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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6. 2021

시간 앞에서

뉴로맨서, 시빌레


김아타의 ‘온 에어 프로젝트’는 카메라를 8시간 정도 장 노출해서 출력한 사진 모음이다. 들여다보면 마치 한 컷 사진 같지만 지난 8시간의 궤적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 밑에는 ‘빨리 움직이는 것은 빨리 사라지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천천히 사라진다’고 쓰여 있다. 거북이와 코끼리처럼 느릿느릿 가는 것들은 오래 살고 하루살이나 새들처럼 휙휙 나는 것들은 얼마 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건물들은 그 자리에 요지부동 그대로다. 건물이 8시간 내에 사라질 리 없다. 앞으로도 한참 동안 그대로 있을 것이다. 오토바이들은 분주하다. 붉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다. 조금 큰 자동차들도 비슷하다. 흔적이 있되 형체는 없다. 시간을 사로잡으려고 분주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빠르든 느리든 에너지 덩어리만 남기고 사라진다.

찰나, 겁 등은 일상에서 쓸만한 말은 아닌 것 같다. ‘찰나’는 불교 용어이다. 최소 시간 단위를 뜻하는데 75분의 1초, 약 0,013초에 해당한다. 칼로 명주실을 툭 끊을 때 걸리는 시간이 64 찰나라고 한다. 그러니 1 찰나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겁은 반대로 길고 긴 무한 시간을 의미한다. 사방과 상하로 1 유순(약 15km)인 성 안에 겨자씨를 채우고 100년마다 한 알씩 꺼낸다고 해도 겁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또 사방 1 유순의 큰 반석을 100년마다 한 번 흰 천으로 닦아 그 돌이 다 닳아도 겁은 끝나지 않는다. 겁의 시간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이란 한갓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은 비교적 현실을 잘 반영하는 예술 작업이다. 초기 작가들은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기를 이용했다. 그곳에 누가, 무엇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셔터를 눌렀다. 피사체를 극도로 가까이 클로즈 업하거나 먼 곳에서 롱샷으로 잡기도 했다. 위에서, 아래로부터 또는 사선으로 앵글을 잡기도 했지만 사진 속은 피사체는 그대로다. A가 B로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러나 피사체 A를 향해 찰칵하는 순간 피사체의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있다. A는 그 모습 그대로 불면의 A로 남는다. 시간은 지워진다. A는 A’로 전이된다. 세상은 그대로 나아가는데 플레임에서만은 좀 전의 그 모습이다. 사진기가 발명된 이후 피사체가 된 이들은 그 한 컷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다. 사진 밖 우리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살아남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요시다 다쓰오 원작으로 원제는 ‘폴의 미라클 대작전’이다. 4차원 마법 세계를 지배하는 암가 벨트 사탄, 대마왕이 니나를 납치하고 폴이 구출해내는 이야기다. 폴은 사진과는 반대되는 시간 멈춤을 경험하게 된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폴 일행을 제외한 세상 전체가 정지된다. 그 모습 그대로 세상은 찰칵 스톱한다. 그 찰나의 와중에 폴과 친구들은 악당의 무리와 결전을 벌이고 니나를 구해낸다.

폴은 남들이 멈추어 있을 때도 부단히 움직이며 삶을 만끽한다. 그의 신진대사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몸과 마음도 변한다. 옆 사람의 시간은 정지했지만 폴은 계속 늙어간다. 반면 세상은 그대로다. 세상이 제 시간으로 돌아올 때 폴은 누구보다 빨리 나이를 먹겠지. 어쩌면 부모보다 더 일찍 늙어 죽을 것이다.

모두 죽는다. 100년 후에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죽는다. 17세기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시간을 멈추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이다. 100년 후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래서 공주는 100년 간 잠을 잔다. 성을 둘러싼 장미 가시의 숲을 뚫고 들어온 왕자가 금단의 키스를 베풀 때까지. 그 긴 겨울잠을 자고 난 후에야 시간은 실험을 멈추고 제 속도를 낼 것이다. 그녀는 시공간을 초월해 길고 긴 삶을 이어갈 것이다. 보통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삶 이후의 삶을 경험한다.

쿠마이의 시빌레는 불사의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아폴론의 애인이었다. 아폴론이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자 시빌레는 ‘제 생일이 이 손 안의 모래알 수만큼 되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주먹 안의 모래알 수만큼 살고 싶었으리라. 한 가지 실수만 빼고 그녀의 소원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시빌레는 청춘을 지닌 채 영원히 살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다. 그 후로 시빌레는 오래오래 살았다. 마귀할멈처럼 추하게 늙고 쪼그라들었지만 말이다. 아폴론도 더 이상 이런 흉측한 모습을 사랑하지 않고 떠난 지 오래 되었겠지. 이제 그녀는 작은 항아리 안에도 들어갈 정도로 마르고 작다.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불쌍한 시빌레를 애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쿠마이의 무녀가 새장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소. 아이들이 시빌레에게 '무엇을 원하느냐'하고 물었다. 시빌레는 '죽고 싶다'고 대답하더라.'

인간이지만 영생을 보장받고 싶었던 시빌레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저주를 받은 셈이다. 그녀는 살아있는 걸까? 죽은 건가? 살았으되 살아있는 것도 아니니 죽음만이 그녀의 유일한 소원이다. 고대 사람들은 신을 넘겨다 보는 인간을 경고한다. 불가능의 영역을 엿보지 말라.

인간에게 이성, 생각하는 힘이 없었더라면 간단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탐욕스럽게 영생이나 시간 개념에 민감하지 않았을 터이다. SF소설이나 게임, 영화에서도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다고 외친다. 기계 인간, 인조인간으로 개조되어서라도.

윌리암 깁슨의 ‘뉴로맨서’(1984)는 뇌와 컴퓨터 통신망이 결합해 만들어진 사이버 스페이스를 그린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되고 죽음도 통제 가능 다. 의족, 수족이나 장기 이식 등은 평범한 일이다. 기능을 상실한 신체 각 부위는 언제든 쉽사리 새 부속품으로 교환할 수 있다. 강화 플라스틱 덮개가 달린 눈, 특수 치아, 강철 칼날이 장착된 손톱을 가질 수도 있고 부자라면 DNA를 수시로 재배열하여 긴 젊음을 누리기도 한다. 그도 저도 안 되면 냉동 인간이나 복제 인간을 선택하기도 한다. 육체는 고깃덩어리다. 그러나 호모 데우스 수준에 육박한 이들이 원하는 세상은 현실이 아닌 프로그램 세상이다. 이곳이야말로 매트릭스 내부. 그들은 기꺼이 데이터화 된 가상현실의 좌표로 존재하려 한다.

인물들은 영원한 삶을 꿈꾸지만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염세적이기만 하다. 이곳 사람들도 기억은 제조/복제할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기억보다는 마음이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사이버 펑크의 주인공들 중 인간 자격을 갖춘 이는 몇이나 될까. 깁슨이 이 SF를 쓴 이유를 생각해본다. 이 디스토피아 소설은 역설적이게도 인간다움이 뭔지를 생각하게 한다. 깁슨이 해답은 ‘마음을 지닌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렇게 현란하고 음산한 세계를 구현했다.


이 순간 1 찰나 0.013초가 또 흘렀다. 이 시간은 흩어졌다. 영원히 돌아가지 못한다. 그 한순간이 아쉬운가? 그렇지도 않다. 어차피 가버린다. 멈추어 있다고 생각하면 사진처럼 잡혀 있을 것이고 빠르다고 생각하면 급하게 사라져 어느 순간 지상에 흔적도 남기않는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절대 속도는 같지만 심리적으로는 각자 다른 바늘을 갖는다. 생체 시계가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시간을 느리게 인식한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이야깃거리가 많은 긴 역사다. 반대로 노인들은 외부 세계가 급하게 돌아간다고 느낀다. 이들의 시계는 시위를 떠난 활처럼 빨리 달린다.

즐겁게 사는 사람은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생각한다.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날아간다. 시간은 날개 달린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후다닥 가버린다.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 시간은 느림보나 다름없다. 아무리 쉽게 보내려고 해도 시간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시간을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 더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느리게 걷는 자여, 거북이와 코끼리처럼 긴 삶을 축복받았다고 생각하자. 활기와 역동성은 부족해도 그의 생은 길다. 심지어 지루할 정도로.

빨리 가는 것은 빨리 사라지고 느리게 가는 것은 느리게 사라진다. 멈추어 있는 것이 훨씬 더 오래간다. 김아타의 사진에서처럼 오래된 것들은 고요하다. 그들은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적이 흐른다. 우리는 그 앞에 사색하게 된다. 그러나 그 '영원성'은 인간과는 관계없다. 제 스스로 완성되어 있다. 인간은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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