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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6. 2021

젊은 그들

크리스티안 문주 세 편


루마니아 영화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의 영화를 세 편 보았다. 처음에 본 건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 그다음은 ‘신의 소녀들’(2012) 그리고 세 번째가 ‘엘리자의 내일’(2016)이다. 그의 이름 앞에 루마니아라는 국명이 붙는 건 타당하고도 필연적이다. 루마니아 인이기에 이런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을 테니.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두 인물에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억이 새롭다. 1987년, 차우셰스쿠 정권이 몰락하기 전이다.  루마니아는 출산율이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66년의 'Decree 770'. 피임이 제한되었고 낙태도 대부분 금지된다. 영화는 불법 낙태 시술을 받게 된 친구를 돕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태아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째 살고 있다. 핸드 헬드 카메라는 출렁이고 주인공과 관객들도 같이 흔들리며 불안하다. 세상은 악의 가득한 전쟁터. 거리는 삭막하고 여자들은 함부로 내던져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한다. 최대한 건조하고 담담하게.


‘신의 소녀들’에도 두 소녀가 등장한다. 그녀들을 둘러싼 시공간은 제정신이 아님에 분명하다. 어쩌면 주인공 여자애가 미쳤을까? 이곳 수녀원은 '그렇다. 그녀는 악령에 씌었다'라고 주장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시리도록 차가운 이야기다. ‘신의 소녀들’은 반대로 뜨거운 광기의 세계를 들춘다. 체제가 유지되려면 그 철학이나 이데올로기 자체가 숭배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 가치를 흔들 가능성을 품은 자는 도려내거나 교화되어야 한다. 이런 일은 ‘1984’의 빅브라더가 다. 전체주의 사회는 일탈이 개인의 사소한 감정에서 싹튼다는 걸 안다. 원제가 ‘Beyond the Hills’다. 대체 저 언덕 너머 무엇이 있다는 걸까. 그곳에 유토피아라도 있다는 걸까? 문주 감독은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함부로 유예시키는 체제를 강렬하게 비판한다.

루마니아 출신 헤르타 뮐러는 200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인터뷰(중앙일보. 2009.11.10) 기사를 보면 차우셰스쿠 시대의 실상을 조금은 알 수 있다. '숨그네'의 초현실적인 공포가 그녀에게는 현실이었던 셈이다. 당시 헤르타 뮐러는 언제든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 심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단지 언어만의 그녀의 구세주였으리라. 편집광적인 중독의 증후.

“나는 끔찍하도록 가난하고 외진 마을에서 왔다. 기본적 문명조차 누릴 수 없을 때 사람은 본능과 단순한 습관에 의지해 산다. 난 잡지 속에서 흥미 있는 단어들을 가위로 오려내 책상 위에 진열해 놓고 그 낱말들을 사용해 문장을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각각 다른 잡지와 신문들에서 잘라낸 언어들은 활자의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달랐다. 언어들은 그렇게 잘려 나온 채 마치 역의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날 기다리고 있었다. 서독으로 망명할 때 난 그 낱말 상자와 머릿속에 저장된 악몽을 휴대하고 왔다. 언어와 나의 이 결탁은 거의 중독 수준이다. 언어는 누구의 손에 잡혀 사용되느냐가 문제다. 언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언어는 선과 악 두 진영에서 모두 사용되면서 역사를 만들어간다.”

루마니아, 발칸의 작은 나라는 세계사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고 미디어에도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1989년 차우셰스쿠의 실각과 처형으로 잠시 그 이름이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그래, 잘 살고들 있겠지. 그런 독재자를 끌어내린 사람들이니 오죽 잘해 나가고 있을까.

그런데 이 나라는 그 후에도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ever after는 어디건 드물다. 차우셰스쿠를 몰아내고 민주 공화국을 만든 전설도 희미해진 모양이다. 적어도 크리스티안 문주의 영화들을 보면 그렇다. 흠, 그래서 루마니아는 특수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이다. 어디든 다르면서도 같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다.

여기, 오래도록 갈망한 자유와 민주화를 마침내 얻어낸 사람들의 후속 편이 있다. 왕자님과 결혼한 백설공주나 100년간 잠만 자던 숲 속의 미녀는 그다음 어떻게 되었더라. 관객은 ‘엘리자의 내일’에서 그 깊은 환멸,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을 확인한다.

지적이며 성실한 의사, 로메로는 삶에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예전에는 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거라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앞날에 대한 기대도 없이 하루하루를 영위한다. 딸 엘리자만이 그의 전부, 삶의 근거 심지어 존재의 이유이다. 우등생 딸은 졸업 시험만 잘 보면 영국 유수의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자격을 따 놓은 상태. 딸만은 이 지옥을 탈출해 제대로 살게 하고 싶다.

그런데 이 딸에게 문제가 생겼다. 시험 전 날 폭행 사건이 있었고 딸은 다음날 있는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 난제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한다. 이 문제에 대한 로메로의 답은 부패와의 타협이다.

로메로는 양심적이었다. 한때 민주투사였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젊은 시절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동지였던 아내와는 겉으로만 부부관계를 유지한다. 더 이상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 아들을 둔 여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으며 그녀는 로메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결과는 때로 과정보다 소중하다’. 그는 딸에게 기성세대의 닳고 닳은 가치관을 읊어댄다. 수십 년간 소중하게 품어온 양심, 동력이었던 그 신념도 포기하려 한다. 딸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사소한 과정상의 오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짐한다. 심지어 아이에게 파렴치 행위를 강요하기까지 한다.


어디선가 많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다. 우리도 비슷한  시절을 겪었다. 그 후유증으로 관료들의 부패, 그로 인한 집단 피로, 무관심, 신경증에도 익숙하다. 적당한 뇌물, 눈가림, 협잡, 봐주기 등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식의 성공을 지상 목표로 삼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불운으로 두려워진다. 갑자기 유리가 깨지고 돌이 날아오며 자신이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남만 탓할 일은 아니다. 어느 순간 나도 남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뻔뻔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다. 자기 철학을 되물을 공포가 찾아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존이 목표다. 그다음은 될 대로 되라지. 자신이 비난했던 사람들을 되풀이한다.

애인의 아들은 어린 소년이다.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돌을 던졌다. 상대방 아이가 차례를 지키지 않자 분노한 소년이 선택한 반응이다. “왜 던졌니?”라는 물음에 소년은 “그럼 어떻게 해요?”라고 대답한다. 정의가 없는 곳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아이도 부모도 답을 모른다. 로메로는 이미 규칙을 어겼다. 줄 서기를 하지 않았고 청탁을 했다. 자신이 그렇게 저주했던 타인들의 행위를 반복한다.

엘리자는 고등학교 졸업 사진에서 환하게 웃는다. 단체 사진 속 스무 살 청년들은 모두 푸른 하늘처럼 밝다. 그들의 20년 후, 크리스티안 문주는 또 비관적인 답을 할까? 사람들은 체제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개인으로서는 이 거대한 악을 상대할 힘이 부족하다. 그래서일까. 구성원 각자는 식초와 설탕물을 쪽 빨아들여 더 이상 삼투압의 여력도 사라진 단무지 상태가 되어버렸다. 슬프게도 기성세대의 에너지 교환 능력은 사라졌다. 왕년의 가해자들과 같은 패거리가 되었다.

로메로가 할 일은 없었을까. 불법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딸의 입학 자격은 취소될 수 있다. 그러나 엘리자는 생각보다 똑똑하다. 무엇보다도 타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권유대로 부정을 저지르지도 시험을 못 보지도 않았다. 루마니아든 영국이든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싶다. 그것이 젊음의 힘이고 미래의 희망이다. 로메로는 이미 비관에 젖은 패배주의자이므로 청춘의 순수와 열정을 믿지 못한다. 또한 그는 아내를 배신할 만큼 절망적이다. 그는 부정을 행하고 권유한다. 윤리적으로 무너졌다. 늘 사회가 악의 주체이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지키고 보호할 것도 있다. 그는 그것을 포기하고 방치하며 상황을 증오하기만 했다.

감독은 로메로의 도덕적 타락을 우려한다.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것도 부정하는 이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 이런 면에서 크리스티안 문주가 역설적으로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건강한 정신으로 회복하고 싶은 거다. 그래서 세대는 자연스럽게 바뀌어야 한다. 세상은 늘 새로운 에너지를 기다린다. 엘리자와 친구들은 아예 차우셰스쿠 없이 출발한다. 무심하게 언덕을 넘는다. 절망의 기억이 없다. 

청년들은 세상의 순수를 담아 빛난다. 그래서 세상은 무한반복에도 지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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