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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5. 2021

조르주 페렉의 쓰기, 허무의 극복

인생사용법


 '성 앙투안느의 유혹'이나 '보봐리 부인'은 권태로부터 시작한다. 플로베르가 창조한 두 인물, 앙투안느와 엠마는 반복적 일상에 세상만사 따분하고 피곤하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소외나 상대주의를 반영한 인물들이다. 20세기의 세계 대전과 이념 실험을 겪은 인류는 권태보다는 허무와 친숙하다. 권태가 개인적이라면 허무는 집단 경험과 관련이 깊다.

허무하다는 건 발밑이 더 이상 고형으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안전함을 부여한 기존 시스템이 무너진 결과다. 미래 가치는 모호이며 독려받던 집단 목표도 사라졌다. 도덕률, 법과 같이 단단하게 보였던 것들이 부유물이 되어 흘러 다닌다.  

격변을 경험한 이들은 심리적 외상을 치유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 임레 케르테스, 파울 첼란처럼 직접/간접 겪은 이들뿐 이니라 동시대인이라면 누구나 상처 투성이라 할 만하다.

어떤 이는 살기 위해서만 산다. 사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그래도 살아보려 한다. 가는 실 끝이라도 잡으려 하다. 끈이 없다면 그나마 살 필요도 없다고 여긴다. 작은 부유물에라도 대롱대롱 매달린다. 이것 말고는 딱히 삶을 붙들어 주는 구심점이 없으므로 열렬히 매달린다. 남들은 그가 삶에 극진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랑이 너무 별나서 다들 고개를 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몸부림친다.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거다. 그거나마 아니라면 뭐하러 하찮고 비루한 삶을 유지해야 하나.

허무와 편집광을 연결시킨 대표작으로 조르주 페렉(1936~1982)의 ‘인생 사용법’(1978)을 들고 싶다. 섬세한 작품이다. 독자들은 어떤 퍼즐이 성벽의 어느 부분인지 미세한 부분까지 주의 깊게 따라가야 한다. 이야기는 잘게 분해되어 있으므로 놓치기가 쉽다. 퍼즐 조각이 맞닿아야 할 다른 조각의 곡면들도 염두에 둔다. 각각의 편린은 무엇 하나 허투루 보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조각들이 모여야 큰 그림을 만든다. 그의 쓰기는 추리물 이상으로 정교하고 또 힘겹다.


바틀부스라는 백만장자가 있었다. 스무 살이 되자 자기 자신에게 질문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그러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하고 싶은 일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인생계획을 짠다. 정신적, 논리적, 미학적 영역을 고려해 ‘무에서 출발해 사물을 변형시킨 다음, 무로 돌아올 것’이라는 삶의 원리를 완성한다.


바틀부스는 이런 무의 원리를 바탕으로 원대한 계획을 짠다. 일단 10년간 그림을 배운다. 그다음 20년간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15일마다 같은 크기의 작품을 그려 퍼즐 제작자에게로 보낸다. 힌트가 될 만한 초안, 초벌은 물론 메모도 삭제한다. 퍼즐 제작자는 그가 보낸 500점의 그림을 판에 붙인 다음 750개의 직소 퍼즐로 자른다. 여기까지가 30년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바틀부스는 그 후 20년 동안 15일마다 한 개씩 퍼즐을 맞추기로 한다. 그 후 재조직된 퍼즐 그림은 판에서 떼어내 본래 그려진 500곳 각각의 장소로 돌려보내진 후 세척액에 담겨 백지가 된다. 연대순으로 하자면 1925년부터 1935년까지 수채화 배우기, 1935년에서 1955년까지 바다 풍경 그리기, 1955년부터 1975까지는 퍼즐 맞추고 지우기이다. 전체 50년이 걸릴 것이다. 이것이 바틀부스가 붙잡고 있어야 할 위태로운 부유물이다.

바틀부스는 긴 세월을 끊임없이 작업하지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이 남자의 생애 계획이다. 기억도, 프로젝트도 무가 되기 위해 잠시만 존재한다.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프로그램”이다. 그가 할 일은 유희에 가깝다. 허무로써 허무를 잊으려 한다.

그러나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바틀부스는 1975년, 퍼즐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분명 마지막 조각으로 X자 모양이 필요한데 W자 모양만 남았다. 퍼즐 제작자의 술수며 농간이다. 바틀부스의 평생 수고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그렇게 집중해서 퍼즐을 맞추었건만 어디에서 잘못된 거지? 삶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노인에게 충격이 컸겠지. 퍼즐을 다 맞춘다고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무를 확인하려던 작업이 별안간 뚝 그쳤을 뿐이다. 편집광의 최후로는 멋진 실패이다.

작품은 장르 소설로 구획할 만한 구조물이 아니다. 굳이 장르를 정한다면 페렉이 부제로 정한 ‘소설들’이 아닐까. 수많은 삶을 백과사전식으로 모은 단편소설 묶음이라 할 법하다. 작품은 5부 9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렉은 파리 시몽크뤼벨리에 거리 11번지 아파트의 과거와 현재 거주자들 수십 명에 대한 추억, 그들 한 명 한 명의 작은 이야기들에 ‘소설들’이라는 영광을 준 것일 테다.

작가는 이 아파트에 사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양을 비등하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바틀부스조차 99장 중 불과 세 개 장에서만 주인공으로 나온다. 물론 그는 이야기의 중심인물이다. 아파트 사람들은 어떤 계기로 바틀부스와 관계를 맺고 그 이웃이 또 다른 거주자들과 연결된다. 공간은 기억을 품는다. 작가는 아파트 평면도를 그린 다음 각 방 거주자들의 이야기를 차례차례 배치한다. 각 방의 등장 순서는 가로세로 순차가 아니다. 독자는 각 장에 나오는 인물들이 우연히 임의로 선택된 걸로 짐작한다. 그런 자의성은 페렉 스타일이 아니다. 모든 건 처음부터 치밀하게 기획되어야 한다. 알고 보니 작가는 100칸이나 되는 곳의 거주민들을 중복하지 않고 소개하기 위해 체스 나이트의 행마법을 이용했다고 한다.


아파트 전체가 가로 10, 세로 10의 100칸 구조이므로 원래는 100장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어야 한다. 그렇지만 작가는 퍼즐과 체스판의 행마법을 이용해 99번째로 이야기를 마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평범한 독자로서는 도저히 마법 같은 글쓰기를 이해하기 힘들다.


내용상으로 볼 때 놀라운 점은 퍼즐 제작자, 윙 클레의 숨은 승리다. 관념의 남자, 바틀부스는 살아보지도 않고 ‘무’를 선택했다. 그는 전쟁 전에는 유럽을, 전쟁 동안에는 그 외 대륙을 돌아다니며 수채화를 그렸다. 파리 아파트 사람들이 우여곡절의 20년을 보내는 동안 세상과는 관계없이 유유자적했다. 반면, 윙클레는 도제로 시작해 기술을 익히고 평생 자기 손으로 일해 먹고 산 인물이다. 아내를 사랑했고 배신을 겪었으며 마음에서 그녀를 지우기도 했다. 그는 현실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바틀부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행-연결-말소의 법칙을 수행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변인들은 모두 돈 많은 그의 동조자이다. 윙클레도 하수인 중 하나겠지. 그런데 이런, 바틀부스가 아니라 윙클레가 한 수 위라니! 바틀부스의 허무주의와 관념은 윙클레의 생생한 삶에 참패했다. 퍼즐 제작자는 조물주다. 그는 퍼즐의 미래를 안다. 윙클레가 바틀부스를 쥐고 흔든 셈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게 한 이는 바로 작가, 페렉이다. 독자들이 혼란스러울까 봐 친절하게도 1833년부터 1975년까지 아파트 거주민들의 ‘연표’를 작성했고 ‘작품에 서술된 이야기 목록’ ‘찾아보기’까지 만들었다. 아파트 평면도와 입주자들 목록, 이런 부록들도 포함하다 보니 책이 두툼하다. 그런데도 독자는 뚜렷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방과 방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크고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 간극의 형태는 직소 퍼즐의  옆 곡면처럼 불규칙해서 그 틈을 좁히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 독자는 바틀부스처럼 퍼즐 풀기에 좌절을 느낀다. 작품은 쓰기 자체를 위한 논리적 추리물이다. 독자는 저 멀리 달려가는 그의 그림자를 좇고 싶지만 허사다. 작가는 형식과 구조를 매우 사랑하는구나. 이것만도 어려운데 수학 공식, 퍼즐, 체스 행마법까지 사용하니 전체 그림을 따라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페렉의 작품을 몇 권 읽었다. 그의 세계, 그가 가공한 세상은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안개속에 있지만 주춧돌, 기둥, 창, 벽면, 기와지붕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인다. 섬세한 색까지 또렷한 집. 그런데 만질 수는 없다. 그 안에 살고 있는 그림자는 볼 수 있으나 가까이 다가가 만지는 순간 공기 속으로 사라질 공중 저택이다.

작가는 이 공중 저택에 건조하고 무심한 이야기를 풀어 넣었다. 최소의 문장, 수식어 절제, 감정 제어는 기본이다. 본심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변에 성을 쌓는다. 하지만 독자의 페이소스조차 막지는 못한다. 페렉은 인생 사용자들이 백과사전처럼 모여있으므로 들여다보라고 한다. 그들 중 아무에게도 관심 없다는 듯 쿨하게 매뉴얼을 던져준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복잡한 장치를 한다 해도 독자는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서정성 그리고 애조를 놓치지  않는다.     

페렉은 폴란드계 유태인이다. 부친은 2차 대전에서 전사했고 모친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바틀부스의 허무는 페렉의 허무이다. 지난 세기의 권태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 부정을 뜻한다. 미증유의 공허를 이겨내고자 이렇게 애를 쓴 것일 테다. 그의 쓰기가 바로 윙클레라는 존재. 윙클레 같은 거대한 힘이 자신을 일으켜 세우길 간절하게 소망했으리라. 허무에의 의지를 꺾어버릴 만한 빛나는 힘. 바틀부스는 졌지만 페렉은 승리했다. 작가는 조악해 보이는 삶에 질서와 미를 부여했다. 그는 실험적 쓰기에 헌신한 삶을 살았다.

조루즈 페렉은 ‘문학이 없다면 죽음을!’이라는 매니페스토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왜 아니겠는가. 그것 아니면 공허가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최대 속도로 달려갔다. 절실했다. 덕분에 그가 만든 신기루는 찬란하게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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