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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8. 2021

시간 찾기

마의 산


크로노스는 물리적 절대적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평한 시간이다. 보통은 선형적으로 시간을 인식하므로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에 비해 카이로스는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심리적인 시간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의 리시포스는 카이로스 신의 부조 작품을 제작했다. 그리고 뒷면에는 시인으로 하여금 그 모습을 묘사하게 했다. 질문과 답으로 이루어진 풍자 시를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만물을 지배하는 시간. 내가 벌거벗은 이유는 쉽게 눈에 띄게 함이며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나를 보았을 때 붙잡게 하기 위함이다. 내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한번 지나면 붙잡지 못하게 함이며 어깨와 뒤꿈치에 날개가 있는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게 누구에게나 다가간다. 양손에는 면도칼과 저울이 들려 있어서 기회라고 생각될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해 냉철한 결단을 내리도록 한다.’ 시간의 알레고리이다.


엄격한 눈금으로 재단된 시간이 돌아오지 않고 되풀이할 수도 없이 우주로 흩어진다는 건 억울하고도 슬픈 일이다. 옛사람들도 시간을 소중히 했다. 주워 담을 수 없으나 손안에 담아 쥐고자 했다. 시간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지만 인간의 위대함은 그것을 가꾸는 데에 있다. 내 시간만큼은 나의 레이다 안에 있다. 이것을 줄이고 늘이는 것은 각자의 기술이다. 빨리 사라지는 카이로스 신을 붙잡는다면 인생은 훨씬 풍요롭고 생생할 것이다.

‘남가일몽’이나 ‘립 반 윙클’의 주인공들은 시간여행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깊은 땅속이나 산속에 끌려 들어가 지상과는 다른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차이라면 남가일몽에 나오는 순우분의 시간에는 변화가 없지만 립 반 윙클의 이야기에서는 그만 빼고 이십여 년이 흘렀다는 거다. 그가 싫어하던 아내도 그 세월 동안 늙어 죽었다. 긴 여행의 보람이다.

가차없이 눈금대로 움직이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두렵다. 남에게도 나에게도 모두 공평한 시간. 프랑크 카프라의 ‘잃어버린 지평선’(1937)의 주인공은 히말라야 계곡에서 샹그릴라라는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전쟁이나 욕심, 범죄 등이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젊다. 단지 이 안에서만. 그래서 샹그릴라의 미녀는 이곳을 벗어나자마자 백골이 진토 되어 가루가 돼 날아간다. 수백 년 묵은 호호 할머니 미라였을 것이다. 지상의 어느 곳인가에는 그렇게 시공간이 멈춘 곳이 있지 않을까.


시간을 다룬 소설 중에서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1924)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주인공은 한스 카스트로프라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시간 그 자체일 것 같다. 작가는 시대 소설이자, 시간 소설로 이 작품을 기획했다. 시대 소설이라 한 건 원래 소설 양식이 서사적이니 시간을 포함한다는 뜻이다. 자연스럽다. 반면 시간 소설이라는 건 그전까지는 본격적으로 기획되지 않은 프로젝트다. 시간의 본질을 탐색하는 본격 프로그램이라니. 근대의 인간은 허무하다. 시간을 의식할수록 강박적으로 얽매인다. 이들은 시간성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소설에서의 시간 실험. 메타-시간.

세상만사 익숙하고 지루한 사람에게는 시간이 잘 흐르지 않는다. 한참 지난 것 같은데 10여 분이 흘렀을 뿐이다. 그의 시간은 무한히 길어 보이다. 그러나 긴 것처럼 보여도 시간의 단층을 겹겹이 모은다면 단일한 순간의 집합이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큰 변화가 없다. 거의 같은 모습이므로 겹쳐본들 큰 차이가 없다. 같은 모양의 비스킷을 겹친 것 같다. 그는 짧고 단순한 순간을 살았다. 그의 시간 층은 비어 있다. 부피가 느껴지지 않는 얄팍한 차원. 그의 인생은 단조롭다.


반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시간을 놓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시간을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충만하고 색채가 있으며 두툼하다. 주위는 항상 신선하고 새롭다. 오늘은 어제를 반복하지 않는다. 시간 층이 두텁다. 그는 풍부한 삶을 보내는 셈이다. ‘마의 산’에서 토마스 만이 말하는 시간관이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19세기에는... 삶이 어쩔 수 없이 기계화되고 얄팍해져 간다는 느낌과 하나의 파괴적인 힘으로써 시간에 대한 관념이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강렬하게 시간을 의식한다. 사물은 과거와는 다른 시간 계수로 인해 의미와 가치가 왜곡된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예전 사람들이 신화 속에서나 찾으려 했던 카이로스 신을 과학적으로 포착하기 시작한다. 수백 년간 똑같이 울렸던 시계 종소리는 아인슈타인 이래로 뒤틀리게 된다. 보편 시간은 사라졌다. 뉴튼의 세상은 신이 바라본 세계다. 어디에서 관찰하든 한결같은 질서다. 아인슈타인의 세계관은 인간의 눈으로 본 세상이다. 각자는 서로 다르게 세상을 보고 시간을 느낀다. 이제 세계는 장소와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상대적이다. 카이로스 신을 잡아챈 누군가는 시간을 확대하거나 축소하고 정지도 한다.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를 마음대로 드나든다.

시간이 멎은 곳. 그곳에는 변화도 없을 것이다. 만일 파라다이스가 있다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지루하다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곳. ‘마의 산’이 그런 곳이다. 그러나 천국은 아니다. 폐병, 폐결핵 등 지난 세기의 불치병 환자들이 모여드는 알프스 산속 요양원이다. 이곳에 유럽 각지의 부유한 병자들이 치료를 위해 모여든다. 그들에게는 여행, 외출, 외박이 가능하다. 옷차림, 음주, 흡연, 사교, 문화생활에도 제한이 없다. 식사는 하루 5번이나 하는데 호화로운 메뉴에 입맛이 절로 다셔진다. 환자들이 하는 일이라야 누워서 요양하기, 좋은 음식 먹기, 산책하기, 남 참견하고 험담 하기 등이다. 병자들이라는 점을 빼고는 낙원의 삶이나 다름없다.

요양원 거주자들의 경험은 한결같다. 처음에는 이색적이었을 규칙이나 풍경도 하루 이틀 지나면 완벽히 겹쳐진다.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시간이 느리게 흐르지만 날이 갈수록 속도를 더해간다. 나중에는 아예 시간관념을 잊고 산다. 며칠이 몇 달이 되고 몇 년이 된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시간의 윤기가 희미해진다. 날들 사이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반복은 시간을 좀먹는다.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떠나면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좋으나 싫으나 산중에 나포되어 있다. 그곳에서 원장이 치료 완료라고 선언할 때까지 묶여있어야 한다. 세월이 물처럼 구름처럼 흘러간다.  작가가 제목을 ‘마의 산’이라고 붙인 이유 이리라.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날씨조차 지상의 계절과는 다르다. 고산지대여서 한여름에도 눈바람이 불고 겨울에도 햇빛이 찬란하다. 사계절이 비슷하다. 시간도, 공간도 멈춘 것 같다.

‘마의 산’은 19세기를 결산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유럽의 정신/철학 발전사를 정지된 시공간에서 압축해 보여준다. 이곳은 멈춘 채 부패해가는 유럽에의 비유다. 유럽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이성과 비이성이 갈등을 벌인다. 육체와 정신을 일원론적으로, 혹은 이원론적으로 고찰하는 학자 환자들 간의 논쟁이 그것이다. 예수회 출신 신부는 정신과 죽음의 숭고함을 염원한다. 반면 인문주의자이자 프리메이슨 회원은 세속에 가치를 둔다. 육체 그리고 현실에 주안점을 둔다.


카스트로프는 요양원의 정지된 삶에서도 얻은 것이 있다. 그는 동료 환자들이 삶을 마감하는 현장을 자주 겪는다. 현재 시점 ‘죽음’에의 연습이며 밀접 체험이다. 삶과 육체/죽음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공부이다. 이성과 비이성은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다.

시간은 넘쳐나지만 한정된 공간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건강 외에는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관심을 끄는 건 ‘왜 사는가’ 그리고 ‘왜 죽는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토마스 만이 이렇게 길고 지루한 소설을 쓴 것은 토론 마당을 벌이기 위함에 다름 아니다. 그곳에는 사실이 아닌 사유의 강물만이 흐른다. 세로축은 사라지고 가로축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 카스트로프는 멈추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시간 소멸은 성공적이다. 다채롭게 사는 사람들은 입체는 볼지언정 평면은 간과한다. 먼 곳에는 관심이 많지만 발밑에는 무심하다.


그러나 주인공의 눈은 다르다. 익숙한 것도 신선하게 느껴기, 사소한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기. 그는 전체 Full-scene보다는 클로즈 업 Close-up에 경탄한다. 눈송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게 되었다. 하늘색과 바람, 구름이 날씨에 미치는 상관관계에도 관심을 갖는다. 매일 보던 것들도 이채롭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일 것 같다. 시인이나 어린이 .


한스 카스트로프는 하산을 결심한다. 엘리스가 잠에서 깨어났듯이 그도 자기의 시간을 찾아가려 한다. 무르익은 때이다. 내 시간으로의 회귀이다. 비록 지상에서의 삶이 갈등과 혼란, 비이성을 불러일으킬지라도 그러하다. 인간은 변화 속에서라야 산다고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시간이라는 건 무의미한 허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 진공 상태로 질식시키는 건 아닐 테다.


시공간의 확장/축소와 같은 실험은 이쯤 해서 중단되어야 한다. 발을 지금 이 땅에 붙인다는 결심이다. 공간은 시간과 연결된다. 이곳은 단지 이때여서 유의미하다. 어제의 이곳, 내일의 이곳은 지금의 이곳이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느 누구도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했던가. 누구든 어제로부터 어느 한 가지라도 온전히 가져온 것은 없다. 그것들은 물, 공기, 바람, 향기와 같다. 모든 건 시간과 더불어 오고 간다. 그것이 ‘산다’는 것의 의미다. 인간은 생성/소멸/변화의 와중에 있을 때 삶을 산다.

사람들은 이제 엄밀한 시간을 부정한다. 시간을 동등하게 기억하지도 않는다. 상대적인 시공간에 머문다. ‘반영’이라기보다는 ‘부여’이다. 나의 세계에서만큼은 유기물뿐 아니라 무기물조차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개인적 해석에 골몰하고 거기에서 만족감을 얻는다. 같은 일도 누군가에게는 선명하고 다른 이에게는 모호한 인상만을 남긴다. 그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자는 나 자신이다. 크로노스적 경험에 카이로스의 생생함과 신선함을 부여할 것. 이것이 시간의 신들이 주는 권유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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