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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7. 2021

은밀함을 꿈꾸다

마스모토 세이초


커튼의 안쪽을 들추지는 않고 상상만 하라는 고전 영화들이 아름답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잉그마르 베리만, 루이스 부뉴엘 같은 감독이 좋았다. 왜?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서. 그들은 관객에게 꿈꿔도 될 만큼의 여지를 두었다.

문학 작품이나 고전 영화를 좋아하는 건 말하려고 하는 걸 은근하게 감추기 때문이다. 보자마자 아는 건 재미가 없다. 약간의 수수께끼나 문제풀이가 더 흥미진진하다. 인간은 원래 게임의 동물, 호모 루덴스 아닌가. 권선징악 스토리, 명령, 충고는 누구든 쉽게 할 수 있다. 그건 직설화법이다. 아이러니도, 메타포도 없다. 숨김이 없는 거다.

예술을 사랑한다는 건 감춰진 것, 묻혀 있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에 다 보여주고 또 보이는 건 예술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건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다. 보드빌이나 르포르타주는 예술 장르와는 다른 표현 방식을 갖는다.

A=A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고 A=A’=B=A’=A라고 돌려 말하는 것, 이것이 예술이 가는 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중세 성화나 신화 캐릭터로 표현된 알레고리 화들은 예술적이다.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화, 푸생, 루벤스는 말할 것도 없고 다비드조차 그렇다. 낭만 화풍의 창시자인 들라쿠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이념이 드러난 작품이다. 가운데 가슴이 드러난 여성은 피를 흥분시킨다. 그러나 그녀는 실제 민중과는 거리가 있는 ‘우의화’된 여신이다. 깃발만 살짝 들어도 남들이 기를 쓰고 달려와 결집하게 한다. 관념의 이미지, 알레고리의 힘이다.

존 컨스터블은 영국 낭만 풍경화의 거두이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구름과 물이 눈에 많이 띈다. 그는 유동적이며 계속 변하는 자연물을 통해 감각 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냈다. 그의 작품은 ‘덧없는 세상을 사랑하라’는 구호와 같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구름이 감정의 구현임을 깨닫게 된다. 물도 마찬가지다. 같은 물을 그릴 수 없다. 오늘의 물은 어제의 물과 다르다. 1분 전 구름이 다르듯이 1분 전 물 또한 같지 않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무쌍을 사랑하는 화가의 철학이 드러난다.



<John Constable, The  Valley Fame,1835>



스탕달이나 플로베르는 리얼리즘 문을 연 선구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이 '사실적'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리얼리즘은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고 출발했다. 그것은 신과 이데아의 세계를 거부하고 인간이 주도하는 허무의 세계관을 내포한다. 내 감각이 정확한 측정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으리. 우리는 세상을 판단할 만큼 명료한 지식이나 인식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한 작가가 선택한 인물의 말과 행동이 세상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이 작가들이 빛나는 이유는 리얼리즘을 빙자해 큰 세계를 드려내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세상은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선택되지 않은 것,  감춰진 것들에 의해 주도되기도 한다.  '적과 흑’, ‘감정교육’은 다양한 비평과 해석을 낳았다. 이 작가들은 앞면이 아니고 뒷면까지 암시하는 아이러니의 대가들이다. 수많은 개별자의 이야기로 세계, 보편을 가늠하게 한다.

작품은 사건이나 사실 자체가 아니다.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는 굳이 한반도의 1980년 5월 만을 기억하게 하지는 않는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이 스탈린 체제에서 총살당한 부하린만을 모델로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제 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고 ‘네차예프 사건’을 떠올리겠으며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굳이 자서전이라고 할까. 만일 폴 매카시의 조각이 해부와 난도질만을 기억하게 한다면 포르노에 불과할 뿐이다. 예술은 다의적, 심층적이다.

예술은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한 번에 보여주기는 시시하고 남들도 아는 걸 새삼 알려주는 건 진부하다. 예술은 다른 방식으로 보는 일이다. 안 보는 것, 못 보는 것, 혹은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게 한다. 생채기를 끝까지 들여다보고 그걸 꾹꾹 누르거나 파헤쳐 상처가 덧나고 고통에 겨워 소리를 지를지언정 끝까지 파헤치는 잔인함이나 인내도 필요하다. 비밀을 알고 있음에도 은밀하게 드러낸다. 발단이 된 모티프는 수단일 따름이다. 작품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예상치 못한 사람들도 감동하게 한다. 관객이나 독자는 그 작품으로 다른 세계를 비행할 수 있다. 만일 작품이 단서에 집착하거나 사건 해결에만 힘을 기울인다면 예술이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알 권리를 말한다. 다 알아서 뭐 할 건가 싶은 마음도 든다. 어차피 인간은 태곳적부터 속고 속여왔다. 샅샅이 파헤친다는 행위가 가진 순작용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작용에 더 관심이 가는 건 왜일까. 세상에는 숨겨진 이면, 누군가의 모함, 충절, 가짜, 진실이 얽혀 있다. 우리는 진실이 무언지 잘 모른다. 아마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죽어간 이들조차 사실은 잘 모르지 않았을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을 가끔 읽는다.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이다. 그는 사회 논픽션인 ‘일본의 검은 안개’(1961)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안갯속에서는 무엇이든 뚜렷하지 않다. 결말은 있되 무엇이 원인이고 그 과정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 수 없기에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 같다.

작가의 치밀함에 놀란다. 그는 가설을 만들기 전에 시대적 배경을 꼼꼼하게 살핀다. 그리고 거기서 도출되는 가정을 밀고 나간다. 그는 이 가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문서/사문서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물론, 실험까지도 불사한다. 가령 시체를 운반할 때 드는 힘, 사체 운반 시 목격자와 마주칠 가능성을 체크한다. 화학 약품 제조자 및 검시관과의 인터뷰도 거친다. 세심하게 검증하여 자신의 가정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독자들은 절로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게 한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글을 읽고 있자면 흑막을 감추고 있는 모기관이 모든 걸 감시/기획/집행하다는 귀납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소위 음모론이다. 세상에는 우연이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이 꾸민 음모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논리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속이 시원하다. 내가 당하는 것에는 누군가의 책임이 있다고, 사회 체제의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책임회피의 의미도 있다.


세상에는 논리도 있겠지만 우연이 대부분임을 믿고 싶다. 생각해보면 필연과 우연은 손바닥 뒤집기나 다름없다. 사실은 그게 그거일 것이다. 내가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 좋아하는 것, 오늘 하는 일, 전부 우연인 것 같지만 그 결과는 세상의 철학, 가치관, 나의 행동 양식, 습관 같은 것들이 얽히고설켜 드러나는 ‘결과’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 세상을 사는 이유가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유전자나 습관, 음모, 조작의 필연적인 행위라면 과거에 살았던 수 천억의 다른 인간들이 과거에 다 완료했을 터이다. 이래서 원형에 대해 다시 사고하게 된다. 옛날에 누군가가 해낸 일을 유사한 유전자가 거듭해서 명령하고 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다. 인간성의 하나 남은 출구가 바로 ‘우연’이라는 건데 이걸 못 참아서 이리저리 아귀를 맞추어 필연이라고 소리쳐 입증하는 것. 그게 추리물이다.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세상은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일이 없다. 누군가의 획책으로 조작되는 것이다. 그래도 세상이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두런거림을 애써 믿고 싶지는 않다. 영화 한 장면은 우연한 미장센인 경우도 있고 감독의 치밀한 사전 조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한 신 한 신 분석해서 미술, 음악, 무대 배경, 단어 하나하나 모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너무 꽉 차 빈틈이 사라진다.

논리적 추론을 한다고 파헤치는 건 때로 씁쓸함을 불러일으킨다. 삶의 많은 부분이 우연이라는 믿음도 필요하다. 그런 믿음이라도 있어야 우리의 공간이 좀 여유 있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기획, 집행,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기계 공정과 다름없다. 이렇게 논리로 세상만사를 살피다 보면 수렁에 빠질 게 뻔하다. 그 추악한 본질에 이르렀을 때의 허무, 좌절을 자기 스스로 견디어 내기 어렵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초기 소설 ‘어느 고쿠라 일기 전’(1952)을 좋아한다. 이 주인공만큼 연민을 느끼게 하기도 드물다. 독자는 운명의 쓰라림에게 한동안 먹먹하다. 주인공의 사투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킨다. 장엄한 허무! 처음에는 이 작가도 나오키 상이 아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로 출발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그는 차차 추리 소설과 다큐 전문 작가로 변모했는데 왠지 섭섭하다 ‘점과 선’, ‘모래그릇’, ‘제로의 초점’ 등은 숨이 가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을 수 있다. 그게 문제다. 독자가 자기 자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작가의 포로가 된다. 무장해제 상태로 그의 해석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여운이니 상상력이니 하는 건 사라져 버린다. 독자의 자유의지는 없다. 그 순간, 마쓰모토 세이초는 추리 소설 작가, 논픽션 작가가 된다. 전후의 일본 사회는 검은 안개였고 누군가는 길을 비추어 주어야 했을 터이니. 마쓰모토 세이초 같은 복잡하고 박식한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흠, 그래서 예술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샅샅이 는 건 두렵다. 애써 알았는데 그 사실이 공포와 분노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순수와 어리석음은 동의어일까. 어느 정도 알아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는 걸까. 이리저리 휘둘리고 선동에 속고 스크린이나 매스미디어에 압도된 영혼들이 많다. 나는 거기서 자유로운가. 아니다. 그 정도로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


약간은 어리석을 것, 모르는 체할 것.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양파를 까듯 비밀을 다 벗긴다고 세상이 밝아지는 건 아니다. 약간의 어둠을 사랑한다. 직진하지  않고 에둘러 가기. 예술을 사랑하는 기본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어스름, 모호함의 세계를 사모한다. 예술이란 세상에 보일 듯, 말 듯 얇은 덮개를 씌우는 일이라고 믿는다. 꿈꿀 여지를 주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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