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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9. 2021

그레이트 아메리칸 아티스타이티스

운명과 분노, 제로K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2015)의 등장인물 피비 델마는 그레이트 아메리칸 아티스타이티스Great American Artistitis라는 낯선 조어를 만든다. 그녀가 말하는 그레이트 아메리칸 아티스타이티스(이하 GAA)란 '강박적으로 승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증후군'을 뜻한다. 소설 속 주인공 로토를 포함해 ‘늘 더 커지고 더 요란해지고 헤게모니의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가려고 떠밀고 다투고, 이 나라에서 남자들이 예술을 하겠다고 덤빌 때 걸리는 일종의 병’이다. 쉬운 말로 '허세'라 부른다.

예술계만은 아니다. GAA는 어느 분야에서든 흔히 보이는 1등 병이자 나르시시즘이다. 우월한 자신에게 도취되면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이들은 자기중심적이고 공감능력도 부족하지만 남다른 재능도 있을 테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띌 만한 자리에 오르려면 능력이든 권모술수든 뛰어나야 한다. 그래도 우월감을 느끼는 시간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곧이어 경쟁자들이 치고 올라오기에 늘 불안하다. 오늘은 기쁘지만 내일은 분노할 일이 기다린다. 모래로 쌓는 피라미드는 언젠가 무너져 내리지만 그전까지는 파티가 계속된다. 세상은 염세적 능력 주의자들이 원하는 대로 굴러간다. 문제는 이들 GAA 나르시시스트들에게 현대를 리드할 활력과 정열이 넘친다는 점이다.

증후군은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 계열이다. 거기에서는 사소한 감정을 다루지 않는다. 그들은 영웅, 전쟁, 허풍, 재앙, 재난, 거대 서사에 관심이 있다. 한 인간의 내면, 작은 이야기, 소소한 일상사, 섬세한 감정의 잔물결, 이런 건 GAA의 영역이 아니다. 바즈 루어만이나 크리스토퍼 놀런 같은 감독들은 쉴 틈 없이 관객의 감각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디즈니랜드 기획자들을 연상시킨다.

큰 규모의 아파트 단지나 쇼핑몰도 같은 취향에서 나온 발상이다. 소박하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낡은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기획자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옛 건물들을 눈앞에서 치운다. 싹 밀어서 새 터전을 만들거나 키 큰 새 건물 뒤로 감춘다. 작고 낡은 가게들처럼 처량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것들도 삭제 대상이다. 거대 백화점, 쇼핑몰이 몰고 들어와 나날이 SF 미래 도시처럼 변모한다.

대도시에서는 GAA 현상을 자주 만난다. 치킨팜의 , 끝없이 생산만 하다 차례로 죽는 , 돼지. 새끼들을 향한 어미들의 모정이나 개개 동물들의 감정 등은 고려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실험실에서 태어난 슈퍼돼지다. 옥자는 맛있는 단백질과 지방을 가졌기에 존재 가치가 있다. 비닐하우스, 농약, 제초제, 성장촉진제들이 생산하는 채소도 비타민과 무기질 기계들이다. 채소인 척 하지만 사실은 겉모습만 닮았다. 도시인들은 의식주를 가능하게 하는 많은 양의 보급품, 기성품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양이 많아지면 상품도 질적 차원으로 이동한다. 값비싼 상품들이 위엄 있는 아우라를 품은 채 예술품처럼 전시되기도 한다.

국가주의, 시장 제일주의라는 일관된 가치가 오래도록 존재해왔다. 주류는 그게 제일이라고 세뇌해왔다. ‘경쟁하라’, ‘성공하라’. 정부, 공립학교, 군대, 재벌, 언론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밀고 당기며 사람들을 그들의 원칙대로 이끌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사령탑은 약해졌지만 GAA는 개인 내면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피로사회'가 도래했다.

작고 낮게 사는 건 예쁘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에 무심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일상에서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지역에서 생산된 작물 먹기, 동네 가게 다니기, 되도록 사지 않기, 프랜차이즈 출입 자제하기, 주류 자본이 시키는 일 하지 않기. 이런, 헉하고 숨이 막힌다. 자기애와 행복에의 무한 추구로 기획된 도시는 소박하고 사소한 것들도 관광상품으로 만든 지 오래다. 이제는 눈에 안 보이는 체계들이 스스로 에너지원이 되어 삶을 작동시킨다. 그것은 날로 팽창하고 사람들은 이 삶에 익숙하다.

우리는 자유와 행복의 양 날개를 꼭 잡고 싶다. 나의 행복은 무한정 보장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 올더스 헉슬리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그곳. 유토피아인지 알았는데 가까이 보니 디스토피아였던 그곳. 제조공장의 콜라병은 끝없이 늘어서 있다. 차이 없이 다 똑같은 무한 복제 쌍둥이 왕국이다. 그곳은 GAA가 필연적으로 다다른 기계 세계. GAA는 마치 영웅 서사를 완성할 것처럼 웅장하고 장엄하다.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이 크고 숭고하다.

돈 드릴로(1936~)는 현대가 만들어낸 대형 물에 관심이 많다. 이 작가야말로 GAA를 꾸준하게 본격적으로 다루어왔다. 작가는 현대 문명이 너무나 크고 선명해서 우리를 압도하지만 낙원으로 이끌어가지는 않는다고 여긴다. 작품 속 사람들은 조증과 울증을 번갈아 앓고 세상은 멋대로 늘어났다가 또 왜곡된 형태로 줄어들기 일쑤다. 문명은 적대적이고 교묘하다. 그의 세 작품을 살펴본다.


‘화이트 노이즈’(1985)는 기괴한 걸작이다. 사람들은 완전한 고요, 혼자라는 느낌을 참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작은 소음이 필요하다. 그 소음으로 번뇌와 갈망을 잊고 오늘도 살아간다. 그럼에도 이 백색 소음은 가짜다. 몰락의 증후군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음을 잠시 느끼지 못하게 할 뿐이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를 비슷하게 음차 한 다일러라마Dylarama에 잠시 심신을 달랜다. 물론 치료제가 아닌 신경 안정제이다. 현대판 묵시록이라고나 할까. 작가의 시니컬한 의식을 엿보인다.


‘마오Ⅱ’(1991)는 군중, 대규모 정치나 종교행사, 테러, 미디어를 같은 맥락에서 다룬다. 작가들이 고독한 방 안에서 썼던 문구들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테러, 범죄 등이 잊지 못할 자극을 주고 미디어는 퍼 나르기를 즐긴다. 테러와 미디어, 그 둘은 서로를 몹시 그리워한다. 경쟁적인 미디어는 사람들의 마음도 조작한다. 기획에 의해 학습된 인간 군단의 노래와 춤, 젊음, 패션, 사생팬들의 열광적 흠모. 찬란하지만 실체 없는 이미지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반영한다.

‘제로 K’(2016)는 작가의 음울한 미래관을 드러낸다. 죽음도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때 이른 죽음을 맞게 된 사람들은 냉동보존 회사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그들은 미래의 의학이 자신을 소생시키리라 기대한다. 사막에 세워진 냉동회사는 정교하게 가꿔진 플라스틱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불사를 꿈 꾸는 사람들은 불모의 땅에 가꿔진 가짜 꽃, 나무들이나 다름없다. 인공이 자연을 능가하려 한다. 호모 데우스가 되려는 인류. 작가는 사람들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묻는다.


으쓱하는 허영심삶을 더 헛되게 만들지 않을까. GAA가 만드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서로 다투고 밀쳐대는 아비규환이다. 이런 문명이 끝없이 지속되기는 어려울 테다. 탐욕을 겸손하게 표현한 ‘지속 가능한 성장’조차 난센스다. 에너지원도 유한하고 지구는 더 이상의 에너지 소비를 감당할 만큼 관대하지 못하므로.

‘운명과 분노’의 로토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동안 신처럼 군림한 예술계의 제왕. 어느 날 운명을 담당하는 여신은 그의 실을 싹둑 잘라낸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해안가를 왕복하듯이, 어떤 상념이 철썩철썩 그를 자극한다. 그는 깨닫는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 보지 못했던 다른 세계가 팔을 벌리고 있다는 것을. 피비 델마의 말대로 이 남자는 ‘조용하고 분명하게 말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성공신화에 목맨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애에 가려 죽음 앞에서야 삶의 진실을 깨닫는다. 조용하고 분명한 삶에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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