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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0. 2021

과거에의 초대

스완의 집


산과 들을 걷다 보면 꽃/나무들과 저절로 친해진다. 그렇다고 이름을 아는 식물은 별로 없다. 자주 보기에 익숙할 뿐이다. 저들을 잘 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멀리서 바라보는 수준이다. 생김새에 익숙해지는가 싶으면 어느새 가을이 온다. 잎들이 하나 둘 날아가듯 떨어지겠지. 잎사귀들이 사라진 겨울에는 나무들이 새삼 낯설다. 봄/여름/가을 잎새들만 바라보느라 그들을 보듬고 키운 가지나 줄기는 무심코 지나친 까닭이다. 빈 가지가 휘청이는 나무들은 얼굴 없는 막대나 다름없다. 계절을 바꾸어가며 수년을 지나쳤는데도 이렇게 무심하다.

무심했다, 관심도 없었다. 사랑한다는 건 하나하나 바라보고 생김새를 기억하는 걸 테다. 화려하게 장식했던 꽃이나 잎뿐 아니라 가지나 줄기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대충 바라보아서야 마음에 새겨질 리가 없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를 읽고 있다. 프루스트가 과거의 어느 시간을 회상하며 쓴 소설이다. 작가가 시간여행을 하는 실마리는 자신의 감각이다. 과거라는 시간이 사라진다는 건 사람을 허무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제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다.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려나. 단지 파편화된 기억만이 우리 머릿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 그 조각들이 비의지적으로 불려 나온다면 사라진 시간도 다시 살아나 꿈틀거리겠지. 그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 음악 소리, 입맛을 자극하는 풍미 이런 것들이 과거를 일깨운다. 언젠가 보고 들었던 것들이 기시감을 자극한다. 지금 무언가를 보거나 맛보는 나는 과거 어느 때 같은 풍경, 같은 맛을 즐겼던 나와 같다. 그러므로 시간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 안 어딘가에 응축되어있다. 그 시간을 일깨우려면 한 순간도 허투루 살면 안 되겠지. 지금과 과거의 감각이 일치하면 시간의 문이 열리면서 잊혔던 기억이 쏟아져 나온다. 현재의 나는 과거를 재해석하고 반성하며 새로운 나로 거듭난다.

1909년, 36세의 프루스트는 파리의 번화한 오스만 거리 102번지에 틀어박혀 코르크 마개로 외부 소음을 차단한 채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 물론 그전까지는 세상 누구보다도 감정과 인상을 무궁무진 경험했다. 돈 많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인 데다가 미적 감수성을 타고났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교계를 드나들었고 문학 예술계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귀족이나 부유층 사람들을 접하며 세상의 만화경을 두루 경험했다. 본격적인 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딜레탕트의 좋은 본보기로 불렸을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1차 세계대전 저까지 프랑스는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로 불렸다. 하는 일 없이 살롱이나 드나들던 프루스트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관능과 데카당스가 넘실거리는 현장을 매일 보았을 테다. 실컷 놀아 본 사람이야말로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향락에 젖어 본 이들은 자기 파괴에의 암시를 먼저 알아챈다. 프루스트는 무너져 산산 조각나려는 삶을 다시 생기로 붙들어 매기 시작한다. 그것은 허무의 거대한 공격에 맞서 방어하는 일이다. 바로 감각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회상 작업이다.

소설에서 프루스트는 베르그송과 관련 있을 당대의 철학에 대해 말한다. 열망하는 대상을 객관화하는 대신, 흘러가 버린 세월로부터 어떤 습관이나 정열의 굳어 버린 잔재를 추출하여, 그 습관이나 정열을 그들 불변의 성격으로 간주하고는, 그들이 택하는 생활 방식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다른 무엇보다도 주의하는 철학이다. 객관화된 지식이나 기계적인 정보가 아니라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삶의 철학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대신 프루스트는 ‘나는 감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감각은 관념과 달리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가능하게 만든 건 이 구절이 아닐까. 냄새와 맛처럼 곧 사라질 감각이 오히려 끈질기고 충실하게 살아남아 추억이라는 거대한 건물도 떠받친다는.  


그러나 사람들이 죽은 뒤, 사물들이 부서지고 난 뒤, 어느 아득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에, 냄새와 맛은 더 연약하지만 더 생생하고 더 비물질적이지만 더 끈질기고 더 충실한 것이 되어 영혼들처럼 여전히 오랫동안 남아서 다른 모든 것들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져지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불굴의 힘으로 추억의 거대한 건물을 떠받치는 것이다.  


회상은 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각각의 유사한 감각들’을 자극해 현실과 공존하면서 영원성을 띠게 한다. 과거로부터 불려 나와 복원된 감각은 고정되거나 기계적인 방식이 아닌 삶을 새롭게 보도록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쌓여둔 추상이나 관념 등은 지속적으로 해체되어 날마다 새로운 건물이 된다. 움직이지 않은 채 멈춘 것이 아닌 순간순간 살아 꿈틀대는 건물이다. 변화하는 순간을 이렇게 낙관적으로 해석한다. 진정으로 삶을 의식하고 사랑한 사람의 철학이다.


우리들의 무의식에도 층층이 쌓여있는 기억의 파편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보고/듣고/냄새 맡고/맛보고/만지는 것을 해왔으니 누구든 이 지층들이 켜켜이 들어차 있다. 현실의 우리는 우연히 감각의 힘으로 과거를 만난다. 나는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간 갈치조림을 먹을 때마다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수십 년 전 갈치찜을 앞에 두고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하던 말씀도 기억한다. 외할머니는 갈치를 발라주지 말고 내가 혼자 먹게 두라고 하셨다. 속으로 외할머니가 미웠다. 기억이 확장되면 우리가 할머니네 집에 간 일도 또렷해진다. 버스와 배를 타고 먼 길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날이었다. 긴 이별을 뒤로한 채 버스가 출발하자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우리 버스를 따라 달렸다. 엄마는 버스 안에서 서럽게 울었다. 내가 꺼낸 손수건으로 엄마가 눈물을 닦았다.

글을 쓰면서 이제는 안 계신 두 분 생각에 잠시 눈을 감는다. 엄마와 외할머니에 얽힌 이런저런 생각이 칡넝쿨처럼 올라온다. 회상은 우리 삼대를 굳게 묶는다. 이미지는 어떤 항과 결합하여 머릿속 어딘가에 머무른다. 이런 면에서 붉은 갈치조림은 나에게 여성 삼대를 탐색하는 과거로의 열쇠이다. 물론 '마들렌+차' 만큼 우아한 건 아니지만.


 아르놀트 하우저는 프루스트의 감각을 통한 회상하기를 플라톤식 이데아 상기라고 했다. 감각이 환기하는 기억은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짓는 창조자로의 지위를 부여한다. 시간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체험이다.


들국화는 가을의 안내자. 엄마가 좋아했던 연한 보랏빛 들꽃이다. 그 꽃을 보면 외할머니가 생각난다고 하셨지. 가을 파란 하늘에 연보라색 물결이 흔들리면 공연히 마음 한쪽이 아련해진다. 사랑하면 기억하게 된다. 의미를 두면 또렷해진다.

초가을에 피는 연보라색 꽃이면 들국화려니 생각했다. 구별도 하지 않고 한꺼번에 그렇게 불렀다. 찾아보니 쑥부쟁이, 벌개미취, 구절초 등이 꽃들의 진짜 이름이라고 한다. 세 종류 모두 가운데 통꽃 부분이 노랗고 가장자리 꽃잎은 보라색으로 비슷하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꽃 모양이나 잎자루, 잎사귀가 서로 다르다. 어떤 것은 잎에 털이 있고 어떤 건 없다. 잎이 톱니 모양인 것도 있지만 날씬하고 길쭉한 타원형도 있다. 국화 향이 나는 것도 있고 향이 없는 것도 있다. 조금씩 다르다. 이 중 엄마가 좋아했던 꽃이 뭐였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저 그들의 총합이었겠지. 벌개미취나 쑥부쟁이는 '그리움', '기다림' 등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구절초는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한다. 이런, 이런. 무슨 이름이든 가을 들국화는 엄마 꽃이 맞는구나.

삶을 산다는 건 세상을 오감으로 느끼는 일이다. 희미했던 세계는 감각을 통해 깊은 심도를 얻는다. 의미를 부여할수록 더 또렷하게 포커스를 맞춘다. 이런 사물은 머릿속 어딘가 저장되었다가 열쇠만 맞으면 생생하게 되살아나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가을꽃이 피는 들판에 서면 누군가가 그립다. 연한 보랏빛을 바라보고, 냄새 맡고, 그 꽃잎을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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