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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19. 2021

디킨스와 함께 행복한 읽기

시적 정의, 어려운 시절


19세기 소설 읽기를 즐긴다. 읽기 힘드는 작품도 많다. 오락거리 만이 아닌 이념의 장이기 때문이다. 괴테, 스탕달, 에밀 졸라, 도스토예프스키, 헨리 제임스 같은 이들은 한 명 한 명이 거대한 산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이다. 그들에게 이야기가 먼저냐, 이념이 먼저냐 하고 묻는다면 이념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19세기 작가들은 현대의 예언자들이다. 그들은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과학적 발견이 줄을 이을 것이며 사회혁명이나 계층 갈등이 첨예해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거인들은 뜻이 크므로 당연히 알리고 싶은 프로파간다도 뚜렷하다. 스토리는 부수적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픽션이지만 논픽션을 읽는 것처럼 벅차다. 대변동의 시대를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생각할 거리를 무궁무진 제시하니 말이다. 그들은 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상상력으로 고유의 구조를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인물을 배치하고 생각을 투사해 본인의 아바타를 행동하게 한다. 어떻게 보면 인물은 생생하지 못하다. 작가의 로봇이나 마찬가지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을 '이념의 육화'라고 불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물들의 생로병사나 희로애락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단지 작가를 위한 격투기장에 잠시 몸을 빌어 출연한 허수아비들이니까.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머릿속을 횡행하는 각양각색의 사상, 종교관 등을 옹호하고 반격한다. 그는 심리학의 대가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실은 더 초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 보다는 낫지만 리얼리즘을 확립시킨 당대의 작가들은 인물 창조에 있어 자연성만을 중시한 것은 아니다.

리얼리즘에 공공 대중이 마련한 공식이 있는 건 아니다. 작가들은 '운명'을 사회 현실로, '성격'을 다면적, 복합적으로 그린다는 전제 아래 작품에 개연성, 핍진성을 보탠다. 상대적 세계관이 드러난다. 작가는 본인의 논리로 필연적인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걸 인정한다고 해도 약간의 불만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각자의 논리’는 보편/일반을 거부한다. 개인이  탄생했다. 개념 미술 이전에도 개념 예술은 언제든 존재해왔다. 독자들이 타인의 복잡한 개념들과 걸맞게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그런 면에서 디킨스는 사이다 같은 청량 음료수이다. 그의 인물들은 살아 움직인다. 디킨스가 창조했지만 차츰 자기들끼리 스스로의 원리에 의해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들의 공동체, 원칙, 법, 성격, 관계에 의해 행위하고 사고한다. 독자는 스탕달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무질로부터 벗어나 19세기의 진짜 거주민들을 만날 수 있다. 디킨스는 발자크와 비슷하지만 또 다르다. 츠바이크의 말대로 발자크는 문학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 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극복하려 했다면 디킨스는 두 손을 맞잡고 수용하는 태도를 갖는다. 앞의 두 사람이 워낙 세고 강렬하기에 디킨스의 겸양은 한결 눈에 띈다.

처음에는 디킨스라는 작가에 대해 뚜렷한 인상을 갖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찰스 디킨스(1812~1870). ‘크리스마스 캐럴’을 쓴 사람, 스크루지라는 유명한 구두쇠를 낳은 이. 그는 데이비드 린(1948), 캐럴 리드(1968), 로만 폴란스키(2005)가 메가폰을 잡은 ‘올리버 트위스트’(1839)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 정도였다. 처음에는 아동문학 작가, 그다음에는 권선징악을 외치는 구식 작가로 생각했다.

캐럴 리드의 뮤지컬 영화 ‘올리버!’(1968)가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의 노래로 검은 세상, 음산한 지하 세계를 알려주는 영화로 과거 한국 영화들과 너무 달라서 인상 깊었다. 한동안 한국 영화에서 아이들은 때가 묻지 않은 순결 무구의 상징이며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반면 아이들도 알건 다 알기에 영상과 현실 세계의 격차가 클수록 한국 영화를 신뢰하지 않았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한국식 어린이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아이들을 통해 어두운 사회를 폭로하다니. 그것도 매춘, 강도, 강간, 살인, 절도와 같은 강력 범죄의 소굴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대한 찰스 디킨스, 누군가는 사회주의의 맹아를 그에게서 배웠다고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해악, 잔인한 횡포를 제대로 만날 수 있다. 영국은 19세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저임금 노동자들의 희생을 담보로 잡았기에 가능했다. 런던은 공해, 저임금, 슬럼, 빈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노동자 계층의 여자와 아이들은 쉽게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디킨스의 소설에는 어린이 착취가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당시 어린이 굴뚝 청소부, 공장 직공, 광부는 비일비재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아이들은 일주일에 6일, 하루 16시간을 일하고도 성인 임금의 10~20%를 받았으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비인간적 착취는 1847년에야 하루 10시간 이상은 넘길 수 없다는 법안 통과로 다소 누그러졌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다. 디킨스도 십 대 초반 이런 참담한 경험을 했기에 그의 작품 속 아이들의 고난을 누구보다 실감 나게 묘사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디킨스의 아이들은 고통의 대리 역할을 눈물겹게 수행한다.

디킨스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1995) 덕분이다. 이 책의 부제는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이다. 그녀는 디킨스 소설 ‘어려운 시절’(1854)을 ‘문학적 상상력’의 예시로 골랐다. 어떤 이는 문학 작품이 단지 작가 개인의 공상에서 나온 허구로 세상에의 기여도가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그것도 생각거리보다는 재미를 주는 도구라는 거다. 그러나 마사 누스바움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문학 작품이 ‘비인간적인 제도적 구조를 상상력으로 대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새롭게 구축하는 데 있고 나아가 공감 어린 상상력의 통찰을 보다 완벽하게 체화한 제도와 제도적 주체의 정립’에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나는 이 법철학자의 논리에 지극히 공감한다.


‘어려운 시절’은 공리주의라는 원리만으로는 세상이 괴상해지고 과도 해지는 진다는 걸 직접 목격한 사람이 쓴 소설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 소설이 공적 담론으로 확대해 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적 정의’ 다음으로 ‘어려운 시절’을 읽는 건 자연스럽다.


‘두 도시 이야기’(1859)나 ‘위대한 유산’(1861)은 뮤지컬이나 영화로도 알려져 접근이 쉽다. 읽기도 전에 줄거리, 시대 배경, 캐릭터를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 니클비’(1839), ‘오래된 골동품 상점’(1841), ‘돔비와 아들’(1848), ‘데이비드 코퍼필드’(1850) ‘황폐한 집’(1853), ‘리틀 도릿’(1857)등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디킨스의 몇몇 책을 읽었는데 공통점이 눈에 띈다. 대부분 교양소설이나 성장소설이라고 할만한데 주인공이 갖은 어려움을 물리치고 삶의 보물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심지어 어린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오래된 골동품 상점’마저 그렇다. 무방비의 소년, 소녀들은 죄악에 물든 주변을 물과 거름으로 가꾸어 꽃이 핀 천국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

아이들이 주인공이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러시아 말 '유로지비'는 바보 성자를 뜻한다. 세상을 구원하는 건 힘세고 똑똑한 이들이 아니라고 한다. 그 역할은 주로 바보스럽거나 부족한 이들이 맡는다는데 디킨스의 아이들이 바로 유로지비이다. 유로지비가 주인공이다 보니 악의 승리로 이야기를 끝내기는 어렵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밝고 화창한 면이 있어야 하고 희망도 엿보여야 한다. 디스토피아 세계를 비관하다가 전락해 절망에 몸부림치는 인물들만 보다가 낯설도록 선한 인물들, 신기한 세계를 만났다. 그래서 독자는 등장인물과 고행길을 동행하다가 나중에는 감동에 젖게 되고 심지어는 자신을 반성하기까지 한다. 디킨스의 작품에 열광한 19세기 독자들처럼 눈물도 흘린다. ‘황폐한 집’의 조의 죽음에서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고 ‘오래된 골동품 상점’의 넬의 죽음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줄줄 흘러내렸다. 책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았다는 소녀 ‘넬’이 죽다니. 그러나 그 아이는 죽어서도 삶을 풍부하게 만든다. 스스로 희생해서 타인을 구원하듯.

죽음이 순순한 어린 영혼을 무너뜨리면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한편으론 소극적이 되어, 연민과 동정과 사랑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그것에 감사한다. 슬픔에 찬 사람들이 초록의 무덤 위에서 흘리는 모든 눈물은 약간의 선을 낳고 약간의 온화한 성품을 부른다. 파괴자의 발밑에 그 힘에 도전하는 밝은 창조물이 생겨나며 그의 어두운 길은 천국으로 가는 한 줄기 빛이 된다.                                
 (오래된 골동품 상점, B612, 731쪽)


그는 대중 소설가이다. 인물들의 연애, 흉계, 음모, 선의와 악의 등이 어떤 막장 드라마 못지않다. 인물들은 그다지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황폐한 집’의 스몰위드와 크룩, ‘두 도시 이야기’의 드파르주 부인, ‘데이비드 커퍼필드’의 유리아 힙이나 머드스톤를 보자면 인물이 이렇게 단편적일 수 있나 의심이 든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들의 생김새마저 성격을 반영한다. 험상궂게 생겼다면 마음씨 나쁜 악당이고 옷차림은 남루해도 잘 생겼다면 고운 마음씨의 소유자일 확률이 높다. 한 방향을 바라보고 한 가지 방법대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등장인물들은 유치한데다가 전근대적이다. 사건은 대부분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되고 결말은 대중이 원하는 식으로 끝난다. 디킨스는 대개 매월 분권 형식으로 출간했기에 독자들의 희망 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일종의 연속극 집필자였던 셈이다. 그는 희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다달이 그의 책을 받아보려 한 열성 독자들이 우편배달부를 멀리 마중 나가는 일도 예사였다. 팬덤을 거느린 문학계의 제왕.  주인공의 운명은 독자들을 집단으로 웃고 울게 했다. 주인공들은 인위적인 이념의 도구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다. 누구든 흠뻑 빠져들었다. 독자들은 이게 인간의 삶이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디킨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작가다.

그는 인물들을 전지적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인물들의 내부를 훤히 알 수 있다. 신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래서 인물들의 심리적인 불안이나 고뇌에 공감하기 쉽다. 아직은 순수한 시절이랄까, 그들은 약아빠진 꾀를 부리거나 감추지 못한다. 맡은 역할 그대로 단순하게 성격을 드러낸다. ‘인과’는 말, 행위로 제시된다. 인물의 이름으로 힌트를 주기도 한다. 그 결과는 ‘응보’로 이어짐을 짐작하기 쉽다. ‘어려운 시절’의 그래드그라인드Gradgrind, 그는 산술과 추상의 정신을 대표하며 맥초우컴차일드M‘Choakumchild는 이름처럼 아이들을 질식시키는 악덕 교장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페긴은 용서할 수 없는 악당이다. 또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도라는 어쩌그렇게 생각 없는 인형처럼 굴까. 그들은 모두 그들답게 행위했고 또 거기에 걸맞게 보상이든, 벌이든 받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재미있고 유익하고 아름답다. 전형적인 신파다. 그래도 어쩌랴. 인생 자체가 신파인걸. 인물들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기 쉽고 생생해서 거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디킨스는 인간의 선의를 믿으려 한다. 그도 빅토리아 시대의 위선, 어처구니없는 사회 제도에 누구보다 분노했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그 많은 사깃꾼, 살인자, 협잡꾼, 음모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소설에 그려진 세상은 검고 어둡다. 사회가 문제 투성이기 때문이다. ‘황폐한 집’에서 그려지는 사법제도는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제도, 절차나 마찬가지로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그 체제를 이용하여 심상치 않은 일들을 벌이는 고딕적 인물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단지 이 시절의 악인이 아직은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닌 성격적 악인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작가가 자신의 시대와 공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가 중요한데 그는 당대 영국을 개선 가능한 공동체로 보았던 것 같다. 다른 소설 강국이었던 프랑스나 러시아 작가들과는 사뭇 다르다. 영국 지식인들은 혁명이니 공화국이니 하는 체제 전복적인 사고를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것 같다. 1838년에는 인민헌장이 통과되었고 차티스트 운동도 뒤를 이었다. 지식인들은 점진적인 개혁으로 사람들의 삶의 질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디킨스 자신도 혁명보다는 박애정신과 자선을 독려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보듯 그는 당시 사회적으로 전락한 여성들을 돕는 갱생 프로그램을 운영해 결혼이나 이민 등을 적극 도왔다.

거의 모든 소설은 비극적이다. 인문주의, 휴머니즘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온갖 고난과 고통을 겪고 헤엄쳐 뭍으로 올라오면 죽음과 만나게 된다. 인간의 운명이다. 이유 없는 고통, 고난 끝의 종말. 이것이 휴머니즘의 정체이다. 그래서 훌륭한 문학 작품, 고전일수록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은 같은 결론, ‘패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디킨스의 소설 역시 큰 범주로는 여기에 넣을 수 있으나 약간의 긍정, 낙관, 희망 같은 것이 보인다. 삶의 다양한 측면, 총체성을 드러내면서도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대부분 작가들이 ‘비관’을 택하지만 디킨스는 좀 다르다.

그런 면에서 디킨스는 보배다. 그는 인간과 인간관계, 인간 공동체에 약간의 햇살을 비춰주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비극적 운명을 산 인물들에게도 밝은 빛을 남기고 사라지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마치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작가는 드물다. 소설이라는 검은 보자기는 열어봐도 겉과 속이 모두 검고 불투명한 덩어리로 만져지곤 한다. 물론 디킨스도 그렇다. 그러나 그는 작품에 환한 미소를 떠오르게 하는 파스텔 톤도 부여한다. 그래서 디킨스는 누구에게나 권하게 된다. 씁쓸한 면만이 아니라 풍부하고 다채로운 삶을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본주의와 과학기술 만능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그는 계속 유효하고 보편적이다. 그는 문학의 베아트리체이다. 어두운 강물에서 허우적거리는 독자들에게 투명하고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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