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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1. 2021

세상 감동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버스트


변화가 필요하다. 없으면 심심해 의기소침하다가 자기 파괴로 치닫기도 한다. 물론 적당해야 한다. 이사, 집수리, 산책, 요리 등은 스트레스 지수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변화도 있다. 죽음, 사고, 이혼, 로또 1등 당첨, 급격한 상승이나 추락. 이런 건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대처하기도 어렵다. 사람에 따라서는 심리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공황장애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질환을 가지면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고 한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주변이 자신을 압박해 오는 것 같다고도 한다. 두려운 병이다. 예전에는 연예인 병이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성행한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는 재앙이다. 그건 무의식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주위 환경이 개인을 압도하는 경우다.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고 통제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일이 움직인다면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아서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많다. 여러 가지가 얽힌 사회에서 심리적, 정신적 증후군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아지는 일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와 반대로 외부 생활을 줄이다 보면 변화랄 게 딱히 일어나지 않는다. 토마스의 만의 ‘마의 산’은 시간을 다룬 소설이다. 단조롭게 사는 사람은 얼핏 보면 긴 시간을 사는 것 같지만 멀리서 보면 단편적이며 평면적인 삶을 산다는 구절이 나온다. 반면 바쁘고 진지한 경험으로 충만한 사람은 시간을 빨리 흘려보낸 것 같지만 멀리서 보면 다채로운 삶을 보냈으므로 주어진 시간의 몇 곱을 사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몇 곱의 시간을 살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지루한 삶을 보내고 싶지도 않다. 물론 지루하다는 건 개인의 주관적 판단일 뿐이다. 산사의 승려, 수도원의 수도사는 비슷한 일을 반복하고 단조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그건 외부 사람들의 시각일 뿐이다. 내부로부터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하느라 누구 못지않게 바쁘지 않을까. 수십 년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농부나 어부, 작은 공간에서 단순한 일을 되풀이하는 직장인들도 지루한 삶을 보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판단은 전적으로 본인이 하는 거니까.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Hysteria Siberiana라는 게 진짜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1992)이라는 소설 덕에 널리 알려진 병이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같은 일을 하고 또 하던 시베리아의 농부는 지겹고 울적하다. 어느 날, 농부는 농기구를 집어던진다. 남자는 태양이 지는 방향을 향해 떠난다. 걷고 또 걷는다.

"아무튼 그것은 시베리아에 사는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에요. 있잖아요, 상상해봐요. 당신이 농부고, 시베리아의 벌판에서 홀로 외로이 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매일매일 밭을 갈아요.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죠. 북쪽에는 북쪽의 지평선이 있고, 동쪽에는 동쪽 지평선이 있고, 남쪽에는 남쪽 지평선이 있고, 서쪽에는 서쪽 지평선이 있어요. 그저 그것뿐, 당신은 매일 동쪽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오르면 밭으로 나가 일을 하고, 그 태양이 머리 위로 올라와 있으면 일하던 손을 멈추고 점심을 먹고, 그리고 서쪽 지평선으로 해가 기울면 집으로 돌아가 자는 거예요."   (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중)


이런 시베리아 농부가 있었다면 그곳을  미친 듯이 황야를 걷다가 죽었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어쩌면 뻔한 삶을 인정한 채 집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때부터는 히스테리를 강박적으로 잠재운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하던 일을 하다 제명에 죽는. 같은 병에 걸린 젊은이들에게는 헛소리 하지 말라고 이따금 충고나 하면서.

단순 반복 작업은 예측 가능한 미래를 만든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다. 그리고 내일도 같은 일상이 되풀이되겠지.’라고 여긴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사람들의 동기나 욕구 등은 단순하지 않다. 정체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다양한 욕망을 지니고 있으리라. 사람은 복잡하고 이들이 만드는 세상은 복잡한 세계, 복잡계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시간은 미세한 틈을 만들다가 결국에는 거대한 파열을 만든다.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는 ‘버스트’(2010)에서 인간 행동이 무작위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소함이나 무작위수없이 되풀이되면 세상이 바뀐다. 그렇다면 변화는 예측할 수도 없는 걸까? 전쟁, 전염병, 대공항 등은 느닷없이 등장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아주 오랜 시간 관찰한다면 인간 행동의 무작위성 조차 어떤 패턴을 보일 것이다. 비슷한 유형을 선택하려는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네트워크에 개인정보나 개인사를 다 보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빅데이터는 온갖 변덕/치기/오류/혼돈/불합리 등도 수집하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유의미한 확률과 통계가 제시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일정한 무늬를 만들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반복된다는 걸 확인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주식 가격의 오르내림을 그래프 화해서 관찰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백 년을 산다면 이런저런 스펙터클을 원 없이 경험하다가 반복 주기를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워낙 짧게 살기에 사는 시간 동안에는 세상이 무질서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 순간 ‘펑’하고 느닷없이 등장하는 파국도 개인, 사회, 국가의 들쭉날쭉한 우선순위를 모아 수천 년간 종합하고 분석한다면 예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시베리아 농부여, 변화 없는 삶을 탓하지 말라. 단지, 그대 수명이 짧음을 탓하자.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는 언제나 증가한다. 외부로의 길이 막힌 곳에서는 작은 파문이 퍼져나가다가 어느 순간 전체에 이른다. 그 파문은 전체에 고루 퍼져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물에 설탕을 넣고 휘저으면 어느 때인가 설탕물이 된다. 어느 부분에서건 한 컵 안에서라면 동일한 맛이다. 이렇게 한 컵 안에서 물과 설탕이 설탕물이라는 평형 상태로 이를 때까지의 그 시간을 우리는 ‘변화’라고 부른다. 불행한 건 그 변화가 컵 안에서만 일어난다는 거다. 고립된 세계 안에서만.

어떤 촉발되는 힘으로 말미암아 빅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항성들은 자꾸자꾸 멀어지면서 뒤로 뒤로 후퇴한다. 별들은 서로 멀리 떨어지고 우주는 무한히 확대된다. 그런데 이것도 풍선 속 분자들 이야기와 비슷하다. 누군가 풍선을 분다. 자꾸자꾸 커진다. 더 이상 늘어날 수 없을 때까지.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엔트로피 과정을 변화라고 보았으리라. 그는 불을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보았다. 불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형체가 없고 제멋대로다. 그것은 힘을 부여하고 만물을 움직인다. 그래서 풍선은 이 에너지, 불의 힘으로 자꾸 늘어난다. 불을 땔 만한 에너지가 외부로부터 주입되지 않는다면 풍선이라는 고립계는 멈춘다. 변화 없이 동시 스톱. 영원한 자동 멈춤, 열적 죽음에 이를 것이다.

그전까지는 불이 있고 움직임이 있다. 만물은 생성하고 변화하며 소멸한다. 세상은 변화, 그 자체다. 계절이 오고 가며 해/달/별이 움직인다. 하루가, 일 년이, 더 오랜 시간도 흐른다. 심지어 산이나 강도 풍화, 퇴적을 거치며 바뀐다. 우리도 생로병사, 흥망성쇠를 겪는다. 자연스럽다. 어느 때는 조절하고 또 어느 때인가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시간은 괴물, 모두 바꾼다.

내적 의욕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삶이 평형상태로 보이기 쉽다. 이런 사람은 외부요인에 예사롭게 기댄다. 작은 일에 집착하고 매달리며 의미 없는 일을 확대 해석하려 한다. 그런 일마저 하지 않으면 시간이 멈추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못내 변화를 바라는 이들은 화면으로라도 외부세계의 에너지를 빌린다. 죽음까지 동행하는 마지막 친구는 TV라는 말도 있다. 쓸쓸한 일이다.

살아있다는 건 매사가 바뀐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멈춘다는 건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여행이나 경험, 활동 등은 긍정적인 낱말이다. 그들은 변화를 가져오는 에너지를 품고 다. 감동, 세상의 움직임을 몸으로 느낀다는 뜻이다. 외부로부터의 체험은 내 세계를 바꾼다. 그러나 지나친 외부 에너지는 태풍처럼 휩쓸어 가난한 내면만을 남기기도 한다. 강약 조절은 언제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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