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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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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자, 군중과 권력


TV에서 ‘자연인’을 보았다. 어떤 남자가 도시와 사람에 지친 나머지 산골 오지에서 혼자 산다는 내용이다. 만나는 이 없이 한 달이 훌쩍 지나갈 때도 있다고 했다. 그를 은둔형 행동파로 부르고 싶다. 관계 축소가 목표 이리라. 많은 이들이 바라는 ‘평화’를 얻었을까 생각해본다.

각자의 아이돌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지하철이나 지하상가의 거대한 벽면이 가수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진과 글귀로 장식되는 일도 흔하다. 연예인에게만이 아니라 정치인에 대한 팬덤도 숨기지 않는 시대다. 아이돌 Idol이라는 말 자체가 우상이라는 뜻이다. 신도들은 숭배를 통해 소속감, 안정, 희열을 느낀다.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동시에 에너지를 뿜어낸다면 그 위력은 대단하겠지.

생각이 다른 이들은 그 에너지가 낯설다. '그들'은 '우리'에게  늘 두려운 존재다. 외부 에너지에 자신이 흡수되는  참기 힘들다.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거나 무관심을 가장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도망자가 되기도 한다. 은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피하는 경우다. 이 경우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된다.

광신이라는 말은 원래 종교 용어로 쓰였다. 종교로 무장한 이들은 두려움 없이 죽음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기원전 73년에 로마군이 유대인 최후의 보루 마사다에 진격했는데 967명 중 살아남은 이는 노인과 어린이 등 10명 미만이었다고 한다. 보통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는 만 명 이상의 적군과 싸울 엄두를 내지 않는다. 열심당원들과 민족주의자들이라 가능했다. 일본 옴진리교, 스위스와 캐나다 태양의 사원, 미국 천국의 문 등은 집단자살이나 살인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이들 행위의 밑바닥에는 종교와 광신이라는 불가분의 관계가 놓여있다.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의 세월 동안 금송아지를 섬겼다고 한다. 우상 숭배는 거부해야 할 행위지만 누구나 빠지기 쉽고 또 기꺼이 행하기도 한다. 자주 지나다니는 등산로 빈터에 높은 탑이 세워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탑을 싸고 빙글빙글 돌며 무언가는 비는 이들을 본다. 사람들은 권위에 복종하고 싶어 한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저서 ‘군중과 권력’(1960)에서 ‘군중’과 ‘권력’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몇몇 종교의 추종자들은 신의 폭력을 갈망한다. 신의 힘이 삶에 강력하게 개입하기를 기다린다. 명령에의 기다림과 순종에의 각오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왔다. 그러나 신은 멀고 세속 권력은 가깝다. 사람들은 권력의 속성을 주위 사람들이나 상징체계에 투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자의적인 판단으로 집단을 분류하고 자기편을 선, 상대 집단을 악으로 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발맞추어 한국인들은 ‘내로남불’이라는 희한한 사자성어도 급조했다. 나는 약하다. 그러나 내가 속한 집단은 나를 확장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멸치나 정어리 무리를 보라. 전체가 한 몸이 되면 고래보다 거대하고 상어보다 위협적이다. 군중은 구속 상태로부터의 해방, 에너지의 폭발과 방출 현상이 일어날 때 생성된다. 그들은 성장, 평등, 밀집, 방향의 속성을 갖는다.

집단 내부 구성원은 평등하며 외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사람들과의 유대감과 위안이 환상처럼 몰려든다. 그래서 명령과 권력이 결합하고 군중이 복종할 때 군중은 끔찍한 범죄도 저지를 수 있다. 죄책감도 사라진다. 신의 권력은 각종 제도나 상징 등으로 되살아나 사람들을 제압한다. ‘세계 없는 머리’가 ‘머리 없는 세계’를 지배한다.


1930년대 독일의 군중 집회 다큐나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을를 보면 인간도 기계가 될 수 있음을 절감한다. 그 기계들은 ‘세계 없는 머리’의 충실한 손발이 된다. 광신이 군중 심리와 결합하면 상대를 향한 잔인함도 여과 없이 발휘한다. 군중은 이제 ‘머리 없는 세계’이므로 권력에의 충실한 순응자가 된다. 아니, 권력은 오히려 가련한 개인의 보호자로 보이기도 한다.

‘유형지에서’(1914)는 카프카 단편 중에서도 인상적이다. 이 소설은 광신과 그 말로에 대한 끔찍한 증언이다. 유형지 장교는 옳든, 그르든 제도에 반기를 드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다. 제도의 총화는 처형 기계이다. 반항하는 자는 이 기계로 처단되어야 한다. 처형 장치는 12시간 동안 바늘로 죄수를 찔러서 죽인다. 그는 기계의 완벽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삼는다. 죽음이 그를 온전히 데려갈 때까지 처형 기계 안에서 꿋꿋하게 버틴다. 장교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불합리가 만든 법을 숭배하는 자의 부조리한 최후다. 그는 제도와 정의를 구분하지 못한다.

의 장편 ‘소송’(1925) 권력에 희생되는 개인을 다룬다. 남자는 어느 날 아침, 당국으로부터 체포된다. 이유도 모른다. 이럴 수는 없다. 장난이 아닐까. 그러나 법원의 명령은 확고하다. 남자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결국 수포가 된다. 죄 없음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누구든 유죄보다는 무죄를 증명하는 일이 훨씬 어려울 테다. 그는 결국 사형당하고 만다. 어처구니가 없다. 제도나 관습은 개인보다 크고 위압적이다. 처음에는 인간이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인간에게 숭배를 요구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리치 감독은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순응자 The Conformis’(1970) 통해 추적한다. 사람들은 보통 남들처럼 살고 싶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 평범한 일도 간단하지가 않다. 평범하다는 건 남들처럼 사고하고 남들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는 뜻일까? 파시스트들의 시대, 혹은 스탈린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나? 주인공은 주류를 택한다. 다수 안에 있고 싶다. 군중은 안전하다. 독자적인 생존은 불가능에 가깝다. 살아남으려면 본래의 나를 버려야 하나.






시간이 흐르면 정상으로 보였던 일이 비정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내 믿음의 기원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 신념이 우스꽝스럽게 끝나기도 한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들은 단기적이다. 짧게 산다. 그나마도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나중에 부끄럽지 않을 신념을 사람들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예제, 봉건제, 중세 종교나 유교 시대에 굳건했던 그 믿음은 그때로 끝났다. 만일 수백 년 사는 사람이 있다면 허무주의자, 방관자, 회의자, 아니면 진짜 광신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몇 년 후에는 곧 변할 사람들의 생각을 비웃는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밈 meme이라는 용어만들었는데 디지털 시대를 맞아 시의적절하다. 그는 문화 전달 도구로 진 gene 대신 밈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밈은 문화 모방 인자다. 진이 물리적이라면 밈은 심리적이고 정신적이다. 강력한 밈은 바이러스처럼 무한하게 복제되며 전염력도 강하다. SNS는 밈들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기에 적합한 매체이다. 내 편을 많이 만들수록 내 밈이 오래 살아남는다. 대다수 사람들이 진을 통해 영생을 꿈꾸는 것과 비슷하다.

직접 접촉은 피하지만 웹상의 교제에는 적극적이고 능숙한 사람들이  있다. 가상 친구들이 자기를 응원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사람들은 내 서클을 원한다. 서클이 크고 다양할수록 풍요롭다고 느낀다. 그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으로 자기 생각을 퍼뜨린다. 인싸나 인플루언서로 환호를 받기도 한다. 남에게 ‘좋아요’를 원한다는 건 자기 생각을 공유하고 응원받고 싶다는 거다. 세상이 디지털화되고 하이-테크화 됐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늘 타인의 시선, 사유에 움직이는 일이 많다. 내가 나를 지배한다기보다는 타인이 나를 기획한다. 타인이 기획한 나, 그걸 아바타 혹은 로봇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가혹하려나.

선도적인 사람들은 ‘밈’을 퍼뜨리고 그 외 다른 이들은 자발적으로, 유행으로, 혹은 강요로 이런저런 밈을 수용한다. 내가 나에게 온전하지 않다. 타인들의 밈meme, 조상들의 진gene이 모인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다 빼면 아무것도 없는 허깨비가 될지도 모른다.

이불 밖 세상은 두렵다. 샤르트르의 ‘닫힌 방’(1943)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타인의 존재 자체가 고통이다. 불빛이 꺼지지 않는 곳, 그러나 거울은 없는 방에 세 명의 인물이 갇혔다. 나는 나를 보지 못하지만 상대는 나를 샅샅이 살필 수 있다. 셋은 언제까지나 서로를 의식해야 한다. 나의 의미는 사라진다. 오직 타인만이 나를 판단하고 규정한다. 지옥은 타인이고 타인은 지옥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닫힌 방’에 머문다. 언제든 문을 열고 나갈 수는 있지만 ‘닫힌 방’의 일원으로 남고 싶다. 사람들과 같이 있으려는 건 본능이자 욕망이다. 세상에는 이 자연스러움을 이용해 힘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넘친다. 광신, 권력, 우중, 군중, 강압적 밈으로부터의 이탈은 쉽지 않다. 디오게네스는 인간관계를 불 대하듯이 하라고 했다. 너무 가까이 가면 타버리고 멀어지면 춥다. 큰 불, 거센 불은 두렵다. 그렇지만 얼어 죽을 정도가 되어서도 안된다. 언제든 조화가 문제다.

이 공간이 조용하다. 창문을 연다. 순간 거리로부터 소음이 몰려든다. 창문을 타고 빗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침묵은 사라졌다. 공간은 이내 소란으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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