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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8. 2021

발자크, 정념의 세계

잃어버린 환상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소녀’(2000). 제목도 참 이상하지. 발자크와 첩첩산중 중국 여자애가 무슨 상관이람. 그런데 아니다. 옛 프랑스 소설가가 그녀에게 큰일을 저지르게 한다. 소설 캐릭터들은 가상 세계에서만 머물지 않고 튀어나와 현재를 간섭한다. 소녀는 도시라는 감정의 세계로 떠난다. 긴 머리를 자르고 새하얀 테니스화를 신은 채. 소박한 소녀도 들뜨게 하는 이 사람, 발자크가 대체 누군데? 몇 권 읽어보니 그의 소설은 실재만큼이나 또렷하고  생생한 존재들로 가득하다. 시골 여자가 마법에 걸릴 만하다. 인물들은 총천연색, 책 밖으로 나와도 정열로 넘치는 숨을 쉴 것만 같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군에 ‘인간희극 Le Comedie humaine’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원래 기획은 145권이고 완성작만 해도 9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한 사회의 단면을 잘라 기록한 횡적 연구로 이보다 더 상세한 보고서가 있을까. 웬만해서는 다시없을 것이다. 그렇게 정열 넘치는 편집광은 흔치 않을 테니까.

발자크(1799~1850)는 혁명과 반동이 이어지던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그는 부르봉 왕정복고기와 루이 필립 시대의 증인으로 휘황찬란한 작품들을 남겼다. 작품 자체의 양도 그러하거니와 사회 내부의 에너지, 도시/지역의 변화 속도, 사람들의 생존 적응력 등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기에 가능하다.


소설로 보는 거야 흥미진진하지만 그 시절을 몸으로 겪는다는 건 또 다른 의미이다. 오늘의 논리가 내일이면 거부당하는 때였다. 가치와 철학이 부재한 곳에서도 시종일관 위세를 떨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돈이다. 복귀한 브루봉 왕조와 루이 필립은 시대가 달라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왕정이나 교회 같은 구질서의 수호자처럼 보이지만 자본이 자신들의 보호막임을 인정해야 했다. 귀족들과 부르주아의 연정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진짜 주인은 자본가와 그들의 돈임이 분명해진다. 발자크는 권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세계에는 정념이 피고 진다.

발자크는 인간군상들을 통해 이 시대를 총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인간희극’에는 무려 2,500여 명이 출연하고 그중 500여 명은 재등장하기 기법으로 반복해 나타난다. 모두는 서로에게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많은 이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갈등을 벌이며 해내는 일은 다름 아닌 ‘먹고사는 문제’이다. 이렇게 열정을 기울여 ‘하찮은 일’들을 묘사한 작가는 많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사람들의 1차 과제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그 이후에야 사회적 의무와 권리를 수행하고 자아도 실현한다. 사람들은 세속에서의 번영을 위해 전력 질주한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사태를 분석한다. 루이 필립에게 희망을 걸었던 민중의 꿈은 무너졌다. 상부 권력의 한쪽은 과거의 구태의연함으로 돌아갔고 다른 한쪽은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게 부응했다. 이도 저도 아닌 이들의 삶은 시민 왕 이전이나 다름이 없다. 종기는 계속 부풀어 올라 언제든 곪아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발자크는 왕당파이자 보수주의자이다.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익과 권력을 향해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힘을 추적한다.


평등이나 무신론을 설파하는 자본주의가 악의 근원이다. 그는 세상에 병이 단단히 들었다고 진단한다. 사회 병리학자로서 그 모순덩어리를 파헤쳐야 한다.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그가 옹호하던 귀족 계층마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가 발명한 인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걸려 넘어져 신음하기 일쑤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희극이다. 누군가 인간의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발자크가 작품군의 제목을 ‘인간 희극’이라고 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사회학이나 경제사를 공부하는 이들은 그의 소설에서 얻을 게 많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발자크가 ‘현실 사정에 대한 깊은 파악이 두드러진다’고 평했으며 엥겔스는 ‘그 어느 서적보다도 발자크에게서 좀 더 많이 배웠다' 라고 했다. 혁명은 무엇보다 먼저 물질계와 이해관계에서 일어나며, 다음에 관념으로 확대되고, 마지막으로 원칙이 된다.’는 발자크의 말은 사고가 물질로부터 출발함을 뜻한다. 그의 소설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에 영향을 준다는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신념을 앞서 반영한다. 

그는 빵이 몇 수우, 몇 상팀인지, 방 하나 빌리는데 몇 프랑인지 알려주는 데에 소홀함이 없다. 옷 하나도 사치품과 일반 보급품의 가격 차이를 세심하게 비교한다. 부자들과 어울리려면 리본, 지팡이, 겉옷 구입에 신경 써야 한다. 여기에서 뒤처지면 고급 살롱에 출입할 자격도 사라진다. 결혼할 남녀는 상대방의 연금, 지대 수입이 얼마고 앞으로 또 얼마를 더 벌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따진다. 상대방의 땅 크기나 위치도 큰 관심사이다. 임대인이라면 거기에서 나오는 곡물이나 이자도 꼼꼼하게 따진다. 지나치게 섬세하게 그려져 결혼이 사랑인지 비즈니스인지 헷갈린다.


자식과 부모, 부부, 형제 사이라도 각자의 이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촌 퐁스' 의 주인공 퐁스 주변의 걸신들린 인물들을 보라. '외제니 그랑데'의 그랑데 노인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딸을 향해 저승에서 결산하자는 유언을 남긴다. '잃어버린 환상'의 세샤르 노인이 아들에게서 돈을 짜내는 행위는 흡혈귀나 다름없다. 아무리 품위 있는 이들도 머릿속으로는 이익을 셈한다. 철학이 부재하는 시대에 돈만이 우상이다. 가난한 자들은 ‘정직 따위의 사치’를 부리기 어렵다. 발자크는 선명하고 솔직하다. 그의 세계는 부유한 자, 돈 버는 데에 새로 눈 뜬 자, 착취당하는 자가 공존한다. 공격과 수성의 경제 행위에 골몰한 인간군상들로 들끓는다.

발자크는 자기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잃어버린 환상'(1837)을 꼽았다고 한다. 왕정복고 시절인 1821년, 소설의 주인공 루시앙은 시골 출신 시인이다. 출세를 위해 상경하지만 파리는 그를 환대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에게도 청운의 꿈이 있었다. 문학에의 헌신을 지상 목표로 삼고 정진하면 만인이 우러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공허한 꿈이었다. 청년은 글솜씨와 외모 외에 가진 것이 없다. 자존심은 풀이 죽고 곧이어 굶주림과 헐벗음이 찾아온다. 피폐함은 추락을 부르기 쉽다. 그의 글은 타락한 저널리즘에, 외모는 향락을 구하는 여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본질을 잡고 있을 때는 가난하다. 반면 고상함을 벗어던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돈이 들어온다. 고귀함은 고향 마을에 두고 왔다. 정신이 자본주의화한 것이다. 루시앙은 하나씩 둘씩 자신을 팔아치운다. ‘나귀 가죽’의 주인공이 타락할수록 나귀 가죽이 줄어들고 생명마저 점차 사그라들었던 것처럼. 루시앙은 부패의 제단에 자신을 바친다. 환멸을 맛보기 위해 인생을 판다. 파리는 절망의 실험터이다.


이런 곳에서도 성공하는 이들이 극소수 있기는 하다. 촌뜨기로 상경한 라느티냐크, 그도 ‘고리오 영감’에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누구보다 정의롭고 인간미가 넘쳤었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파리가 윤리 공식대로 진행되는 곳이 아님을 꿰뚫어 본다. 맘몬이 지배자라는 걸 알아본다. 그는 상류층 애인, 인맥, 우연, 횡재, 협잡으로 성공한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을 몸으로 실천한다.

라스티냐크와는 달리 루시앙은 실패한다. 루시앙은 거짓 기사, 대필, 과장 기사 따위로 자신을 소모하면서 왕당파와 진보파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인적 네트워크와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늘 자금이 필요하다. 돈, 돈 그리고 돈을 위한 삶이다. 쾌락에는 영혼의 타락이 뒤따른다. 이런 생활은 애인의 장례를 구걸로 치를 때까지 계속된다. 처남도 루시앙 때문에 파산을 하게 돼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런 자신이 한심하고 증오스럽다. 파산해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지금부터라도 소확행이나 하면 얼마나 좋으랴. 그렇다면 발자크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으려나. 독자로서는 그의 전락이 슬프다. 더구나 삶의 전환점에서 만난 이가 그 유명한 사기꾼 보트랭이다. 순진한 청년은 이제 악당의 꼭두각시가 된다. 그리고 다음 소설, ‘창녀의 영광과 비참’에서는 끝내 자살로 삶을 마무리한다. 소설의 제목이 ‘잃어버린 환상’이니 그에 걸맞은 결말을 맞아야 하겠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발자크의 소설은 세상의 집약도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한 세상을 창조하고 호령하고 수많은 인물을 마음대로 배치한 조물주이다. 나폴레옹이 홀연히 나타나 유럽을 지배했듯이 발자크는 펜으로 세상을 짓고 색채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가 만든 사람들은 바쁘다. 한시도 멈추지 않기에 평온할 수 없다.

인물들은 에너지로 들끓는다. 체스 피스나 바둑돌은 플레이어에 종속되는 반면 그의 군상들은 스스로 걸어 다니며 변화를 이끌 줄 안다. 거대한 놀이판의 캐릭터들은 자기들끼리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그들은 만나고 섞이면서 발화되고 불꽃을 내며 타오른다. 아, 물론 이 세계는 발자크가 즐기는 게임임을 잊지 말자. 그의 눈에는 누구 하나 신비를 간직할 수 없다. 인물들은 이 조물주 앞에서 벌거벗은 피조물이다.

움직이는 시대의 사람들은 돈에, 제도에, 권력에, 고무줄 같은 잣대에 눌러 으스러진다. 이런 세상에는 냉소적이고 음흉한 인물들이 많은 법이다. 그들은 세상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 안다. 슬픈 사람들도 넘친다. 음모가들은 상처 입은 이들을 이용한다. 발자크는 음모가뿐 아니고 혁명가도 키울 줄 안다. 여간해서 눈앞의 사리사욕에 좌우되지 않는 이들이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현실 개혁의 의지를 활활 불태운다. 그의 구두쇠들도 낯설지 않다. 현실의 비정함을  증명한다. 그런가 하면 도시의 그늘에는 거리의 여자들도 늘어난다. 유흥가의 배우, 부자들의 코르티잔, 가난한 시인의 애인 역까지 충실하게 해낸다. 그의 세계와 현실 간에는 도무지 틈이 없다. 증강 현실란 이런 것일 테다.

발자크 이전 이후의 작가들에게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 스탕달, 플로베르, 에밀 졸라 등은 형식론이나 예술지상주의, 유전학 등을 실험하는 데에 작품을 도구로 쓰곤 했다. 그들의 주인공들은 대개 심리적으로 섬세하고 독자적이다. 발자크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사회 속의 한 명일뿐이다. 그 한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도 크게 바뀌는 건 없다. 당대의 전형에 가깝다. 작가는 그럴 법한 사람들을 비추고 들추어 알려준다. 한 면이 아니고 모든 면을 다각도로 보았고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은 개인보다는 사회 연구에 가깝다.

발자크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무엇을 그릴까. 그는 부자들의 후광과 우아함을 사랑하지만 그들의 부패와 위선, 끝없는 탐욕도 증오한다. 그러면서도 도시 빈민이나 지방 소시민의 무례와 몰염치, 몰개성도 혐오한다. 어쩌면 양비론에 휩싸여 이도 저도 아닌 채, 길을 잃은 염세주의자가 되어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발자크는 확대경을 들이댈 것이다. 그라면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의 후일담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상상해본다.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은 우리 중 누군가를 천천히 관찰하겠지. 그런 다음 한밤중에 일어나 금융자본가, IT업계의 신흥 부자뿐만 아니라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영끌 하는 회사원들, 상대의 재산에 실망해 결혼을 망설이는 젊은이들, 폐지를 주어 하루치 밥벌이를 겨우 하는 노인 등을 정밀 묘사할 것이다. 이때 그의 유명한 커피 탐닉 ‘생각이 전쟁터의 대부대처럼 몰려오고 전투가 시작되도록 돕는다.' 발자크는 기록할 것이다. 헛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을. 먼 훗날 ‘잃어버린 환상’에 쓸쓸해할 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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