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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6. 2021

악녀 열전

맥베스부인, 테레즈 라캥, 테레즈 데케루

성자나 악당은 드물다. 스펙트럼의 양극단이다. 보통 사람들은 보다 평이하고 안전한 권역에 위치한다. 성자들은 일정한 풍습, 종교, 이념이 요구하는 윤리 기준이나 틀을 만족시켜야 한다. 반면 악한 자들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보편타당하다. 유명한 악인들은 예나 지금도 거의 같은 평가를 받지 않을까. 그러나 돌아보고 생각해 보련다. 19세기 소설에 등장하는 세 여자, 카타리나 이즈마일로바, 테레즈 라캥, 테레즈 데케루를 보기로 들겠다. 셋 모두 남편 살해, 혹은 살해 시도를 한 문제의 인물들이다. 혹시 어떤 피치 못한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닌지 궁금하다. 또 만일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면 그들을 무조건 단죄해야 하는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865)으로 시작해보자. 한국에서는 러시아 므첸스크라는 지명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으로 출판되었다. 이 중편에 맥베스의 아내라도 등장하는가 짐작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주인공 이름이 카타리나 이즈마일로바였으니까. 작가 입장에서 맥베스 부인이 악녀이자 살인마의 대명사로 여겨져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독자들은 캐릭터를 짐작하고 읽기를 시작할 수 있다.


맥베스 부인은 욕망의 대명사. 남편에게 살인을 부추기는 인물이다. 과거 대부분 작품에서 여자들의 성격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었다. 그게 일반 여자들에게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레이디 맥베스는 감히 다른 일을 벌인다. 여자도 탐욕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끔찍한 범죄도 교사할 수 있다는. 이런 면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그리스 비극의 메데이아처럼 잔인한 여성 캐릭터의 원형적 인물이다.


연극 연출가 한태숙이 창극 버전으로 만든 ‘레이디 맥베스’를 본 적이 있다. 이 인물의 존재감이 워낙 크다 보니 멕베스가 아닌 그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바꾼 것이다. 남편은 자기의 힘으로는 일인자가 되지 못한다. 그럴 능력도, 야심도 없었다. 진짜 권력자는 막간에서 조종하는 그의 아내다. 던컨 왕을 죽이라는 아내의 명령에 남편은 마지못해 복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상징한다. 그녀가 몇 세기 후에 태어났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남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권력자가 되려 했을 것이다. 그녀의 탐욕은 거대하다. 남편일지라도 장애물로 여긴다면 다음의 세 여자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소설 속 카타리나는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감추기는커녕 지나치게 능동적, 적극적이다. 물론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무려 세 명이나 죽여 유형을 떠나는데 시베리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연적과 동반 자살로 막을 내림으로써 자신을 포함 총 다섯 명의 죽음과 관련짓는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욕망, 열정 등이 레스코프로 하여금 맥베스 부인을 제목으로 소환했을 것이다.


19세기의 가부장적 전통 사회에서도 이런 여자가 존재했을까 의심스럽다. 그러나 카타리나 이즈마일로바의 이야기는 실제 사건에서 비롯한다. 레스코프가 살던 지역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사건 이었다고 하니 실존 인물이 엄연히 있었다는 뜻이다. 그녀 역시 젊은 미녀였는데 시아버지 귀에 끓는 납을 부어 살해한 죄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1934년 레스코프의 원작을 기반으로 동명의 오페라를 작곡하고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는 무슨 마음으로 이런 사람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형상화했을까. 변혁의 시대를 사는 예술가가 정치적 에로스나 본능, 충동 등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덕에 레스코프의 중편을 만났다. 강렬한 체취가 물씬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서 남녀가 바뀐 버전 아닌가. 이번에는 로고진이 나스타샤 필리포브나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나스타샤 필리포브나가 로고진을 죽이고 싶도록 열망하다가 스스로를 불태우는 이야기다. 새 시대의 새 여성이다.


레스코프의 중편은 윌리암 올드로이드의 ‘레이디 맥베스’(2016)로 영화화되었다. 아쉽게도 이 영화는 그녀의 열정을 반만 보여주고 끝난다. 카타리나는 돈 때문에 늙은 남자와 결혼한다. 애정 없는 결혼 후에 남는 건 권태. 그녀는 애인 세르게이와 공모해 시아버지, 남편, 상속인 소년을 죽인다. 그러나 범행이 들통나자 세르게이와 하녀에게 누명을 씌워 처벌을 받게 한다. 그녀는 시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안주인이 된다. 끝. 흐흠, 이 정도로는 러시아식이라고 할 수 없다. 영화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재산이 탐나 주변 사람들을 모두 없애버린 게 된다.


레스코프의 원작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돈이나 상속 이런 것과 무관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정열을 태울 대상이다. 어쩌면 열정 그 자체가 핵심인지도 모른다. 카타리나는 ‘백치’의 로고진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미트리를 닮았다. 영화는 러시아식 극단 성향을 드러내지 못했다. 러시아 여인의 무모함을 끝까지 보여주기에는 영화가 너무 점잖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1867)에도 유명한 여자가 나온다. 작가인 에밀 졸라는 이 소설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테레즈 라캥'에서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이 책 전체는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 나는 자유 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에밀 졸라에 의하면 ‘테레즈 라캥’이라는 난폭한 드라마는 실험소설이다. 어떤 기질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 또 다른 성향의 소유자를 만나 상호작용을 하면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물론 19세기 말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라는 환경요소가 필요하다. 작가는 일종의 과학 분석을 시도한 셈이다. 테레즈는 우울한 성향으로 지배력이 강한 시어머니, 냉담하고 이기적인 남편 아래서 시들어가는 중이다. 이런 여자가 낙천적이고 활발한 남자를 만났다. 둘은 불꽃을 튀기며 사랑에 빠진다. 그다음에는 어떤 스토리가 전개될까.


남편 카미유의 친구 화가 로랑은 테레즈에게 모델이 되어주길 부탁한다. 그 후 모델과 화가는 격정적 관계에 휩싸이고 남편은 방해물에 불과하다. 테레즈와 로랑은 밀회에의 불안과 앞날에의 흥분으로 카미유를 살해하는데 그다음부터가 문제. 일이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두 남녀에게도 양심이란 게 있어 수시로 귀신을 보고 악몽에도 시달린다. 극도의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힌 테레즈와 로랑은 라캥 부인 앞에서도 서로에 대한 악다구니를 멈추지 않는다. 라캥 부인은 아들의 죽음 이후 뇌졸중으로 눈과 귀를 제외한 모든 감각을 잃었으므로 비밀을 알아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증오에 휩싸인 두 남녀는 상대를 죽이려 한다. 남자는 독극물을, 여자는 칼을 움켜쥔다.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린 두 사람은 독약을 나누어 마시고 라캥 부인 앞에서 자살한다. 부인만이 두 남녀의 기증스러은 전말을 꿰뚫어 본다. 그러나 사건의 인과관계는 영원히 비밀에 묻힐 것이다. 시어머니는 유구무언 그 자체이므로.


테레즈는 내성적이며 섬세하다. 남매나 다름없이 자란 카미유와 애정이나 기대 없이 결혼한다. 시어머니는 위압적이고 아들은 의존적인 응석받이다. 마마보이를 사랑할 여자가 있으려나. 19세기를 사는 가난한 고아 테레즈는 어떤 삶을 택해야 했을까. 이런 소녀에게 인생을 선택하는 일이 가당키나 할까. 직업을 가져 자립하라고, 혹은 두 모자를 현명하게 리드하라고 권고하기 쉽지 않다. 그녀는 제 한 몸도 추스르기 어렵도록 내성적이고 예민하다.


테레즈 데케루’(1927)의 주인공도 남편 살해를 시도한다.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명망 있는 부르주아 가문의 한 여자가 비소를 이용해 서서히 남편을 독살하려 한 실화를 알게 된다. 그는 이 사건을 모티프 삼아 테레즈 데케루라는 인물을 창조한다.


테레즈지역 유지이자 부유한 가문의 상속자와 결혼한다. 그런데 행복의 정점에 오른 것 같은 젊은 여인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남편을 살해하려 했다. 결혼 전에는 주위로부터 꽤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던 테레즈다. 무엇이 지적인 여성을 진혹한 범죄로 몰아갔을까. 작가는 작품을 통해 시대와 상황 등의 불합리한 점을 해부해 인물이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데에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음을 밝히려 한다.


20세기 초만 해도 여자들은 자유 의지나 개성 심지어 인격도 존중받지 못했다. 한국이 아니고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 여자들 이야기다. 종교, 계층이 한 덩어리가 되어 여자들에게 의무와 복종을 요구했으니 이들에게는 사회 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질곡이다. 아무리 독립적인 여자라도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한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곤 했다. 종교나 지역색이 강한 지역에서 성장한 여성이 당시 관습대로 전통적 아내의 삶에 진입하는 건 당연하다. 주변 모두가 기대하는 일이며 심지어 본인도 마땅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테레즈 데케루는 적당하게 안주하는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책 읽는 여자, 생각이 복잡한 여자다. 테레즈 데케루는 이런 면에서 위의 두 여자들과 좀 다르다. 그녀는 애인 때문에 범행을 시도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카타리나 이즈마일로바, 테레즈 라캥 등과 달리 불륜을 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애인이라고 부르고 싶은 남자가 있기는 하다. 육체는 지워진 채, 정신만 남은 자유인, 장 아제바도. 그가 상징하는 건 속박에의 거부, 울타리를 뛰어넘는 비상이다. 쾌락주의자, 에피큐로스, 그 남자처럼 살리라. 그러나 그를 만나지는 않으련다. 그의 정신이 소중할 뿐이다.


아내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 걸 아는 남편의 심정은 비참하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이 집안이 워낙 상류층이라 스캔들이 두렵다. 교도소 행이나 이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쪽 집안의 체면과 명예가 먼저다. 그들은 차라리 그녀를 유폐시키는 편을 택한다. 서서히 고사시키는 전략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남편은 아내를 포기한다. 이런 '미친 여자'와는 대외적인 집안 행사 때나 가끔 만나기로 합의한다. 테레즈 데케루는 드디어 울타리를 벗어났다. 자유는 소중하다. 실실 웃으며 혼자임을 맘껏 즐기리라. 고독이 뒤따르겠으나 그것도 달콤하리라.


테레즈는 술을 조금 마셨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녀는 행복한 사람처럼 혼자 웃었다. 그녀는 정성스럽게 분을 바르고 립스틱을 칠했다. 그러고는 길가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세 여자의 이야기는 위험하다. 한꺼번에 쓰다 보니 시너지가 더 커진다는 걸 느낀다. 이들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자극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지금에 와서는 그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들보다 훨씬 큰 자유를 부여받아 태어났고 또 살아가기 때문이다. 결핍된 채로 삶을 시작하는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여자들이 현실에 순응하길 바란 건 당시 주류층의 환상이요, 미신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녀들도 요즘 여자들만큼이나 드세고 사납다. 또 영리하고 교활하다. 강요와 구속이 지나치면 참기 어렵다. 여자들에 약간의 자유라도 허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성들의 희생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린이, 장애를 가진 이, 권력에서 밀린 남자와 같은 소수자도 도구 역할을 강요받았다. 강자들은 이런 약자들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경우 자신들이 신봉하는 주류 사회가 무너진다고 여겼다. 약육강식의 논리다.


악인도 자기식의 논리와 항변이 있다. 문학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작고 비루한 사람들에게도 이 정도는 허용되어야 한다. 기질이나 시대 환경 등을 고려해보면 누구든 애처로워 동정이 간다. 이 세계에서만은 악당도 악녀도 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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