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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7. 2021

공중 드로잉

멋진 신세계


몸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이들은 남들보다 빨리 노쇠를 감지하지 않을까. 다른 이들에 비해 탄력 있고 건강한 몸을 갖추고 있어서 세월의 상흔을 오히려 더 예민하게 느낄 것이다. 음악, 미술 문학계의 예술가들에게는 생산물이 있다. 그들이 늙어도 심지어 죽어도 산출해 낸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는다. 무용수들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들이 공중에 그린 드로잉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몸으로 그리는 상념은 곧 지워져 무로 환원한다.

무용수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에 은퇴한다. 사람들은 보통 20대에 가장 멋진 몸을 갖는다. 무용하는 이들이라고 별다르랴. 그들이 그나마 다른 이들에 비해 오래도록 좋은 몸을 가지는 이유는 꾸준한 훈련 덕분이다. 공연 전에는 연습, 공연 후에는 재활 운동을 반복해야 할 테니까.

그들의 공연이 영상물로 남는다고 해도 아카이브로서의 가치이지 관객들과 교감을 위한 것은 아니다. 대중은 무대에서 만나는 신체 그리고 그 순간의 표현에 집중한다. 아마 마사 그레이엄, 이사도라 던컨, 나진스키, 누레예프, 안나 파블로바 등의 이름은 역사적으로만 영원할 것이다. 무용수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찰나의 삶을 살고 또 죽는다.

어느 겨울, 무대 위의 두 무용수 김지영과 김용걸을 바라보았다. 무용수로서 젊지 않은 나이다. 두 사람은 한때 한국 발레계의 간판이라 불렸다. 이제 김용걸은 교수와 안무가, 김지영도 은퇴 후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몸은 생각보다 빨리 나이 들어가니까.

공연은 둘의 파드되로 시작한다. 이날 프로그램은 ‘돈키호테의 파드되-여정-산책’으로 진행되었다. 돈키호테 이 인무가 참 아름다웠다. 아직도 변함없이 완벽한 자태로 역할을 소화해낸다. 저 손길, 눈, 가슴, 허리 라인, 다리, 토우 슈즈를 신은 발등이 꺾인 각도. 눈을 뗄 수 없이 퍼펙트. 여자는 허공을 유영하고 남자는 지그시 받친다. 그녀는 돌고 남자는 컨트롤한다. 그녀는 날아오르고 남자는 꽃을 다루듯 사뿐히 품에 안는다.







오래전 네덜란드 댄스시어터(NDT)Ⅲ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NDT는 3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NDTⅡ은 17세에서 20세까지, NDTⅠ는 40세까지 NDTⅢ는 40대 이상의 무용수로 이루어져 있다. 나이에 의해 댄서들을 나눈 것이 획기적이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졌다. NDTⅢ를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나 같은 관객에게 무용수라는 건 아름다운 몸과 동의어였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들의 축 처진 몸, 사랑스럽지 않은 얼굴, 느린 동작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NDTⅢ의 공연은 인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다. 동화책의 ‘마녀’는 ‘할멈’과 자주 연결된다. 예전부터 ‘늙음’이 ‘추’와 맞물린다는 건 명료한 선언이나 다름없다. 칼로카가티아, 아름다운 건 덕성스럽다는 고대의 사고를 협소하게 해석해왔다. 그렇지만 쭈글쭈글하다는 건 악도 추도 아니고 ‘자연’이다. 원하지 않아도 Ⅰ,Ⅱ가 지나면 누구나 Ⅲ가 된다. 부정할 필요도 없고, 선/악으로 구분해서도 안된다. 젊은 댄서들은 최고의 기량을 뽐내며 역동적인 무대를 선사하지만 NDTⅢ는 그들 자신의 말대로 ‘재미있고, 슬프고, 로맨틱하고, 늙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수성을 지니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점을 표현한다.

그러나 문명은 늙음을 거부한다. 늙었으나 아닌 척하는 것이 오늘의 문화이다. 건강, 미, 젊음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찬양한다. 세상이 허무하고 헛되며 공허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죽고 나면 그뿐이므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젊어야 하고 가능하면 쇠락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에서는 아이들이 인간의 늙은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은 임종을 앞둔 사람들이 머무는 병원에서 죽음 길들이기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죽기 전까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누가 몇 살인지 알 필요도 없고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야만인 보호 구역으로부터 돌아온 린다는 자연인 상태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가난과 고통으로 늙고 찌든 중년 여인의 모습 그대로. 임신한 그녀를 버리고 돌아온 토마스가 예전과 다름없이 날렵한 젊음을 유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늙음은 수치이고 공포이다. 그래서 감춰져야 한다. 이 세계에서는 늙어 죽는 순간까지도 모두 어린 소녀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니 느닷없이 나타난 ‘살이 축 늘어지고 일그러진 늙은 괴물’은 아이들을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죽음도 별일이 아닌 일상이다. 인공 부화기에 태어나 자연 혐오와 문명 찬미만을 배웠으니 죽는 일도 큰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간호사는 린다의 죽음에 ‘울부짖고 소란을 떨어 그들이 지금까지 행한 죽음에 길들이는 훈련을 몽땅 헛수고로 만들고 있는’ 아들 존에게 분노한다. 그녀는 ‘마치 죽음이 어떤 무서운 사건이라도 된다는 듯,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간이 한 명이라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듯’ 아우성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두 무용수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산책’이 특히 와닿았다. 마치 인생의 여정을 빗대고 있는 것만 같다. 오네긴과 타티야나인 것만 같다. 봄의 여신 같은 옷을 입은 김지영이 플록 코트로 멋을 낸 김용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우아하게 걸어 나온다. 푸르고 화창한 날, 저 멋진 두 남녀는 풀꽃의 향긋한 내음에 취해 거닌다. 인생의 어느 봄날, 젊음을 의미하겠지. 누구에게나 있는 좋은 시절이다. 오래도록 지속된다면 얼마나 멋질까. 사랑스럽고 유연하며 아름답고 부드러운 때이므로. 그런데 아쉽게도 이날들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짧은 막간극이다. 은은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산책을 나간 두 사람. 예의 바른 남자가 애인에게 꽃을 꺾어 바친다. 두 무용수의 무대가 감동적이었다.


살아있다면 누구든 오늘도 공중에 드로잉을 한다. 허공에 그은 무수한 데생. 굵은 듯 가늘어지고 도드라지다가 곧 희미해진다. 저 열띤 선들의 향연도 하나 둘 사라지겠지. 연기처럼.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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