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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6. 2021

구닥다리를 원한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얇은 소설이 감동적이다. 오랜만이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페이소스인지. 이런 류의 감동은 주로 20세기 작품으로부터 나온다. 깊은 고난, 고통을 겪은 시대의 작가들은 전달하는 방법이 남다르다. 미련하도록 과거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아닌가. 그 시절에의 기억이나 정서를 공유한 독자 역시 되새기고 곱씹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이런 우수는 새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낯설다. 누군가에게 이 작품은 낡아 보인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을 들여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 지난 시간이 황폐한 유물로 희미해져 간다.

이 소설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은 체코 출신이다. 여러 하층 직업을 전전한 끝에 작가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쓰라린 경험담이 녹아있을 것이다. 그는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 슬픈 왕의 소설에 그저 비장미가 흐른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는 세상을 환상적, 풍자적으로 또 괴기스럽게 표현한다. 그동안 읽어온 체코 작가 프란츠 카프카, 카를 차페크, 밀로시 우르반 등도 흐라발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들의 작품은 고딕의 향기와 블랙코미디가 어우러져 슬프고 무섭고 아픈 감동을 끌어낸다.

저자는 독자와 공감해야 한다. 그래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작가나 주인공이 더 쓸쓸하게 보인다. 그들은 현대로부터 소외되며 황급히 멀어진다. 아니, 우리가 지나치게 속도를 내어 달려가는 탓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참 아름답구나. 좁은 지하세계에서 하찮은 작업만 하다 죽은 한 인물의 삶이 장엄하도록 빛난다. 최선을 다해 뭔가를 지켜내려 한 지난 세기의 모든 열망과 순수를 기억한다. 어리석도록 한 마음으로 추구했다. 그 믿음이 그를 저버렸어도 계속 나아간다. 죽음도 그를 막지 못했다. 죽음을 지나쳐서 나아간다.

한탸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 새로움을 거부하고 구시대의 미와  질서에 집착한다. 돈을 벌어서 삶을 개선해야겠다는 의지도 없다. 오히려 바꾸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렬하다. 그는 늘 하던 대로 낡은 기계를 써서 폐지를 압축한다. 이런 업종은 종사자를 궁핍하게 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든다. 이 직업은 한탸에게 술과 집세 그리고 약간의 빵만은 제공한다. 위생적인 삶, 더 나은 집, 괜찮은 사람들과의 사교는 리스트에서 끝난 지 오래다. 좁고 더러운 지하실과 동료도 없는 쓰레기 더미가 그를 둘러싼다.

한탸에게는 지상의 땅 한 뼘 주어지지 않는다. 허우적거리며 현실에 접근할 때마다 늪에 빠진다. 단단한 땅은 그의 몫이 아니다. 눈앞의 환상을 보고 달려가지만 발밑은 시궁창이다. 부패, 탐욕, 무능, 부조리, 가난을 참기 힘들다. 그래서 지상에 머물지 못하고 지하 세계로 숨어든다.

물론 그곳이라고 쉽지는 않다. 지하실은 이미 원주민 생쥐들의 서식처이다. 그들은 한동안 들끓다가 폐지와 함께 압축되어 몇 마리로 줄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다산성을 누가 막으랴. 지하실은 쥐들의 낙원이다. 한탸는 고작 쥐들과 라이벌이다.

이 끔찍한 지옥도 가끔은 유토피아가 된다. 오스트리아 왕실 도서관에서도 전시되었을 금박의 테를 두른 책들이 폐기되어 지하에 도착할 때이다. 그때마다 햔타는 책이 선사하는 신성한 세계를 만난다. 체코는 한 때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원이었다가 지금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흡수되어 있다. 당연히 과거 서적들은 반동적이며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마땅히 쓰레기로 처리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책들은 압축되어 폐지 공장에 넘어갈 운명이다. 그러나 그들이 품고 있는 건 지상도, 지하도 아닌 천상의 보배다. 지하실 남자는 이 천상의 보물과 산다. 35년간 3톤이 넘는 폐지를 압축하다 보니 온갖 책을 읽는 부작용을 겪은 결과다. 칸트, 괴테, 헤겔, 니체, 노자와 같은 위대한 영혼과도 만난다. 괴이한 냄새를 풍기는 누추한 남자이지만 머릿속은 보물로 가득하다. 그는 ‘행복한 불행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정의한다. 그렇다. 길고 긴 과거라는 시간을 머릿속에 품은 남자는 불행한데 행복함에 틀림없다.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삶이다. 현실과 머릿속이 이렇게 분리되어 있다니 씁쓸한 일이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자신을 잊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더군다나 자기의 처지가 똥이고 진흙이니 어떻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걸 잊기 위해서는 도피처, 책이 필요하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해할 만하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 중 현실에 만족하는 이는 많지 않으리. 현실은 대부분 폐쇄적이고 종말론적이다.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책은 독자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평행 이론대로 다른 세상이 있다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 초자연적인 일을 독서가 해낸다. 독서는 완벽한 이탈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면에서 책 읽기는 다른 삶의 증거이다. 한탸가 독서에 몰입하는 건 선택이 아니고 필연이다.

그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초현실적이다. 일생에 한 번 뿐이었을 상호 교감하는 사랑을 만난 적이 있다. 각각 다른 곳을 보는 것이 아닌 진짜 일치하는 사랑. 그건 좀처럼 있기 어려운 일이지만 외로운 두 사람에게는 가능했다. 꼭 한 번, 연을 날리며 손을 맞잡은 그들 사이에 말이다. 집시 소녀와 한탸는 그렇게 사랑했으니 그녀와의 사랑만큼은 퇴보가 아니었다. 천상으로의 유일무이한 승화. 그러나 집시 소녀는 곧 수용소에서 사망했을 터. 한 번의 승화 이후, 똥 밟은 현실로의 퇴보. 그래서 지하실로 내려가야 한다.

지하실에서도 휴식은 없다. 현대식 공정, 젊은 일꾼들은 낡은 작업장과 나이 든 작업자들을 구석으로 훠이훠이 내몬다. 한탸의 압축기보다 훨씬 빠르고 힘도 좋은 거대한 신식 기계가 등장했다. 신식 압축기 윤전사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불우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젊고 건강한 세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한탸 같은 구세대 인물이 필요 없다고 선언한다. 스토아적 정신 승리마저도 치욕적인 굴욕감을 견디기 어렵다.

그는 지상의 삶에서 쫓겨난 천사 호모 사케르이다. 그 누구도 이 남자를 동정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든 죽어도 된다. 누구도 그를 슬퍼하지 않는다. 울어 줄 사람 하나 없다. 책 읽기는 한탸를 현실적으로 구원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사라져야 한다. 압축기와 함께 지하에서도 은퇴한다. 한 때 종이와 함께 생쥐를 압축하곤 했던 그 기계에 끼어 같이 사라지는 거다. 폐지와 더불어 한 장의 압축지로  적멸, 혹은 영생.

내가 신봉했던 책들의 어느 한 구절도, 내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이 폭풍우와 재난 속으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과거를 담은 책에서 돈이나 명예가 나올 턱이 없다. 수동적인 독서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는 현실 부적응자이고, 책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이다. 둘 다 새 시대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많은 수도사들이 자살을 감행했다고 한다. 그도 제의에 참여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로 한다. 한탸는 사라지길 선택했다. 어쩌면 유일한 행동 아니었을까. 그 나름의 앙가주망. 비유이며 상징이다. 그런데도 가슴을 시리게 하는 연민이 솟는다. 과거, 평화, 부드러움에 대한 노스탤지어이다. 동시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려는 실존의 외침이기도 하다.


책이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체코는 오랜 시절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변방이었다. 1,2차 대전을 겪었고 독일로부터 독립한 즈음 소련 블록으로 흡수되었다. 소비에트연방은 그 후로도 체코를 정치적으로 간섭해 개혁을 억압한다. 당시를 살던 이들은 급변하는 현실에 익숙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든, 산업적, 직업적으로든 오늘의 가치는 어제의 것과 지나치게 다르다. 오스트리아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정신문화의 실종에 절망하여 자살한 것처럼 한탸 역시 같은 길을 원했다.

옛날이라고 다 멋지고 괜찮았던 건 아니다. 미래 또한 비인간적이며 추악한 것이기만 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한탸는 과거의 정신과 함께 소멸할 것에 동의한다. 하늘은 비인간적이며 인간도 비인간적이다. 심지어 글을 읽는 인간도 비인간적일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리라.

내 방에도 책들이 너저분하게 쌓여있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책, 누렇게 되어 찢어지기보다는 부서지는 책, 한 번도 안 읽어본 책, 심지어 낯선 책도 있다. 습기와 오래된 저들을 다 처분하면 이 방도 깨끗할 텐데. 음악도, 책도 전자 문서가 되어간다. 머지않아 ‘블레이드 러너 2049’처럼 홀로그램 파일 속 남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들을 볼지도 모르겠다.

나도 언젠가 LP나 CD를 치우고, 울긋불긋한 책들 하나 없는 깨끗한 서재를 만들어 볼까? 아니다. 그러고 싶지 않다. 그냥 구닥다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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