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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0. 2021

공포, 에드가 알렌 포의 경우


에드가 앨렌 포(1809~1849)의 ‘빨간 죽음의 가면’(1842)은 그 이미지가 또렷하고 생생해 한동안 밤잠을 설쳤다. 이 단편은 무섭다. 왕자는 전염병을 피해 깊은 산 중으로 피신했다. 그는 이곳에 성을 짓고 색색으로 장식한 방을 만든다. 마지막 방은 검게 칠한 다음 주홍 불빛을 비추게 했는데 마치 핏빛으로 물들인 것 같은 효과를 냈다. 그의 궁에서 가면무도회가 열린다. 기괴한 가면과 수의를 두른 자도 참석했다. 왕자가 그를 좇아 검은 방으로 가자 ‘빨간 죽음’은 그 마스크와 망토를 벗고 정체를 드러낸다. 그건 형태가 없는 텅 빈 공포다. 손으로 만질 수도 형상을 짐작할 수도 없는 죽음으로부터의 초대이다.

왕자는 왜 검은 방을 만들었을까. 신중한 안전장치는 따분하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게 핏빛 검은 방이다. 왕자는 냉철한 이성을 갖추었다고 자만했지만 위험한 일에 매혹된다. 금기일수록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용감하고 지성적인 이에게도 허점이 있다. 병이나 악은 미세한 틈도 노린다. 허약한 사람에게는 그 틈이 넓다.

에드가 알렌 포의 몇몇 단편을 읽다 보면 작품보다도 작가 자체에 궁금증이 생긴다. 이런 끔찍하고 기괴한 이야기들을 줄줄 뽑아내는 이는 어떤 사람일까. 죽음에 사로잡힌 자만이 쓸 수 있는 강렬하고, 관능적인 이야기들. 아마 이 사람은 행복했던 적이 없었으리라. 부친은 가출했고, 친모, 양모, 아내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형은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고 양아버지로부터는 오랜 갈등 후, 파양 됐다. 주변 인물과의 관계만 봐도 고통의 그림자가 넘실거린다. 물론 본인의 음주벽, 도박벽, 약물 복용도 정도를 지나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를 둘러싼 불행은 그 사람 본인의 결함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어디서 연유한 것들인지 크고 작은 불운이 감수성 강한 이 남자를 평생 옭아맸다. 포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성공한 적이 없다. 당시에는 지적 소유권이 법으로 명확하지 않아 인기 작가라 할지라도 궁핍하기 일쑤였다.

예술가를 ‘저주받은 천사’라고 일컫는 때도 있었다. 포가 천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상한 운명의 소유자였던 건 맞다. 그래서인가 그에게는 어둠과 우울이 혼합된 아우라가 있다. 그는 죽기 직전 행려병자나 다름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40세였다. 의료기록마저 사라져 사인이 알코올 중독인지, 자살인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고딕 낭만주의자다운 전설 속 인물답다.

그를 도망자로 만든 것, 운명에 반기를 들었으나 끝내 환상적 공포의 희생자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죽음에 대한 강박이었을 것 같다. 작품 곳곳에 ‘죽음’이 주제로, 소재로 넘나 든다.

때 이른 매장’(1844)이라는 단편의 진짜 주인공은 작가 자신일 것이다. 주인공 남자는 뇌전증 환자로 보인다. 그는 갑자기 온몸이 경직되었다가 혼수상태에 빠지곤 하는데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데다 빈도도 잦게 된다. 이 사람은 죽지도 않은 채 미리 묻힐까 늘 불안하다. 관 속에 누워 있을 때 혹시 소생하면 어쩌나 걱정스럽다. 시체가 깨어나 움직이면 묘지 문이 저절로 벌컥 열리는 장치도 고안한다. 주변인들에게는 죽은 자기 손가락에 고리를 걸어 석관묘 안쪽 문 걸쇠에 연결하도록 당부한다.

포는 고딕적 상상력에 매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근거 없는 추론이나 비유는 혐오했다. 예를 들어 ‘발데마르 사건의 진실’(1845)을 읽은 후, 의학적으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허구이되 과학적으로 포장한 초월론이다. 물론 그 내용은 이 작가에게 익숙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탐구이다. 스토리는 죽는 순간 최면을 건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최면 걸린 이는 산자도 죽은 자도 아닌 채로 머무르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의학 리포트를 쓰듯 죽음을 탐구한다.

죽음, 공포 그리고 강박관념을 이렇게 편집증적으로 앓았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다. 그래도 깨어있는 동안에는 잊고 살려 노력하여 그럭저럭 세속적인 삶에 성공한다. 포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위태롭고 고독하며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있다.

그는 공포로부터 벗어나려 부지런히 떠나는 도망자다. ‘군중 속 남자’(1840)가 본보기이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 이가 거기 있다. 생각한다는 건 공포와의 대면을 뜻한다. 초로의 남자가 두려움에 잡아 먹힐까 봐 안절부절 최고 속도로 뛰듯이 걷는다. 미친 듯이 걷는 남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빈 눈은 공허를 좇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현대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허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지만 본질은 비어 있음을 인식하는 이들의 모습.

죽음은 폐쇄 공포와 닮았다. ‘구덩이와 진자’(1843)라는 단편에는 온갖 두려움이 총망라되어있다. 주인공은 유사 중세 감옥에 갇힌다. 저승이나 다름없다. 희박한 공기, 암흑, 목마름, 굶주림 그리고 쥐가 들끓는 곳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진자는 죄수를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으로 이끌 듯 위협한다. 작가는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고독과 두려움에 질식할 지경으로 독자들을 몰아넣는다. 어떻게 이렇게 예민하고도 예리하게 표현할까.

포는 가학적이면서도 피학적이다. 그에게는 모든 사물이 깨어있고 움직였을 것이다. 동식물은 물론이고 움직이지 않는 비생물, 무기물도 마찬가지다. 감각이 그렇게 선연하니 항상 피로했을 것이다. 남들이 천천히 무심히 볼 것을 단기간에 빨아들일 듯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낀다. 그러니 밤에도 편히 쉴 수 없었을 것이다. 눈을 감은들 사물들이 그를 그대로 두었을까. 아니다. 주변 모든 것이 그를 향해 손짓하며 다가왔을 테다. 여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던 거다, 이 사람은.

단편 ‘베레니스’(1835)에서 주인공은 ‘움직임이나 물질적인 존재의 모든 감각을 없애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완고하게 인내했다’고 말한다. 보지 않으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썼건만 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잘 드는 칼날로 태어났으므로 항상 긴장 상태로 머물러 있다. 그래서인가 주인공은 자신도 기억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일을 경험한다. 주변과 자신의 경계선이 지워진다. 남자는 빛에 반짝이던 아내의 흰 치아에 집착한다. 무의식적 강박은 한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무시무시한 일을 결행하게 한다.

‘때 이른 매장’의 끝부분을 보면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거기가 무덤이 아니고 배 안이라는 걸 알게 된다. 배 밑바닥의 잠자리는 너무 딱딱하고 머리 위는 고작 40cm의 공간만 있을 뿐이다. 그는 아주 비좁은 침상에서 죽은 듯이 자다가 깨어났다. 그리고 관 속에 누워 있다고 착각을 한 것이다. 생각이 만든 불안, 공포를 체험한다. 혼자서 지옥을 지었다. 당시에는 사망 선언을 받고 매장된 이들 중 다시 소생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연약하고 섬세한 이는 본인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정신과적 관련 질병은 죄다 달고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정상이 아니라고 스스로도 여겼겠지. 그런 사람은 살아서도 저승을 경험할 것 같다.

포는 평생 공포에 미행당했고 붙잡혔다. ‘윌리암 윌슨’(1842)은 자기 자신에게 붙들린 가련한 인물의 일대기다. 그놈은 윌슨을 놓아주지 않는다. 끝없이 따라다니면서 자성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만 결국은 윌슨에게 살해당한다. 자의식이 지어낸 도플갱어이리라. 그림자 같은 미행자는 본인의 공포요, 자아 자체이다. 윌슨에게 살해당한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이긴 것은 너다. 나는 졌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너도 역시 죽은 인간이다. 세상으로부터 죽은 인간이며, 천국에서도 희망에서도 죽은 인간이다. 너는 내 안에 존재했었다. 그리고 나의 죽음으로...... 바로 너의 것인 이 모습을 보라. 너는 너 자신을 완전히 죽여버린 것이다.’ 자신을 증오하는 이의 최후이다.

포는 무슨 뜻인지 알 수 말을 되풀이하다가 혼수상태로 죽었다. 그에게 사망이 선고됐다. 그러나 혹시 작품의 주인공처럼 다시 깨어났던 건 아닐까? 무덤 속에서 번쩍 눈을 떴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온몸이 묶여 있고 머리 바로 위에는 딱딱한 나무관만 느낀 건 아닐까. 쾅쾅 손으로 밀고 애처롭게 움직여봐야 아무도 모른다. 이번에는 소설이 아니다. 시신의 손가락과 묘지 안쪽 문고리를 줄로 연결해 준 이도 없다. 아뿔싸, 반죽음 상태의 작가는 그런 식으로 진짜 죽음을 맞이한 건지도 모른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이런 그로테스크한 상상도 하게 된다.

자기라는 공포. 죽음에 대한 공황적 두려움  그리고 어떻게도 제어할 수 없는 운명은 자기 학대를 낳는다. 자신을 괴물로 여기는 자, 에드가 알렌 포는 자신에게 잡아 먹혔다. 그의 마지막 말은 ‘주여, 내 불쌍한 영혼을 도우소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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