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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6. 2021

쓰기, 성찰


글쓰기는 고통이다. 내 마음처럼 표현할 수 없으니 괴롭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도 ‘언어의 한계가 세상의 한계’라는 말을 했다. 보통은 자기 언어만큼만 사고하므로 그 정도만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내 마음은 내 글보다 복잡하고 다채로워 필력으로 담을 수 없다며 반박하고 싶지만 부정할 여력이 없다.

사람들은 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일단 글쓰기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문장 만드는 일이 두렵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에서 은근히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걸 방해해 왔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쓰기는 성찰로 유도하는 행위이다. 사회는 오래도록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구별하는 데에 관대하지 않았다.

누구든 초등학교 입학하고부터는 문자 세례를 집중적으로 받는다. 과거 문해는 듣기와 읽기에 국한되어 있었다. 듣기 교육은 한 사회가 지향하는 규범이나 질서와 관련이 있다. 읽기 교육은 정보 처리, 해독 능력 등으로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주입한다. 두 가지 모두 말하기, 쓰기에 비해서 수동적이며 기성 질서로의 편입을 목표로 한다.

반면 쓰기는 교육과정 자체가 충분보다는 필요 범위로 제한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많이 읽는다 해도 자기 문장을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일이다. 문장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포기한 경험이 다들 있을 것 같다. 또 어려움을 무릅쓰고 쓴다 해도 자신이 아는 것과 머리를 거쳐 나오는 문장들은 다르다. 좋은 문장들과의 갭이 크다. 심지어 좋은 문장을 안다는 것이 쓰기를 방해하기조차 한다.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글을 뭐하러 쓰나, 스스로 묻다가 포기한다. 이런 일이 누적되면서 좋은 글과 내 글의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교육의 부재, 방임 그리고 그 씁쓸한 결과.

글은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말이 일차적 언어 행위로써 직접적, 즉흥적이지만 글은 간접적, 체계적이며 정밀하다. 또 말보다 오래가고 거리에 방해받지 않는다. 문명은 글이 품고 있는 지식과 지혜에 시공을 초월해 접근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해 왔다.

처음 써보자고 결심한 날이 기억난다. 흰 바탕 화면. 아무것도 없는 스크린. 그곳에 무언가를 채우려 했다. 머릿속은 복잡하다. 실타래처럼 엉켜있는데 저 화면은 반대로 저렇게 환하고 희구나. 아마추어 화가의 텅 빈 캔버스 같은 공포 덩어리. 나에게 말을 건다는 것, 그것이 쓰기의 진짜 얼굴이었다. 부끄럽고 무안하고 민망했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존재론적 고민이라고 불러야 할까? 보통은 나를 잊고 산다.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면 되지 굳이 부르고 대화할 필요는 없었다. '나'라는 자아와의 만남을 거부하는 저 힘은 어디로부터 기인할까?

쓰기 교육을 방관하고 간과하는 문화는 집단주의 문화와 관계가 있다. 오랫동안 일반인들에게는 생각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배 계급의 이념에 어긋나는 말이나 글은 반역이 되기 일쑤였다. 입을 다물고 표현하지 않는 편이 안전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동방의 신은 얼굴이 없다는 말로 우리의 몰개성을 넌지시 언급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사회는 순응하는 사람들을 선호해 왔다. 생각을 펴는 사람을 불편하게 여긴다. 의문 품는 이를 불순하다고 낙인찍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다르게 생각하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까지 있을까.


‘성찰’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이 한 일을 깊이 뒤돌아보는 일’이다. 행위에 대한 반성, 반영에 대한 심사숙고와 같이 메타 인지와 관계있다. 이러한 사유, 고찰 등은 우리식 고속성장과 맞지 않았다. 좌우를 돌아볼 시간에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스탈린의 집단화 시절을 다룬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구덩이’에서 보셰프라는 인물은 남들이 기계처럼 자동으로 움직일 때 자주 생각에 잠긴다는 이유로 해고된다. 전체주의 사회는 개성을 용납하지 않으니까. 성찰은 개인, 독립으로 나아가는 도정이다.


글쓰기는 성찰에의 접근을 돕는  좋은 방법이다. 다른 예술 활동이 은유적이고 추상적인데 비해 글쓰기는 인간 의사소통과 관련된 행위로 즉각적이고 직설적이다. 목적이 이유가 된다. 즉 쓰기 위해 쓰는 것이다. 쓰기가 되풀이될수록  ‘나’를 사유하는 일도 잦아진다. 20세기 초에 구조주의, 분석철학 등이 세계 철학계를 휩쓴 까닭이  여기 있을 것이다. 언어를 통해 인간 존재를 탐구하려는 열망일 테니까.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을 풀어서 정리하는 작업이 보통 사람들의 글쓰기이다. 뒤엉킨 사고가 연결되고 조직되어 어떤 형태를 갖추게 될 때까지 실을 풀고 감는 일. 말이 말을 낳듯이 글도 쓰다 보면 점점 이치에 맞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열정이 방향을 가리킨다면 의지는 무지를 이겨내겠지.

이제 이런 조직화, 구체화 작업이 거꾸로 성찰에 영향을 다. 글쓰기는 ‘나라는 사람’, ‘생각 구조’, ‘추구하는 방향’을 스스로 찾게 한다. 길을 뚫어줄 준비만 하면 우리의 뇌는 제 갈 길을 찾아가리라고 믿는다. 어느 길을 갈까, 어떤 식으로 갈까, 어떤 길과 마주칠까, 바로 ‘성찰’이고 메타 인지 행위이다. 이런 일들이 삶의 지향점으로 연결된다. 쓰기가 성찰, 그리고 삶으로 귀환하는 지점이다. 쓰기라는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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