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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Nov 30. 2021

카르페 디엠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카페 벨 에포크

늙고 무기력한 남자 빅토르. 이제 그의 생애에는 딱히 모험이랄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다. ‘난 끝났어.’ 그는 세상 변화 속도에 맞추지 못한다. 물론 본인은 자기식대로 산다고 자위한다. 시사 만화가로 활동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일간지가 온라인 신문으로 전환되면서 담당 섹션도 사라졌다. 그는 구식이다. 못된 디지털 세상이 상황을 이렇게 망가뜨렸다. ‘카페 벨 에포크 La belle époque’(2019)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들은 자수성가했다. 아내 역시 세상 속도에 부응해  입지를 굳혔다. 빅토르만이 제자리에 멈췄다. 세상만사 지겹귀찮다. 아내도 다른 남자와 사귀는 눈치다.

이런 사람에게 가상 체험 프로그램 제안이 왔다.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어느 시기를 선택해 다시 한번 그때를 살아보는 재연극에 참여하는 거다. 만일 이런 일이 있다면 돈이 엄청나게 들겠지. 그 시절을 진짜처럼 보여주는 세팅, 의상, 분위기, 수많은 재연 배우들이 단지 한 명만을 위해 돌아가야 한다. 트루먼 쇼다. 관객이 아닌 트루먼 본인을 위한 쇼.

이런 재연 프로그램이 있다 치자. 거기에 쓸 돈도 좀 있다 치자. 선택하고 싶은 시절? 빅토르는 1974년을 꼽았다. 아내와 처음 만난 그때, 카페 벨 에포크를 드나들던 때, 방년 25세. 카페 이름이 암시하듯 최고 시절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던 때. 청춘, 사랑의 시작. 그렇군. 그는 그때를 골랐다.

자기 스스로 재연 프로그램임을 알고 있으므로 적당히 조정할 수도 있다. 어차피 그는 시작과 끝을 알고 있다. 사랑의 들뜸, 종말 그리고 환멸도 안다.  그로부터 수 십 년을 살았는데도 가장 그리운 게 바로 ‘사랑’ 그거였다는 건가. 재연 드라마에서나마 그 ‘사랑’을 다시 고치거나 취소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사랑을 되풀이한다. 너무 열연한 나머지 아내 대역 배우마저도 사랑스럽다. 그 사랑의 결말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메타-인지적 측면이 있다. 어쩌면 메타-인생 같은 거다. 살아본 인생을 다시 살아보기. 이거 참 철학적이다. 그러니까 두 번 산다고 가정하는 셈이다. 첫 번은 누구나 아마추어다. 두 번째에는 반성과 성찰이 들어가게 되겠지. ‘신’이 개입하게 된다. 자기라는 신. 인생에 대한 숙고가 개입하게 된다. 그런데도 선택은 같았다. 그는 실패할 사랑을 또 시작한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1998)와 접점이 있다. 드니 빌뇌브가 이 단편을 영화화했는데 한국에서는 '컨택트 Arrival'(2016)로 개봉했다.


인공 여자는 외계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파견된다. 외계인의 언어는 지구인의 언어 체계와 개념부터 다르다. 3차원적 존재인 지구인은 과거, 현재까지를 서술하고 묘사하는 언어를 만들고 사용해왔다. 반면 외계인들은 과거/현재/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하고 아는 다차원 존재들이다. 외계인 화자는 저절로 목적론적 세계관을 드러낼 것이다. 말하는 순간에도 일의 전후좌우, 인과관계를 알고 있다. 만일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면 사고의 틀도 변형되고 시간을 보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사건, 경험 그리고 존재가 동시에 일어난다. 이들의 세계에서 시간은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존재하고 전제/결론이 호환하면서 무한 진행한다. 주인공은 외계 언어를 습득하면서 매 순간 미래를 경험한다. 앞날을 예측하는 초능력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그녀는 지금 시작하려는 사랑이 결국 별거/이혼에 이른다는 걸 안다. 더 끔찍한 건 그들의 아이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는다는 것도 안다는 점이다.

그렇다. 그녀는 취소할 수 있다. 자신의 미래를 안다면, 그 불행을 미리 다면 막는 게 당연하다. 이 남자와는 사귀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사랑을 시작한다. 파국으로 끝날 운명을 아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비극은 신탁을 되풀이하기에 한층 선명하다. 우리는 단 한번의 삶을 살도록 세팅되어 있다. 미래를 아는 자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재는 치명적이다. 그리스 비극 '아가멤논'의 산드라가 선형적 시간관을 가진 이들과 동거하는 건 어렵다.  자유 의지라곤 전혀 없는 이가 자유/선택을 주장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건 저주에 가깝다.. 흠, 카산드라는 앞날을 볼 수만 있지 발설은 하지 못한다. 미래는 봉인되는 게 옳다.

내가 내 삶의 미래를 안다는 것, 삶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갖는 건 신의 능력을 갖춘 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도 ‘카페 벨 에포크’와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끌리는대로 간다. 왜 그럴까? 메티-인지가 있어 삶을 바꿀 수지만 그들에게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순간/우연을 믿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머리보다는 심장이 움직여야 드디어 발을 내딛는다.

어쩌면 우리들은 모두 메타-인지에 능통한 존재들이다. 이런 식으로 살면 어떻게 되는지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 무수한 명언, 교훈, 덕담, 경구, 속담 그리고 잔소리를 들으며 살아왔지만 그것들이 시키는 대로 자로 잰 듯이 사는 이들은 많지 않것같다. 대부분은 자신의 가슴이 가자는 대로 간다. 머릿속으로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그렇다.

‘카페 벨 에포크’의 빅토르는 재연 드라마의 아내 대역을 사랑하게 된다. 실패할 사랑을 반복한다. 그러니 바람 난 아내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조처다. 사실 아내를 용서한다기보다는 자기를 바꿨다는 게 옳겠다. 문제는 자신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걸 깨닫는 게 중요하니까. 웹 일러스트도 배운다. 더 이상 아날로그 세상이 아니라고 화만 내서 될 일이 아니다. 25세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반항아이고 혁명 분자다. 겁도 없다. 70대가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뻔한 말이지만 초심이라는 게 있는 때이다. 젊은 그가 늙은 그에게 제대로 한 수 가르쳤다. 빅토르가 재연극에 참여한 건 잘한 일이다. 아무렴, 두 번 살았는데 뭔가 배우는 게 있어야지.

나에게도 이런 재연 드라마에 출연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시간을 선택해볼까? 생각해보니 막상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절실하게 사랑하고 기뻐한 시절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20대라고 다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 활기 있고 희망에 차 있겠지만 또 다른 이들은 왜소하고 자부심도 없다. 게다가 돈도 없다. 제일 끔찍한 건 재능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런 젊음이라면 재빨리 늙어 버리는 것도 좋다. 포기와 적응도 나쁜 건만은 아니다. 그래서인가, 나이가 들수록 행복 지수도 올라간다고 한다. 동감이다.

그런데도 심란한 기분이 든다. 즐거웠던 한 때를 고르는데 이렇게 시간을 들여야 하다니. 넘버1을 고른다면 부모님이 살아계셨던 어느 여름날 저녁을 고르고 싶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던 것 같다. 뭐가 즐거운지 다 같이 웃는다. 이제는 사진에 꼭 박혀 화석화된 풍경으로만 남았다. 그래, 우리에게는 그다음 날이 있다. 어제 즐거웠지만 오늘은 다른 일이 일어난다. 환하게 미소짓는 배우들도 카메라가 꺼지면 무표정으로 돌아간다. 각자 보러 간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 상대적인 거다. ‘한 때 잠깐 맑음’으로 바꾸는 게 맞을 거 같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자꾸 시니컬하게 굴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순간순간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고 싶다. 아름다운 건 산너머에나 있는 걸로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아닌 것 같다. 일신우일신. 매일 새로 태어나기. 우리 조건으로는 이것이 최선 아닐까. 오늘도 충실히.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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