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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7. 2021

화해 불가

에드워드 사이드, '만년의 양식'


장-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 부부의 영화 ‘화해 불가’(1965)를 인상적으로 보았다. 세상에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여기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려는 정치인이 있다. 독일인이라면 일차, 이차 대전을 일으킨 선동가들에게 치를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같은 을 되풀이하려는 자가 이웃에 살고 있다면 어떨까. 반복될 오류를 끊어야 한다. 그래서 요한나는 그에게 총을 겨눈다. 과거와의 적당한 화해는 결국 공동체에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 방식이 폭력이라는 점이 문제다.

‘화해 불가’는 하인리히 뵐의 ‘9시 반의 당구’를 번안한 작품이다. 스타라우브/위예 감독은 브레히트의 ‘폭력이 지배하는 곳에는 오직 폭력만이 도움이 된다’라는 문장을 영화의 부제로 사용했다. 하인리히 뵐의 작품을 폭력 미학으로 형상화 했다.      

거시적 차원의 화해나 타협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개인이나 가정 내의 문제도 이불을 덮어 감출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미아 한센 러브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도 과거와의 화해를 거절하는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다. 나탈리는 남편의 불륜을 끝내 용서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도 그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눈감고 받아들인다면 두 사람은 그런대로 부부라는 틀을 유지한 채 노후를 맞이할 수 있다. 이야기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처세를 강요받기도 했다. 그러나 적당하게 타협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 그 결별이 슬프거나 괴로운 일만도 아니다. 나탈리에게는 다가올 나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그녀에게 자유를 선물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다.     

어렸을 때는 해피엔딩 드라마나 동화를 좋아했다. 아이들도 세상이 그렇게 단순 명료하지 않다는 것쯤은 안다. 다만 힘도 경험도 없는 아이들은 권선징악이 명쾌하게 증명받길 바란다. 그런 세상이라면 행복하리라, 정의로우리라 기대한다. 옛이야기의 공주/왕자들도 악당을 만나고 불운을 겪는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고난을 헤치고 나가면 찬란한 해가 뜨는 유토피아에 도착한다. 그 후부터는 만사형통이다. 아무 문제없는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 듯 그건 가짜다. 진짜이기를 바라지만 가짜다. 그토록 사랑했던 왕자와 공주도 살다 보면 불화하기 쉽다. 흐르는 시간 앞에서 영원한 사랑이란 건 우스운 일이다. 타협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과거의 사랑은 전설처럼 허구가 된다.     

관습대로, 상황이 시키는 대로 살면 편안하다. 한 시대가 부과하는 가치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부패의 냄새를 맡고 의식적으로 거부하려는 이들은 삶이 힘겨워진다. 어떤 이들은 시류에 맞서 싸우기도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말년의 양식’에서 ‘시대착오와 예외’라는 방식을 통해 죽음을, 필멸을 거부하는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사이드는 유작 ‘말년의 양식’(2006)에서 ‘가사와 상황을 뛰어넘는 특별하고도 아이러니한 표현성’을 드러내는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사람들은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만들어 가지만 과거를 복사하듯 반복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과거는 늘 저항의 대상이다. 과거는 온갖 문제를 켜켜이 감추고 덮어온 시간의 지층이기 때문이다. 그 문젯거리들은 언제든 교정되고 수정받기 위해 언제든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귀찮은 돌부리를 보지 않은 체한다. 아니면 멀리 돌아가기도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에게 말년은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시간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성숙한 말년이란 세상과 조화하고 화해하며 갈등을 일으키던 것들도 포용하는 관대함을 뜻한다. 그러나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한 사람의 최고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종합과 타협에 이르는 삶이 반드시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말년의 양식에 대해서'라는 책에서의 ‘말년’은 시대의 소음에 굴복하지 않고 모순과 부조화를 드러낸 채 현실과 대결하는 화해 불가를 드러내는 시간이다. 그것은 자신의 절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다음에 다가올 퇴보를 극복하고자 안간힘을 다해 전진하는 삶의 자세와 관련이 있다. 그때 드러내는 양식은 비관적이지도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닌 미래를 위한 자리이다.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이다.      

말년의 양식은 현재 속에 거주하지만 묘하게 현재에서 벗어나 있다. 오직 몇몇 예술가들과 사상가들만이 자신의 전문가적 기술 역시 노화된다는 것을 인식할 만큼 여기에 주목하며 약해져 가는 감각과 기억을 동원하여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 소개된 ‘말년의 인물’들은 자신의 시대와 격렬하게 충돌하고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일관성 있는 양식을 만든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말년의 양식에 대하여’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모차르트, 글렌 굴드, 장 주네, 람페두사, 비스콘티, 토마스 만과 같은 예술가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예로 들며 이들이 종국까지 멈추지 않았던 저항으로서의 예술을 소개한다.


 그중 람페두사(1958)/비스콘티(1963)의 ‘표범’이나 토마스 만(1912)/비스콘티(1971)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통해 ‘말년의 양식’이라는 의미에 대해 되짚어 본다.  

비스콘티는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소설 ‘표범’을 영화화했다. 비스콘티는 네오리얼리즘 계열 감독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후일에는 급회전한다. 대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상류층 사람들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다룬다. 마르셀 프루스트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만큼이나 데카당스하고 멜랑콜리하다. ‘센소’, ‘희미한 곰별자리’, ‘베니스에서의 죽음’도 그렇지만  ‘표범’도 그들에 못지않다.      





영화는 러닝타임 세 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람페두사의 회한을 비스콘티가 이어받아 고백하듯 펼쳐낸다. 그 두 예술가는 자신들이 속했던 고귀한 사람들의 몰락을 몸으로 감지해왔다. 그들의 작품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고상함, 찬란함에 대한 기억을 환기한다. 시대착오적 판타지로 읽힐 정도이다. ‘표범’의 주인공 돈 파브리치오는 대대로 내려오는 시칠리아 귀족 집안의 후예다. 1860년대,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가속화되던 때이다. 소왕국들이 하나로 통일되면 기존의 지방 귀족들은 허약해진다. 거기다가 당시 유럽 사회는 돈 많은 상공업자들이 한창 성장해가고 있었다.

한때는 표범이었던 파브리치오는 권력으로든, 재력으로든 주류에서 밀려 나가는 중이다. 무도회 장면은 화려함의 과잉으로 악명이 높은데 비스콘티가 여기에 공들인 이유는 치명적인 웅장함과 비극적 퇴락을 드러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추락이 손을 대지 못하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파브리치오 공작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추상적인 활력’이다. 이것이 바로 람페두사와 비스콘티가 표현해내고자 하는 말년의 양식, 즉 내부의 고결함이다. 그런 면에서 공작은 필멸의 존재이지만 동시에 소멸되지 않을 영웅이다. 람페두사/비스콘티의 오만과 자부심이 형상화된 인물이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11)의 주인공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는 작가 토마스 만만큼이나 고독하다. 미적 한계를 맞은 예술가, 아센바흐는 삶에서 떠나 어딘가로 도피하려 한다. 그는 삶의 고행을 짊어진 사람,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성’을 지닌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베니스에서 만난 폴란드 소년 타치오에게 매혹된다. 소년은 먹이를 낚아채는 육식동물의 눈을 지녔다. 소년은 유혹하고 남자는 쫓는다. 작가는 동성애를 이용한 신비 만들기에 성공한다
아센바흐가 사멸의 장소로 베니스를 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곳은 ‘상상력이 빚어낸 가장 푸르른 섬’이며 ‘눈부신 화려함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너절한 쓰레기로 변하는’ 곳이다. 섬은 디오니소스의 광기와 혼란이 가득다. 영광과 타락으로 얼룩진 베니스는 예술가의 마지막 몰락을 장식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이다. 이곳에서 전염병에 걸린 아센바흐는 기괴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는다.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가면서 그는 얕은 바다를 가로질러서 모래톱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서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광활한 바다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좁고 기다랗게 뻗은 모래톱 바닥의 왼쪽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널따랗고 평평한 바닷물로 인해 육지로부터 분리되고 오만한 기분 때문에 친구들과 떨어져서, 혼자 거닐고 있었다. 그것은 고독하고 세상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저 바깥쪽 바닷속을, 바람 속을 걷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아센바흐는 친구와 투닥거리다 화가 난 십 대 소년이 먼 바다를 응시하는 모습을 어렴풋하게 바라본다. 아센바흐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순간에야 찬란한 아폴론을 만난다. 그것은 아센바흐 내부에 있으나 끝내 구현해내지 못한 '미'이다. 그가 죽음이 만연한 베니스에 붙들린 까닭은 디오니소스의 늪에서 건져올린 아름다움의 정수를 발견한 까닭이다. 그는 진흙펄메서 활짝 드러난 꽃을 바라보며 숨을 거둔다.


‘말년의 양식’은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지만 예술성을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들의 운명을 다룬다. 타인과의 불협화음은 갈등 상황을 만든다. 시대 풍조라든가 관습이 자신과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파국을 예견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본다. 섣부른 화해는 치료 없이 상흔을 감추는 미봉책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자신의 의견만 내세워서는 갈등과 소외, 심지어 폭력의 원인이 된다.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그것'을 갖고 있다는 건 존경스러운 일이다. 손 안에 는 것이 있는 이들이다. 사려 깊은 이들이라면  양보하면서도 최후로 남겨둘 보루가 무엇일지 알 것이다.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는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 악장이 자연스럽게 소환된다. 물결처럼  쓸쓸하게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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