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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0. 2021

일상 수도자

짐 자무시, 패터슨


어렸을 때는 삶이 낭만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삶은 초라하고 비루하다고 여겼다. ‘낭만적인 삶’이란 건 뭘까? 그건 평범하지 않은 삶을 의미한다. 일상이 아닌, 꿈이나 모험이 이루어지는 삶이다.

내 고향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산을 넘거나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야 한다. 산 너머에도 우리 마을 사람들과 다름없는 이들이 산다는 것,  거기에도 별다른 일들이 있지는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 너머를 공상하는 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내 머릿속 특권이었다. 환상적인 이야기, 멋지고 풍부한 이야기들은 우리 동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 가고 밥 먹고 동네 애들과 일상을 보내는 건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다. 진짜 삶은 저 너머에 있다. 여기가 아니고 저기만 꿈꾸었기에 이곳의 생활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늘 다른 것을,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낭만이란 건 애당초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딘지 모르는 그곳 때문에 현실은 더 초라하고 너덜너덜해 보였다. 나중에야 일상을 부정하면 삶, 인생 자체가 무가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게서야 그 누더기들을 주어 모았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1908)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꿰매고 매만져 그 나름으로 빛나게 하고 싶다. 이런 늦은 깨달음이라니. 요즘은 초등학교 아이들도 이런 유치한 환영은 갖지 않는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현실을 명료하게 인식한다. 화면을 늘여 현실을 더 크고 또렷하게 바라본다. 꿈, 모험이란 단어는 희미해졌다. 적어도 다른 의미로 전용되고 있다.

멋진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삶. 어제와 같은 날이 반복된다. 아마 내일도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조금씩 달라질 뿐 큰 그림은 같다. 그러면 어떠하랴.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6)을 보고 힘을 얻는다.


1980년대의 짐 자무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선구자같았다. ‘영원한 휴가’(1982)와 ‘천국보다 낯선’(1984)은 새롭게 해석된 우울한 현재다. 예전 반항아들은 제자리에 머물러 '지금/여기'를 개혁하려 했다면 짐 자무시의 주인공들에게는 그럴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현실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하다. 인물들은 도피하고 방랑한다. 충고 권유, 유혹으로 그들을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런 그들이 어쩔 수 없이 한 자리에 머물게 된다면 ‘커피와 담배’(2003)의 그 사람들이 될 것이다. 흑백 화면에 담배 연기와 커피 향이 공간을 채운다. 끝도 없는 탐닉과 의미 없는 주절거림에 찰스 부코스키가 문득 소환되기도 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 부코스키처럼 저 너머를 갈구하는 자는 패터슨 같은 수도자와 가깝다.

미국 뉴저지 주 동부에 패터슨이라는 도시가 있다. 감독은 이 조용한 도시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대표로 패터슨이라는 인물을 택했다. 영화 ‘패터슨’은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의 이야기다. 패터슨 시는 모더니즘 계열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1983~1963)가 개업의로 살던 곳이라고 한다. 그는 '소통'과 '과정'의 시인이다. 패터슨의 롤모델이 될 법한 직업인이자 시인이다. 두 사람은 일과를 반복하지만 그들의 정신 영역은 뻔하지 않다. 일상이 개인을 잠식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진부하게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일상이 예술로 환원된다.

직업이 시인이나 무용가라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예술로 경제활동을 해서 자신과 그 주위 사람들을 부양한다는 건 과거나 지금이나 녹록지 않다. 패터슨은 패터슨 시의 버스 기사이다. 현실 예술가는 패터슨 식이다. 나의 가치로운 삶은 예술에 두겠으나 현실에서는 밥벌이를 해야 한다. 회사 시인, 이삿짐을 나르던 무용수, 은행원 소설가 등은 현실과 이상이라는 외줄 타기에서 어렵사리 균형을 잡는다. 말하자면 본질은 노매드이지만 살아남으려면 정주민이 되어야 한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직업과는 관계없이 예술가가 된 이들이 많다. 예를 들어 장 뒤비페는 와인업자, 폴 고갱은 증권거래소 직원이었다. 보로딘도 화학자, 무소르그스키와 앙리 루소는 공무원, T.S.엘리엇은 은행원이었다고 한다. 직업을 떠나 창작 활동에만 전념한 이들도 있지만 끝내 일상인과 예술가의 이중생활을 유지한 이들도 있다.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라는 뱀파이어 영화가 그 예이다. 두 인물 중 아담은 '예술', 이브는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과 삶, 이 둘은 조화를 이루기 어렵기에 두 뱀파이어는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수 세기에 한 번 겨우 만난다.


'우리들 예술가들은 누구보다도 딜레탕트를 가장 근원적으로 경멸합니다. 이런 생활인들은 생활을 하는 중에 때때로 한번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하지요.'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대사다.

예술가와 일반 시민의 구분이 명료한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살면서 그리고, 쓰고, 연주하고, 듣는 것. 일상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술이 목적이라고 해서 일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상은 초라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일상은 진실한 나를 찾는 구도 행위이다. 삶은 반복이고 어떤 낱말들을 동의어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심하면 운율을 바꿀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하거나 같은 음조를 반복한다. 변주곡이 모여서 인생을 만든다.


패터슨은 주중 월화수목금 06:10에 기상해 도시락을 들고 출근한다. 스마트폰도 없다. 휴대폰이 개줄 같다고 느낀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을 보내므로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는 시내버스 기사이다. 정해진 시간에 노선을 따라 하루를 보낸다. 저녁은 아내와 먹고 바둑이를 산책시킨 후,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신다.

주말에는 마을의 폭포 앞에 앉는다. 도시화 이전에는 위용을 자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도심의 폭포는 제 몸 하나 유지하기 어렵다. 좌우 풍경이 잘린  액자 속 그림처럼 왜소해 보인다. 현대 도시는 신들마저 초라하게 만드니까. 영웅들은 운전 기사, 회사원, 가사 도우미와 같은 소시민으로 모습을 감춘 지 오래. 패터슨으로 나오 키 큰 아담 드라이버는 숨어사는 거인의 표상으로 걸맞다. 그는 거세된 폭포를 바라본다. 시상에 잠기기도 하고 운을 맞추어 시를 구상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한주 한주가 흘러간다.

새로운 소식은 버스 승객들에게서 듣는다. 그들은 패터슨 시에서 일어나는 재미있고 무섭고, 억울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이야기들은 버스 내부를 멈칫거리며 유랑하다가 패터슨의 귓속으로 들어가 담긴다. 퇴근한 운전기사는 자기 의자에 앉아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한 올 한 올 공책에 새긴다. 그러나 공들여 썼던 시는 어느 날 강아지가 물어 뜯어서 없애버린다. 흠, 이것도 패터슨의 의도는 아닐까. 예술은 생산물이며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 그건 삶 자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존 러스킨이 그림으로 일상을 기록했듯이 패터슨은 시로 그린다. 시는 압축, 상징, 아이러니, 비유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 힘은 시인의 마음속에서만 피어오르다 차차 안개처럼 확산된다. 은밀하게 속삭이지만 언젠가 큰 메아리가 된다. 시의 힘, 시에 대한 예찬이다. 어느새 짐 자무시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이 되었다. 낭만의 현실에의 변용. 긍정적인 변화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하던 일을 패터슨과 또 다른 패터슨들이 이어간다. 시를 쓰는 행위 자체를 찬양하는 새 시대의 예술가들이다.

어제와 비슷한 메뉴로 식사를 했다. 책 읽기는 미루고 대신 동네 친구를 만났다. 일정을 약간 바꾸어도 보지만 전반적으로는 비슷하다. 내 행동반경은 크지 않다. ‘로맨틱’보다는 개연성에 관심이 간다. 재능과 욕망이 크지 않은 자는 꾸준함이 답이다. 될까? 해볼까? 묻지 않는다. 할 법한 것, 될 법한 것을 오랜 시간 해 보는 거다. 하루 세 시간 10년 간 몰입해서 만 시간의 법칙을 증명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긴 세월 동안 찔끔 질끔 시도하는 이도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가늘고 길게'라는 경구를 사랑한다.

거리를 지나가는데 '일상'이라는 카페가 눈에 띄었다. 핸드드립 전문이다. 드립 하는 손, 똑똑 떨어지는 검은 커피와 희게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유혹적이다. 구석 자리에 앉아 한 잔 마시고 싶지만 꾹 참는다. 최근 불면증으로 커피를 제대로 마신 지 오래다. 대신 맹물이나 한 잔 마셔야겠다. 일상이란 때로 무겁고 구질구질한 근심투성이로 채워지한다. 그런대로 적응해 조금씩 고치면서 살아야 할  것 같다. '매일 같다'는 건 노력이다. 일상은 애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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