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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6. 2021

산책하는 자, 자유인

구보씨의 하루


나는 산책을 즐긴다. 야트막한 산길, 들판 걷기를 좋아한다. 발밑에 부드러운 땅을 밟으며 걸으면 왜 그런지 편안해진다. 단순해지기 때문이겠지.

요즘처럼 ‘생각하지 않기’를 신경 쓰며 살았던 적도 없다. 어떤 시인은 경멸하는 것들 중 하나로 ‘상념 없는 산책’을 꼽았다. 산책은 사색에 젖어 묵직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사유에의 몰입도 없이 걷는 건 각성 상태로 사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늘 뭔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산책도 사고 행위 중 하나일 테다.

산책과 사유하면 오래전에 본 이고르 탈란킨의 ‘차이코프스키’(1969)가 떠오른다. 원래 러닝타임 157분인데 한국에서 1989년에 개봉할 때는 40분이나 잘라내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산 영화다. 차이코프스키가 산책하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늘 고뇌에 시달렸을 작곡가는 러시아인 특유의 털모자와 코트를 입고 낙엽 쌓인 숲을 걷는다. 때로는 홀로 생각에 잠겨, 때로는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자작나무 우거진 숲을 걸었다. 경사로 없는 평평한 길. 이곳에서라면 상념에 싸여 걷는 일도 가능하다.

별다를 것도 없는 이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또렷한 이유는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평지 산책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걸으려면 의외로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길의 경사지 않아야 한다. 비탈이 심하면 힘이 들고 호흡이 가빠져 걷기 자체에만 몰두할 가능성이 높다. 사유가 아닌 그 반대, 생각 없음의 경지에 이른다. 한국에는 산지가 많아 평평한 곳은 인구 밀도가 높다. 가뜩이나 좁은 평지이기에 거닐만한 곳은 집, 공장, 길 등으로 개발이 되어야 했다. 자연은 높은 산에 가야 만날 수 있었다. 헉헉. 그건 산책이라기보다는 등산이고 목표는 체력단련이다. 지금처럼 둘레길, 올레길 등의 산책로를 만들고 가꾼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러나 산책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이유에는 무엇보다 걷기를 실용적인 목적에 두는 문화 자체에 있었다. 걷는다는 건 이유가 있어야 했다. 볼일을 보기 위해, 운동을 하기 위해, 학교나 직장에 가기 위해 걸었다. 그냥 무심코 걷는 건 권장 사항이 아니었다.

높은 산에 오르는 건 산책이 아니다. 등산은 운동이다. 산행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올라가야 한다. 이런 걷기는 상념에 젖게 하기는커녕 있던 사유마저 모두 휩쓸어 가버리는 강력한 체력단련다. 루소의 말대로 ‘불규칙적이거나 너무 격렬한 움직임은 우리를 꿈에서 깨어나게 한다.’ 그러니 차이코프스키가 모피 코트를 입고 유유자적 걷는 모습에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도 당연하지 않나. 외국 작가들의 평전을 읽으면 괴로움, 외로움을 달래거나 그저 시간을 보내려고 걷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니체, 소로, 칸트 그리고 루소 등. 그런데 한국에서는 드물었다. 80년 대까지 산책이라는 건 외국 영화나 책을 통해서만 익숙했다.

산책散策이란 한자 뜻으로 보자면 걸음 자체에 집중하는 일이 아니다. 산책이란 ‘방책을 흩뜨리는 행위'다. 아무 생각 없이 휘적휘적 걷는 행위이다. 걸음이나 생각 모두에 집중해서는 산책이라는 본 뜻에 어긋난다. 생각은 들어갔다 나가고 머물렀다 흩어진다. 걸음에도 목적이 없다. 가는 곳도, 닿을 곳도 없다. 우연이나 무의도가 목표라면 목표다. 시인 이병렬은 '사랑은 산책자‘라는 시에서 '새를 참견하는 것/주책없이 경치에 빠지는 것‘과 같은 산책의 한 모습을 포착한다. 산책은 마음의 '산'에서 맛보는 ’ 책‘이다.

그때 도심을 걸어도 되었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걷기가 꼭 볼 일보는 사람의 행위는 아니어도 되었는데 말이다. 한 때 한국의 지상목표는 ’잘 살아보세'였다. 집안에서 뒹굴뒹굴하든 별 볼일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든 비생산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소설책 읽히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거나 마찬가지 맥락이다. 픽션에의 몰입은 허공을 헤엄치는 일이다.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현실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 이들은 몽상에 젖어 머리만 바쁜 자들이다. 발을 땅에 무겁게 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이런 비현실적인 이들을 본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목적 없이 걷는 것, 학습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이것저것 기웃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근대성을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는 포르투나 Fortuna에서 비르투스 Virtus로의 전환이다. 우연보다는 힘과 노력으로 얻는 일에 가치를 부여했다. 행운은 스스로 오지 않고 애써 찾아야만 겨우 보인다고 했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행복을 찾았지만 행복의 그림자는 쉽게 어른거리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안간힘을 다 해야했다. 공동체가 다 같이 협력했다. 나라가 작고 획일적이다 보니 타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도 명령하고 강제하는 일이 많았다. 남들과 같지 않으면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기 일쑤였다. 배회는 불온이다. 산책하는 이들은 인싸가 아닌 아싸일 확률이 높았다.

산책하는 사람을 그린 한국 소설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구보는 무의 도식으로 소일하는 당대 지식인의 전형이다. 외국 유학을 다녀왔으나 직업도, 미래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보니 두통/신경 쇠약/자기 학대에 시달린다. 소설은 구보가 정오에 집을 나와 비오는 새벽 귀가까지의 하루를 그린다. 명색이 소설가이므로 풍속을 취재한다고 여긴다면 '볼 일‘을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930년대 어느 날, 구보는 경성을 산책한다. 그 하루는 당연히 별다를 일이  없다. 그는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가난, 부유함, 여자, 낭만, 사랑, 허울, 치장 등을 평가하고 저울질한다. 주인공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연상한다. 병든 현실을 사는 지식인은 그 앞에 놓인 혼란과 혼돈에 사로잡혀 하루를 배회한다. 이런 점에서 배회는 산책과 비슷하다.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은 무엇이든 잘 돌아보지 않는다. 누가 불러도 유혹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구보는 이 사람도 쳐다보고 저 사람도 바라본다. 소리 나고 냄새나고 번잡한 일에 궁금해한다. 그는 외롭다. 사람이 그립다. 이런 사람이 주변에 호기심을 갖는 건 자연스럽지 않은가. 몇 걸음 걷다 기웃거리곤 또다시 걷는다. 나무도 풀, 건물이나 가로수 그리고 구름을 쳐다보느라 멈춰 서기도 한다. 하늘을 보다가 돌부리에 걸릴 때도 있고 발밑만 보다가 가로막힌 벽에 부딪치기도 한다. 이렇게 구애받지 않고 왼쪽으로 가다가 방향을 돌려 오른쪽으로 다시 어슬렁대는 것도 산책이다.

의욕하자니 힘이 되는 것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방향을 얼버무리는 것(이병렬, 사랑은 산책자 중)

로베르트 발저(1878~1956)는 유명한 산책자 중 하나다. 그는 가난과 외로움의 대명사로 가난한 집안 출신에 학력도 미미하고 평생 제대로 된 직업도 가져보지 못했다. 또 수시로 거주지를 옮겨 친구도 이웃도 없는 고독한 은둔자였다. 처음에는 세상이 그를 소외시켰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유폐되다시피 했다. 그는 가족들이 정신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자기 자신도 정신병 요양원의 장기 입원자였다. 이런 와중에 그가 평생 되풀이하던 일이 바로 산책이다. 거의 국외자로 살았던 작가는 자연 안에서는 왕자처럼 부유하다고 말한다. 발저는 누구보다 불행했지만 산책할 때만큼은 평온을 느꼈다. 그는 겨울 길을 산책하다가 눈 위에서 사망했다.

아침의 꿈과 저녁의 꿈, 빛과 밤. 달, 태양, 그리고 별. 낮의 장밋빛 광선과 밤의 희미한 빛. 시와 분. 한 주와 한 해 전체. 얼마나 자주 나는 내 영혼의 은밀한 벗인 달을 올려다보았던가. 별들은 내 다정한 동료들. 창백하고 차가운 안개의 세상으로 황금의 태양빛이 비쳐들 때, 나는 얼마나 크나큰 기쁨에 떨었던가. 자연은 나의 정원이고 내 열정, 내 사랑이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나에게 속하게 되니, 숲과 들판, 나무와 길들. 하늘을 올려다볼 때, 나는 왕자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 저녁이었다. 나에게 저녁은 동화였고, 천상의 암흑을 가진 밤은 달콤하면서도 불투명한 비밀에 감싸인 마법의 성이었다.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한겨레 출판사, 배수아역)


예전에는 깨어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온전한 사람의 일인 걸로만 여겼다. 각성해야 한다는 말에 이의를 걸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일상에서도 늘 강요되었다. 이제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늘 무언가 생각한다는 건 무거운 일이다. 멍 때리기라는 말도 있다. 불, 물, 구름, 숲 등을 보며 넋을 잃는 상태도 권장된다. 걷는다는 건 멍 때리는 일과 비슷하다. 우리는 반복적, 규칙적인 걸음으로 몰아의 세계로 나아간다. 리베카 솔닛의 통찰대로 '걷기를 통해서 우리는 육체와 세상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육체와 세상 속에 머물 수 있다. 걷기를 통해서 우리는 생각에 완전히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이 달라졌다. 보행 공간이 날로 획장된다. 산책로가 다양해졌고 그 길을 어슬렁대는 이들도 많다. 혼자도 허용되는 시대다. 집단 명령은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있든 없든 개의치 않는다. 생각이 한쪽으로 밀려오고 또 다른 쪽으로 흘러간다. 거부하거나 막지 않는다. 가볍게 걷고 가볍게 생각한다. 물론 묵직한 상념에 젖어 무겁게 걸을 때도 있다. 어떻게 걷든 참 좋구나, 산책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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