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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29. 2021

매력도 능력이다?

벨아미, 옴므 파탈


옴므 파탈 homme fatale은 별로 쓰이지 않던 말이다. 남자가 치명적 매력으로 여자를 파멸에 빠뜨린다는 건 최근 들어서나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예전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을 무기로 삼아 접근하는 일이 흔치 않았다. 남성 자체가 능력이었던 세상에서 그럴 필요는 없었을 테다.

프랑스도 신분 질서가 엄격했지만 19세기 이후 부르주아가 득세하면서 계층이동이 활발해진다. 귀족은 돈벌이에 있어서만큼은 시민계급의 능수능란함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이 시기 프랑스는 사회 변화가 극심했다. 구귀족은 자기들의 세력이 밀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했고 신흥 시민계급 역시 한몫 잡으려고 애쓰던 시대였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나 비범한 평민의 자녀들은 입신을 위해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곤 했다. 근대는 행운 fortuna이 아닌 힘/능력 virtus을 받들기 시작한다.

도시에 도착한 시골뜨기를 맞이하는 건 싸구려 하숙집뿐이다. 이 파리에 처음 올라온 이들은 드높은 물가에 절망한다. ‘시적인 데라고는 전혀 없는 가난’이 그들을 기다린다. 외젠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1835)의 외젠 드 라스티냐크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청년이다. 그는 시골 귀족의 자제로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성공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상경한다.

살다 보니 이곳은 그리 순진하지 않다.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출세할 수 있는 곳이다. 라스티냐크에게는 돈도 명예도 없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남성’을 이용해 고리오 영감의 딸들을 유혹한다. 두 여자 중 하나는 대귀족의 아내, 다른 하나는 은행가의 아내다. 그들은 라스티냐크가 파리에서 출세하는 데에 큰 발판이 된다. 심지어 그는 오랜 정부였던 영감의 둘째 델핀의 딸과 결혼한다. 기가 막히게도 엄마와 딸 둘 모두의 사랑으로 막대한 부를 상속받는다. 부유하고 야심 많은 라스티냐크는 정부 고위관리로 승승장구한다. 무일푼이었던 남자는 상류계급 여자들에게 자신의 매력을 상납한 결과 엄청난 성공을 거머쥔다.


앞서 라스티냐크는 지방 귀족의 아들로 왕정복고 시대를 사는 인물이다. 아직까지는 귀족 잔당들의 힘이 평민을 압도한다. 출세하려면 몰락했을지언정 집안의 후광이 필요했다. 반면 ‘벨아미'(1885)는 이미 돈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제2제정을 지나 제3공화국에 접어들면서 집안보다는 돈이 사회의 기선을 잡는다. 자본과 능력이 만드는 무한 경쟁 시대로 진입한다. 시골 농부의 아들인 조르주 뒤르와는 잘생긴 외모로 큰 덕을 본다. 덕을 본 것을 지나 남자 제비의 전형적인 인물로 기록될 만하다.

‘벨아미’는 기 드 모파상의 소설이다. 그의 작품들은 매우 자연주의적이어서 조금 남아있던 삶의 환상마저 확 깨버리곤 한다. 순수한 이상, 고귀함 따위는 그의 펜 아래 잔인하게 부서지고 으깨진다. 그래도 작가의 분석이 워낙 치밀하고 날카로워 독자는 대항해보지도 못하고 수긍한다. 삶은 투쟁이라 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기에 비관적이다.


프랑스 자연주의는 모파상, 에밀 졸라, 공쿠르 형제 그리고 보들레르 등과 더불어 검붉은 꽃을 활짝 펼쳐 보인다. 그 꽃은 언뜻 보면 매혹적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이미 썩어가는 중이다. 부패해 가는 꽃 주위로 쉬파리들이 윙윙거리며 몰려든다. 모파상은 타락한 상류사회를 향해 덤벼드는 그 쉬파리 중 한 마리를 잡아 무섭도록 냉철하게 관찰한다. 그는 ‘세상은 구원받을 만한가?’라고 묻는다. ‘나는 모든 걸 갈망했다. 그러나 어떤 것에도 위안을 얻지 못했다.’ 모파상이 썼다는 비문의 구절이 그의 답변을 대신하리라.


벨아미는 ‘아름다운 친구’라는 뜻이다. 조르주는 미남이다. 어떤 여자든 이 남자를 보면 차가운 눈도 풀어져 부드러워진다. 문학작품의 여주인공들은 대체로 아름답다. 과거로 올라갈수록 더 심하다. 남자 작가들은 자신들의 이상형임에 분명한 여자들을 마음껏 제조해 숭배한다. 외모가 예쁘지 않은 여주인공은 기억에 없다. 성격이 원만하지 못한 여자들은 간혹 있다. 그러나 오히려 까탈스러운 미녀들이야말로 팜 파탈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의 베키 샤프,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의 마농, 에밀 졸라의 ‘나나’의 나나, 서머싯 몸의 ‘인생의 굴레’의 밀드레드 그리고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뷰캐년을 보면 그렇다. 마음씨 나쁜 미녀들의 목록이 길다. 작품 속 여자들의 외모는 무기이고 신분이다.

이에 비해 작가들은 남자 주인공의 외모를 그리는데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는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섬세한 외모의 남자 주인공들은 대체로 비극적이다. 남자들의 미모는 나약함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가질 수 없는 걸 그리워 하지만 이런 연약함으로는 강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 ‘파르마 수도원’의 파브리스,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상’의 루시앙 샤르동, 디킨스의 ‘황폐한 집’의 리처드와 허먼 멜빌의 ‘빌리 버드’의 빌리를 보라. 이 남자들이 옴므 파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에 더 취해야 한다. 이들은 아직 순수한 미남들이다. 그들이 외모를 의식해 치명적 매력을 이용하려면 약육강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야 세상은 댄디, 심미안, 탐미, 권태 등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벨 아미, 조르주가 등장한다. 매력을 수단으로 삼는 남자들이 서서히 많아진다.

조르주는 가난하다. 굶주릴 때도 있다. 집안도 재능도 보잘것없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나 인맥 없는 젊은이는 세상 살기가 버겁다. 그렇다고 약삭빠른 족제비로 변신한 그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정공법을 벗어나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한 조르주는 ‘나쁜 남자’이다.


조르주는 우선 친구의 아내 마들렌을 유혹한다. 그녀는 단지 예쁘고 발이 넓다는 미덕만 갖춘 건 아니다. 남자들만 글을 쓰던 시절, 사회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파악해 기사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그녀는 남편을 키웠고 이제 조르주도 수제자로 키울 셈이다. 마침 타이밍도 알맞게 남편도 사망한다. 내연관계였던 둘은 정식 부부가 된다.

그러나 조르주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마들렌의 후광만으로 그의 야망이 채워질 는 없다. 그는 마들렌의 상류층 친구 클로틸드와 관계를 맺는다. 그는 간통 사건을 이용해 마들렌과 이혼한다.


이제 조르주는 자신을 업그레이드해줄 여자들을 스스로 구해야 한다. 는 신문사 보스인 사장의 아내 비르지니를 유혹한다. 그녀는 일탈이라고는 없던 중년 여성이다. 비르지니는 젊고 잘 생긴 조르주에 빠진다. 비참하게 빠진다. 소설을 읽자면 동정하는 마음도 들지만 우스꽝스럽기도 다. 집착에 빠진 가련한 여인은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을 터이다. ‘사랑에 눈이 먼다’는 표현이 비유만은 아니다. 자흐 마조흐가 쓴 ‘모피 입은 비너스’의 제베린의 여성판이라 해도 괜찮을 정도다. 비르지니는 기꺼이 남자의 노예가 되고 복종한다.

사람이 처참하게 구겨진다는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일 게다. 그녀는 무참한 떡밥이자 먹이인데 마저 벨아미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 모친이 말려도 소용이 없다. 애인을 자기 딸과 결혼시켜야 하는 엄마라니. 끔찍한 일이다.   비르지니가 졸도 소동을 벌이는 와중에도 조르주는 비르지니의 딸과 태평하게 결혼한다. 연인의 장모가 된 비르지니는 앞으로 지옥을 살겠지. 조르주는 마들렌과 비르지니를 버렸지만 클로틸드와의 관계는 유지한다. 클로틸드야말로 벨아미의 걸출한 동료다. 그녀는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켜냈고 질투도 이겨냈다. 그 대가로 조르주의 정부로 계속 남게 될 것이다. 둘은 연애 부문 최고 고수이다.

조르주는 앞으로 장인의 재산이나 지위 등을 기반으로 더욱 비약하게 될 것이다. 남들에게는 없는 ‘치명적인 매력’을 충실하게 살린 결과다. 외모가 무기이자 신분의 역할을 한 셈이다.


‘공정’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능력주의와도 상통한다. 근대 이후로는 개인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사회를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최근 ‘공정’이라는 용어가 착각에 불과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조르주는 자기 능력을 발휘해 기회를 잡았다. 요즘 말하는 학업능력이 아닌 외모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능력/실력이 집안 배경, 유전과 독립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학벌이나 능력도 자본과 유전이 큰 역할을 한다. 조르주의 외모는 집안 유전자의 결과다. 그렇지만 외모로 여자들을 사로잡아 출세 가도를 달린 이 남자를 공정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공정이라는 건 인간 사회에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할수록 그렇다. 사람들은 능력이든, 외모든 순위를 매기는 일을 잘한다. 그런데 능력/실력을 발휘하는 건 존중하지만 외모를 이용하는 건 부당하다고 말한다.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2020)에서 이제는 능력보다는 어느 정도는 ‘운’을 기대하자는 말에 동의한다. 운이나 우연을 믿는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에 겸손하다. 결과에 대해 각자 책임지라는 사회는 조르주 같은 인물을 자꾸 만들 우려가 있다. 어떻게든 성공만 하면 최고라는 가치관이 이런 괴물들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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