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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1. 2021

변신에의 변명

금지된 재현,불타버린 지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한남자


오래전 라디오에서 황당한 뉴스를 들었다. 어떤 남자가 사망했는데 부인도, 가족도 둘이라는 거다. 남자는 오랜 세월 감쪽같이 두 집 살림을 했다. 양쪽 가족들은 자기네가 진짜고 상대를 사기꾼 집단쯤으로 여겼을 테다. 들어보니 그는 6.25 전쟁 이전에 북에서 이미 결혼을 한 처지로 남쪽에서 새 가족을 꾸렸다. 그런데 얼마 후, 북의 가족들을 남쪽에서 우연히 만나 또 한 번 호적을 만들었다. 전쟁 후, 북한 가족들과는 다시 못 만난다는 판단 아래 재혼을 했는데 느닷없이 원가족들을 상봉했다. 남자는 두 아내 모두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양쪽을 오갔다. 그의 죽음 즈음에야 진실을 알게 된 두 가족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본인이 제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남자는 긴 세월을 출장, 지방 근무 등으로 속이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녔겠지. 이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이중/다중 등록부를 가진 이들이 있다고 한다. 사람은 하나인데 서류상으로는 여럿의 삶을 사는 이들이 여전히 있었다.

내가 ‘나’라는 건 나도 알고 가족이나 친구도 안다. 여기서의 ‘나’는 신체와 기억을 포함하는 물리적, 정신적 정체성을 말한다. 반면 가족등록부의 ‘나’는 몇 년 몇 월 며칠 출생, A와 B의 자녀, C의 아내/남편, D의 부모로 건조하게 등재되어 있다. 등록부는 단지 최소한의 확인 절차로 국가 사회가 ‘나’의 정체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마치 그 서류가 없으면 ‘나’라는 개인도 없다는 듯이. 그건 마치 고의든, 실수든 서류가 두 개라면 ‘나’도 둘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은 서류를 필요로 하고 그게 있어야 출생 이후 죽음까지의 삶이 가능하다. 그래서 ID서류가 없는 ‘나’는 개인 정체성이 없는 허수아비이다. 아무것도 아닌 자다.

개인 존재와는 관계없이 등록부가 둘 이상인 사람은 사회적으로 존재 과잉이다. 아예 없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는 형식상 존재 소멸에 해당된다. 그런가 하면 이 등록부에서 저 등록부로 이동하는 사람도 있다. 입양, 범죄 등 자의건, 타의건 사회적 정체성이 변화를 겪는 경우도 있으니까.

내가 나를 증명한다는 걸 처음 생각해본 계기는 고등학교 때 발급받은 주민등록증 덕분이다. 이상했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나는 내가 아니란 건가 싶었다. 두 번째는 이메일을 쓰기 시작할 9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지금에야 식상하지만 처음에는 ID와 패스워드에 대한 사회적 학습이 충분하지 않았다. ID는 통과의례로 필요하다 해도 패스워드는 또 뭔가. 다른 사람의 위조를 방지하는 일이다. 자신을 증명하는 건 난해하고도 어색한 일이다. 인터넷 상에서 ‘나’를 증명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더 정교하고 복제 불가능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누군가 ‘나’ 대신 ‘나’라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써머스비’(1993)라는 영화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나. 남북전쟁에서 돌아와 가족, 이웃과 잘 살던 남자가 알고 보니 가짜였다는 줄거리다.이 남자는 진짜처럼 행세하다가 궁지에 몰린다. 자신이 가짜라는 것만 밝히면 사형을 면할 수 있지만 써머스비로서 행복의 절정에서 죽기로 한다. 진짜 써머스비와는 달리, 그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다. 복사본이 원본을 추월하는 경우도 있긴 한가 보다. 영화가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삼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6세기 프랑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만든 영화다.

이와 비슷한 일이 조선 17세기에도 있었다. 유유라는 사람이 가출하자 다른 남자가 나타나 유유를 사칭한 사건이다. 그러나 16년 만에 진짜가 나타나 가짜 유유는 자살을 했고 진짜는 인륜을 저버렸다 하여 형을 받았다고 한다. 돈, 상속이 얽힌 실종, 사기 사건이다.

이탈리아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는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1904)라는 소설에서 실존의 무게를 심각하게 다룬다. 그는 신문 기사에서 소설을 착상했다고 밝히고 있다. 가짜 써머스비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지만 서류상으로는 소멸하지 않았다. 그저 이동했을 따름이다. 반면 마티아 파스칼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멸된다. 그의 아내가 마을에서 발견된 시신을 파스칼이라고 증언했으니. 그의 사망 소식이 신문에 실렸고 파스칼은 즉시 자신의 부고를 확인한다. 실수다. 제대로 밝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파스칼로서의 삶이 불행했던 그는 그냥 사망자가 되기로 한다. 자기 이름으로 묻힌 객사자를 파스칼로 삼자. 대신 다른 누군가로 살자.

파스칼은 가공의 인물을 만든다. 자유, 실존의 이름으로 살리라.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이름이 무엇이든 가상인물에게도 빈틈없는 설정이 필요하다. 사람은 대부분 경험한 것만 안다. 애써 주조한 인물도 파스칼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거기다가 모든 일에는 자기 증명 서류가 필요하다. 돈을 버는 일, 예금하는 일, 절도를 당하서 고발을 하려 해도 그렇다. 결혼도 그놈의 행정 절차가 필수적이다. 파스칼이 만든 새 인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 이름으로는 도무지 할 수 있는 게 없다. 결핍된 삶이다. 사회적 신분이라고는 없는 새로운 가짜도 죽어야 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한 남자’(2018)는 타인과 호적을 맞바꾼 사람의 이야기다. 한국은 영토 크기가 작고 중앙집권적이며 공교육 시스템이 완비되어 물 샐 틈이 별로 없다. 더군다나 요즘은 각자 유튜브, 카톡,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무장하고 있어 비밀이나 신비가 사라진 지 오래다. 현재의 나를 벗어나고 싶어도 피하기 어렵다. 내 방 은둔 아니면 대안이 없다. 그런데 ‘한 남자’의 주인공은 가짜임에도 용케도 취직하고 결혼해 아이까지 두었다. 외진 곳에서 상처 많은 여자를 만났기에 가능했다. 남녀는 단지 그 사람 자체를 사랑했다. 상대의 배경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다니구치가 사고로 죽었는데 장례식에 온 형은 영정 사진 속 인물을 동생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이 남자는 누군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가짜 다니구치는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두 번이나 호적을 세탁했다. 처음 교환된 서류 속 인물은 야쿠자의 자식이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자식이고 싶지 않았을 톄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생이다. 두 번째로 바꾼 다니구치가 좋다. 조용하고 평범한 남자. 말하자면 ‘피’에 하자가 없는 인물이다. 이 남자로 살면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산속에서 힘든 벌목일을 해도 행복하다. 내가 아니라서 행복하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을 모티프로 삼았다. 거울 속 남자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괴기스럽게도 얼굴이 아닌 등이다. 누군가에게는 자기의 뒷모습이 자부심으로 당당하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초라하고 씁쓸하다. 기억되고 싶지 않다. 되도록 지워지고 싶다. ‘한 남자’는 외롭고 고단한 사람이다. 자신에게서 도피해 타인의 인생으로 잠입한 어떤 이. 그는 성공했을까? 타인이 된 남자는 진정한 ‘자기’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산다. 이제야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행복한 이들은 아무리 형식적이지만 이렇듯 등록부를 이동하거나 지우지 않는다. 또 이중/다중으로 갖기도 원치 않는다. 불행한 이들만이 이런 일을 시도한다.

아베 고보의 ‘불타버린 지도’(1967)에는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작정한 이가 등장한다. 어느 날 세상에서 훅 없어진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지도가 있다. 심리적, 물리적 존재 범위의 상징이다. 그 지도가 불탄다. 그래서 한 사람의 흔적이 완전하게 사라진다. 아베 고보는 만주에서 자라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가족과 사회를 덮친 불합리, 부조리를 몸으로 겪었다. 거기다가 소설이 쓰인 1960년대는 일본이 고도로 성장하는 시기이다. 도시화가 급물살을 타고 인간은 몰개성화, 획일화된다. 개인은 미미하고 소리쳐봐야 들어줄 이도 없다. 사람들은 차라리 절박한 현실을 버린다. 사라진 남자를 찾아 나선 흥신소 직원도 실종된다. 지도들이 불탄다.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자살인가, 아니면 스스로 실종 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현재의 ‘나’라는 존재와는 다른 새로운 ‘나’로 살 수만 있다면 이름 바꾸는 정도는 어떨까. 작가들,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방법을 얻고자 필명이나 예명을 쓰곤 했다. 새 이름은 새 정체성을 준다.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에게는 80여 개의 이름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부친과 형의 이른 죽음, 성장 과정에서의 고독과 소외, 잦은 이주 등은 한 개인의 영혼을 해체/분열시켰으리라. 평생 불안, 우울증,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던 페소아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을 테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인물을 만든다. 그와는 다른 신분과 개성을 지녔으니 글 스타일도 다르다. 다중인격의 제왕이다.

가족 등록부의 ‘나’를 바꾸지는 못한다. 서류상으로 실종은 소멸을 자초한다. 그렇다고 타인과 맞바꾸기도 어렵다. 이대로 꼼짝없이 살아야 한다. 페소아처럼 새로운 개성과 이름을 만들면 어떨까. 흠, 그건 가능하다. 제자리에 앉아 잠시만 다른 이가 된다. 페소아는 회사원으로 그럭저럭 지냈지만 집에 돌아오면 변신했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도 보통은 평범한 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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