이든 혹은 불륜이든 남녀 간의 섬씽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의 아들’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다. 빵을 위해 애쓰기보다는 여유 있는 시간을 누려야 한다. 문학, 예술, 철학, 인생 그리고 사랑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 앞에서는 제도, 관습, 규칙, 법 따위는 빛을 잃는다. 직업, 결혼, 학교 등은 ‘자연의 아들’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다. 인간의 자유를 방해하고 아름다움을 희미하게 하는 재미없는 틀이다. 드넓은 풍광 위에 액자틀을 슬쩍 세운 후 액자 내부만 바라보라고 강요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자연의 아들도 시간이 가면 제도의 힘에 사로잡히곤 한다. ‘자연의 아들’은 대체적으로 ‘의지의 인간’에게 길을 양보한다. 그게 편리하다.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자연성’을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하고 그것이 문명사회의 법칙이라고 점차 생각을 바꾸게 된다.

출판사 사장의 연애도 마찬가지. 아름에게 하는 말로 비추어 그의 연애 전후 사정은 명료해졌다. 그는 아내와 딸의 위협과 애원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두 칸 방에서 알콩달콩 지냈던 창숙과의 사랑은 끝났다. ‘그전’의 종말. 엔드리스 러브의 종말. ‘그 후’로는 여전히 무언가를 갈구하는 중년 남자만 남았다.

만일 봉완의 사랑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이스케와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리리라. 그 헐벗은 사랑이 제도화된 거니까. 그다음부터는 사장과 아내의 삶처럼 일상이 반복되겠지.

‘자연’은 아름답지만 제도권으로 들어오는 순간 찬란함이 사라진다. 그 많은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보여주려 한 아름다움은 ‘그전’까지 이다. 이 점에서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 중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에서 발견해낸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우리가 모르는 존재들의 이런 덧없음은 우리가 자주 만나는 여인이라면 누구나 결점을 드러내고 마는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 그 무엇으로도 상상력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그런 추적 상태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런데 상상력이 제거되고 나면 쾌락은 쾌락 자체로 환원되어 결국은 무의미해지고 만다.’

‘가령 우리가 식탁 위에 차려진 생선을 처음 볼 때면 생선을 붙잡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술책과 우회들이 별 가치 없어 보이지만, 낚시질하며 보낸 오후 시간들, 우리가 그 생선들로 무엇을 할지 잘 알지 못한 채 수면에 소용돌이가 일고, 투명하고 유동적인 푸른빛 물결 속에 반짝거리는 살과 어렴풋한 형체가 스쳐 가는 모습이 끼어들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나는 법이다.’

낯선 일도 몸이 적응해 익숙해지면 신선함을 잃는다. 낚시를 즐기는 이유는 잡기 전까지의 물고기에 대한 매혹 때문이지 굳이 생선을 먹고 싶기 때문은 아니다. 잡기 전 흥분과 잡은 후의 식상함은 다르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만 대상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는 건 프루스트만의 생각은 아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다. 처음 보는 것, 신기한 것,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찬미나 다름 아니다. 아, 그럼에도 끝없이 새것만 찾는 건 불가능하다. 피로하고 공허하다. 게다가 흥분도 반복되면 상상력도 빛을 잃어 퇴색한다.

보석이 보석인 이유는 귀해서일 것이다. 그다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드물다고도 한다. 우리는 쉬운 것, 여기저기 널린 것을 함부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늘 볼 수 있고, 쉽게 만나는 이들을 함부로 대우할 때도 있다. 가까이 있어 늘 마주친다고 시시한 건 이닐 테다. 눈에 뜨이기 쉬운 것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공기나 물 같이 늘 곁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내 마음의 보석이다. 그들은 일상적이다. 그러나 대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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