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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6. 2021

당신들은 속았다

조르주 페렉, 어느 미술가의 방



E 매장에서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백화점에서도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일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럽다. 현대 미술은 중요한 눈요깃거리다. 그것은 돈이 어우러져야 가능한 영역이다. 상품이든, 미술품이든 작품은 손님을 부르고 손님은 구매로 화답한다.

미술이란 문화사업이며 동시에 사치의 영역이다. 작가나 콜렉터 중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확고하게 부정할 이는 많지 않다.

피노, 사치, 로레알 등은 세계적인 콜렉터이고 세계 미술시장의 방향을 좌지우지한다. 리움은 삼성에서 운영한다. 현대, 금호, 대림, 한솔 등의 재벌 그룸도 굵직한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소유하고 있다. 여러 기업의 오너나 배우자가 미술 관련 재단을 소유하고 있다.

자본은 문화산업의 필요조건이다. 그 많은 콘서트, 전시회, 각종 공연도 재벌기업의 후원이 없다면 어림이나 있으려나. 영재 발굴이나 후원 역시 그들 아니면 꽃도 피기 전에 져버릴 확률이 높다.

설치작품들, 끝없이 이어지는 프레임의 행렬들. 이들 중 어떤 작품은 누군가의 가슴을 울려 공간에 놓일 자격을 얻는다. 그러나 소유하려면 돈이 든다. 먹고사는 것과는 조금도 관계 없는 미술 작품들, 어쩌면 가치가 전무해서 오히려 더 아름다운 것들. 돈만 있으면 가질 수 있다. 그가 누구든, 안목이 있든 없든 돈을 내면 내 것이 된다. 영원히 공개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보관할 수도 있다. 심지어 어떤 일본 기업가는 수집한 고가의 인상주의 작품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공개하기도 했다. 예술은 감정의 승화라고 했던가.

미술은 투자, 투기의 대상이기도 하다. 나중에 판매하면 이윤을 남길 수도 있는 귀중한 재산이다. 예술품을 사고파는 일은 교양인 그룹으로의 편입을 꿈꾸게도 한다.

그래서 작품들을 백화점에 전시하는 일도 자연스럽고 잘 어울리기까지 한다. 작가들은 선택되어 영광스럽고 관객들은 쇼핑하면서 전시공간도 돌아보아 편리하다. 일상과 예술의 어울림이라는 토털 아트라는 말도 있다. 멋진 공간에 예술품과 가구와 그릇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배치된다. 그곳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제일 높은 영광의 자리에는 핸드백, 옷, 신발 등으로 위장한 황금 우상이 앉아있다. 한때는 필수품이었으나 이제는 예술 작품과 구별이 되지 않는 물건들이다. 상품이자 예술품이다. 아우라는 숭배자가 많을수록 번득인다.

자본의 위상 앞에서는 누구든 당당하지  못하다. 부자들은 근면하고 성실하며 도덕적 가치관을 체화해 승리했노라고, 적어도 그들은 그런 철학을 실천한 조상을 두었노라고.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다. 부자들은 세계를 돈의 휘하에 둔다. 자신들의 승리를 공고히 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만들어 나간다.

허구는 때로 진실하다. 지나가는 순간 사라질지언정 눈앞에 보이는 건 가짜가 아니다. 그들은 현실을 일깨운다. 그 진짜를 만나기 위해 위조와 모사로 들어간다. 예술의 세계가 아닌가. 이를 그려낸 허구의 세계를 만나보자.

조르주 페렉의 ‘어느 미술가의 방’(1979)에는 대단한 사기꾼이 나온다. 소설에서 만난 최고의 도둑으로 꼽고 싶다. 도둑들의 도둑. 그의 이름은 헤르만 라프케. 아모리쇼가 있었던 1910년다. 이 때만  해도 협잡꾼들이 솜씨를 펼칠 수 있었던 순진한 시절이다. 그 무렵 미국 사람들은 유럽 예술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라프케는 평론가들이 선동하고 헛소문이 뒷받침되면 돈과 명성이 뒤따를 여지가 농후한 미술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직 미술에 대해 해박하지 못했던 시대이니 이런 자도 힘을 쓸 수 있었다.

라프케는 과거  유럽 여행에서 구매한 그림의 대다수가 가짜였다는 걸 알게 된다. 분노한 이 남자는 미술계에 복수하리라 다짐한다. 그는 쿤스트캄머라고 불리는 장르화 ‘예술 수집가의 방’을 제작하게 한다. 자신이 컬렉션한 작품들을 모아둔 방이 대상이다. 노박이라는 평론가는 이방에 전시된 각 작품의 이력, 프로브낭스(provenance)를 추적해 입증한다. 예를 들어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서 기술한 조르지오네의 유실된 작품과 라프케의 컬렉션이 유사한 점을 학술적으로 추정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는 기술이다.

모든 일은 라프케의 계획대로 움직인다. 이 부유한 남자는 수하인들용해 사실을 조작한다. 그는 자서전에서 가짜리스트를 진짜인 것처럼 꾸며 출간한다. 고용된 화가는 라프케의 목록대로 가짜 명화들을 제작한다. 라프케는 그 위조품들을 걸어 놓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화가는 이 모습을 그려서 ‘예술 수집가의 방’이라는 거대한 그림 속 그림을 완성한다. 노박은 이 회화 작품에 등장하는 개별 작품들을 고증하여 관객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거짓이 명성을, 곧이어 영원성을 얻는 방식이다.

그 사이 도둑들의 지휘자, 라프케가 사망한다. 그의 무덤은 쿤스트캄머를 닮았다. 그는 무덤 벽에 전신 자화상을 설치한다. 그 자화상은 ‘예술 수집가의 방’을 바라본다. 위조품, 모조품에 감격한 콜렉터들이나 전문가들을 비웃는다. 가짜 보물을 경배하는 세상을 조소하며 그의 지하 묘소는 봉인된다. 그동안 위조된 작품들은 경매를 거쳐 각국의 저명한 인물들, 미술관, 성당, 재단, 협회에 팔려나간다. 구매자들은 나중에야 완전히 속았음을 안다. 부끄러운 일이다. 감추자. 그들은 그 사실을 영원히 감춘다.

그런 사이비 전문가들이 모여 오늘의 예술을 만들었다고? 관객은 이렇듯 주류가 이끄는 대로 영혼도 없이 움직이는 존재일까. 돈과 소문에만 흔들리는.

돈은 부자를 일반인과 구별 짓는다. 그래서 E는 비싸다. 공유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소수와는 공유해야 한다. 그 물건이 보통 비싼 게 아니라는 소문, 큰 부자들만 살 수 있다는 그 소문이 필요하다.


그 매장에서 전시하는 작가들은 머지않아 유명세를 얻는다고 한다. 부자들의 안목에 어울리는 예술가, 그들이 투자하고 장식할 만한 작가들이라는 보증 수표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비-부자들도 따라가게 되어 있다. 문화 사업은 부유한 이들과 그들의 군단이 이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

예술가들은 배가 고파야 하나? 선뜻 답할 수는 없다. 한때 예술가이면서 부자라는 건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예술가를 갈구하는 이, 저주받은 천사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음이 가난해야 끝없이 구한다고 생각한다. 배부른 이가 되면 무엇을 갈구하게 될까. 21세기니까 다를 수도 있겠다. 직업 예술인으로서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소명 의식을 가진 이도 있을 게다.

데미안 허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드레이 구르스키, 네오 라우흐, 무라카미 다카시, 위에민준이나 차이꿔창과 같은 이들은 성공한 예술가들이지만 여전히 목이 마르다. 아니, 처음과 지금을 비교할 수 없기에 경중을 알 수는 없다. 작가 자신은 알겠지. 어쩌면 돈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을 퍼 올리려면 거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표출된 에너지에 압도된다. 이것이 과거의 공식이었다.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가, 갈망, 가난한 마음, 욕망과 분노의 표출. 역시 돈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자본주의라는 이 제도가 무섭다. 순수의 세계까지도 돈으로 환산하려는 버릇을 주입시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숭고하고 진실한 예술을 꿈꾸어왔다. 과거에도, 심지어 현재까지도 그렇다. 이 세상에 순수가 남아 있으려나. 그곳을 찾아다닐 만큼의 적극적인 태도나 역량도 부족하면서도 막연히 기대한다. 저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을 거라는. 우리는 누군가가 만든 멋진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그 가치라는 게 조작되고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기에 타락하기도 쉽다. 그래서 라프케는 허구의 묘지 안에서도 외친다. '당신들은 속았다, 속는다. 속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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