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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8. 2021

소설 탐닉

서점에 가면 소설 코너로 직행하는 일이 많다. 수 천 년 쌓인 이야기 지층에서 공들여 발굴한 허구의 세계. 개봉을 기다리는 미지의 황금 단지. 읽지 않고 쌓아둔 책들이 있는데 또 뒤적인다. 진짜 같은 가짜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독자는 그들과 대결한다.


부질없다고 중얼거린다. 웬만한 이야기는 이미 태곳적 신화에 있다지 않나. 아무리 멋진 작품이라도 해도 예전 사람들이 만들고 기록한 것의 번안이다. 그저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다시-쓰기를 했을 뿐이다. 알고 있음에도 다시-읽기를 반복한다. 어떤 이들은 소설 탐닉가가 주인공이나 플롯에 몰두하는 것만큼이나 드라마에 매진한다. 거듭해서 소설을 읽는 거나, 거듭해서 드라마를 보는 거나 같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많은 사람들이 지구 상에서 살다 갔으리라, 지금도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 유전자 신호대로 태어나 불합리한 세상과 고군분투 중이다. 이야깃거리 없는 이가 있을까. 우리 하나하나가 스토리고 모이면 히/허스토리가 된다.


‘세상은 극장 Theatrum mundi’이라는 바로크적 용어가 있다. 우리는 참 존재가 아니고 그림자이자 가면이라는 뜻이다. 시간/공간이 마련된 무대에서 주인공은 기타 배우들과 갈등을 벌이며 극에 몰입한다. 극장은 온갖 소란으로 시끌벅적하다. 한바탕 질풍노도가 휘몰아치고 조용해지면 주연배우도 퇴장할 시간이 다가온다. 연극이 마무리되고 극장 문이 닫힌다. 아직 성업 중인 다른 극장의 배우들도 언젠가는 외로운 뒷모습을 보이며 내려가겠지. 각각의 극본은 멀리서 보면 다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비슷비슷하다. 그림자는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는다.


개체는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고 그런 개체들이 모인 사회는 더더욱 불확실성과 가변성으로 충만하다’ 어디선가 읽은 글귀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죄다 옮길 수야 없다. 그 수가 무한하니 당연하다. 원형적 이야기는 이미 어딘가에 마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 새 에너지, 새로운 역학관계로 세상은 늘 새 생명처럼 신선하다. 세상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또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헤맨다. 어스름, 모호함, 막연한 어둠 속에서 꿈틀꿈틀 새 이야기가 태어난다. 약간의 돌연변이를 거쳐 다른 형태로 진화한다.


우리에게는 영화나 드라마의 목록이 길다. 영상물 대신 소설에 천착하는 이유가 있기라도 한 걸까? 아직 글이라는 구시대 매체에 몰두하는 이유. 저 수백 페이지에 출몰하는 가공의 인물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굳이 벤야민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영상은 글보다 강렬하다. 영상은 견제 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같다. 우산 없이 몸을 흠뻑 적시는 비. 해석할 필요 없는 직설법. 그런데도 글이라니. 소설이 인간 본질을 묻고 발산하기에 더 적절하다고 보는 거다. 휴머니즘이라는 오래되고 고리타분한 이념 같은 것.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그렇다. 눈앞에 직접 보이는 현실보다 글로 그리는 환상이 더 그럴듯하다고 여긴다. 핍진성 있게 모사한 간접 의사소통 방식이 실제보다 더 실제라고 여기도록 오랜 훈련을 받아서다. 거기에다가 작가들 특유의 스타일, 레토릭에 반해서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에서 한 인물의 입을 빌어 문학을 예찬해 마지않는다. 대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순응한다. '.. 문학정신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해력을 일깨워 어리석은 가치판단과  확신을 약화하고 해소하며 인류의 교화와 순화, 향상을 가능하게 한다. 문학정신은 최고의 도덕적 세련성과 감수성을 창조하면서, 그로 인해 열광하지 않고 화해와 정의, 관용의 정신을 길러준다. 문학의 정화작용과 순화 작용, 인식과 언어를 통한 열정의  억제, 이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으로 인도하는 길로서의 문학, 언어가 지닌 구원의 힘, 인간 정신 일반의 가장 고귀한 현상인 문학적 정신, 완전한 인간이자 성자인 문학가...'


소설은 19세기에 완성되었는데 한때 리얼리즘과 동의어로도 불렸다. 장르가 형성되자마자 인간이란 누구일까에 대해 질문하는 스토리가 쏟아져 나왔다. 주인공들은 보통 사람이다. 그들은 어떻든 세속에서 가치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이런 양식이 발견되길 다들 기대했던 것이리라. 신, 영웅, 왕족, 귀족이 아닌 하찮은 평민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다. 이런 질의와 토론에 뛰어들자면 민주정이나 공화정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정치 체제에 살고 있으니까. 이들이 사는 사회는 철학, 미학, 과학에 대해 보편 토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합리주의나 귀납 법칙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설은 로맨스 romance가 아니고 노블 novel이라고 불렸다. 로맨스는 상류층의 모험담이고 애정담이다. 귀신이나 허깨비들의 환상 놀음이다. 반면 노블은 somebody가 아닌 everybody, nobody의 이야기.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너’와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이야기.


이야기는 천천히 움직이는 큰 뱀이다. 뱀은 짙푸른 서사의 강을 헤엄쳐간다. 선명한 비늘을 반짝이며 빛났던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꿈틀거림도 잊고 그 움직임을 멈출까? 미래의 매정한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과거 이야기에 지칠지도 모른다. 20세기의 위대하고도 서늘한 이야기도 그렇게 사라지리라. ‘드리나 강의 다리’, ‘한낮의 어둠’, ‘아리랑’, ‘타인의 피’, ‘고요한 돈강’, ‘야곱을 둘러싼 추측들’, ‘아우스터리츠’, ‘밤의 군대들’, ‘거미 여인의 키스’, ‘폴란드 기병’, ‘농담’ 등이 펼쳐지는 지루한 한 낮을 견디지 못할 테니. 이 이야기들이 앞으로도 슬프고 심각하게 여겨지리라는 건 순진한 소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눈과 귀에 맺혔다가 기록되고 읽혔던 한과 고뇌들이 바람에 날린다.


옛사람들은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해진다고 했다. 왜 아니겠는가. 공부와 소설 읽기는 다른 계통이다. 공부는 수렴이고 이야기에의 탐닉은 확산이다. 공부는 정해진 프로세스와 방법이 있다. 결론은 가설 내지 원리를 향해 나아간다. 사람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매뉴얼도 공식도 없다. 미세하게 흩어져 있다. 균사처럼 아무렇게나 촉수를 뻗고 있다가 스르르 사라지기 일쑤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1/N이다. 그 ‘N’은 무한에 가깝다. 엷고 가변적이고 불확실하다. 수채화에 떨어진 물이 번져나가듯이 흔적은 또렷함을 잃는다. 끝이 없고 경계도 없는 미궁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허상의 우물에 빠지기 직전 멈추라는 경고를 준 거 아닐까?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나오는 ‘바벨의 도서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알폰스 슈바이거르트의 ‘책이 되어 버린 남자’, 플로베르의 ’ 보봐리 부인' 등은 책에 대한 우화들이다. 책 중독자 보르헤스는 장님이 되었다지. 그 거대한 바벨의 도서관을 지었으니 그럴 수밖에. ‘책이 되어 버린 남자’는 책에 미쳐 책이 된 남자의 이야기다. 이 남자에게 양심이나 고뇌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책의 마력에 빨려 들어가 책의 악령이 된 거다. ‘보봐리 부인’은  책이라는 이상 세계에 빠져 삶을 잃은 낭만주의자를 담고 있다. 책을 하도 읽어 광인이 된 돈키호테는 우스꽝스러운 행동만 하다가 제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죽었다. 이들은 현실보다는 가상/증강 현실을 선택한 셈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말하듯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도피처가 필요하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읽는다. 주인공 한탸가 말하듯 우리에게는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래서 독자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이 된다.


인간은 헛되고 헛된 존재라고들 한다. 그러므로 사람 이야기에 탐닉하는 건 쓸쓸한 일이다. 이야기는 패배를 찬양한다. 몰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름다움을 느끼니 어쩐다? 그래서 소설 탐닉은 병이다. 치유될 수 없고 치유되고 싶지도 않은 VR(virtual-reality)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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