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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림 Dec 01. 2021

이성적인 감정/감정적인 이성

생의 한가운데


‘인간의 목소리’라는 모노드라마를 보았다. 한 여자가 애인이 떠나버린 빈 방에서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헛된 기대를 품지만 그가 이미 자신을 떠났음을 안다. 그래도 여자는 전화를 끊을 수 없다. 애원하고 달래 보지만 둘 사이는 끝났다. 가슴을 찢는 독백이 이어지고 분노, 절망의 끝은 짐작대로다. 마지막 장면에 그녀는 빨간 전깃줄로 목을 휘감으며 자살한다. 흠, 이거 참, 오래된 이야기로군. 찾아보니 장 콕토가 1930년에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요즘이라면 여자가 남자에게 혹은 남자가 여자에게 매달리는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는 전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는 좀 더 쿨한 척하거나, 차라리 스토킹 하는 범죄자의 이야기에 익숙하다. 1930년대에는 감정이 이렇게 폭포수처럼 쏟아져도 관대하게 바라보는 관객들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걸 보는 게 좀 쑥스럽다. 눈물, 콧물 흘리며 감정을 발산하는 것을 보는 일이 낯간지럽다. 사람들이 과거보다 문명화된 건가. 감정은 서랍에 넣어두고 점잖게 매사에 논리적으로 반응하기로 한 건가.

‘삶의 한가운데’는 루이제 린저가 195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가슴을 울릴 만한 문장들이 많다. 그런데 최근 다시 읽어보니 주인공 니나에 대한 의견이 변해 나 스스로도 놀란다. 예전에는 니나의 생기발랄한 즉흥성, 진취적인 성향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사랑, 사회 활동, 글쓰기, 무엇이든 치열하게 만나고 성취했다. 예전에는 먼 나라의 씩씩한 여자가 독자를 위해 대리 체험을 해준다는 희열이 있었다. 소설은 여성이 소수자인 그 당시  독자들에게 니나 현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선풍적이었다고 한다. 걸 크러쉬의 원조격이라고나 할까.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많이 반영되었겠지만 인물의 한계도 느낀다. 니나의 정치 활동, 결혼, 임신, 출산, 자살 기도는 급작스럽다. 인과관계에서 무언가 빠진 게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 무엇보다 그녀의 남성 편력은 과장이 심하다. 뭐, 이런 사람도 있긴 하겠지. 스쳐 지나치기만 해도 남자들이 뒤돌아보는 여자라니. 그녀는 그다지 미인도 아니라고 한다. 유혹의 제스처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니나를 한 번 본 남자들은 그녀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여주인공은 리얼하지 않다.

장 콕토의 ‘인간의 목소리’에서는 여자가 전 남자 친구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 ‘삶이 한가운데’는 그 반대다. 그녀는 신파 역을 남자에게 떠넘겼다. 남자가 비련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인물은 입체성을 구현하지 못한다. 니나 유형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문제는 남자 주인공 슈타인이다. 그는 멜로드라마 최고의 남자 배우이지 않을까. 오랜 세월 짝사랑만 하다가 절망만 남은 인물. 그는 니나에 대한 모든 기록, 20여 년의 일기, 편지 등을 남기고 자살한다. 여자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 슈타인은 응답 없는 사랑에 지친 데다 치명적인 병까지 얻어 삶을 마감하기로 하는데 그 자살 직전에 떠오르는 사람도 니나뿐이다.


주인공 남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의사이자 교수이며 부유한 집안의 상속인이기도 하다. 니나보다 20세 연상인데 롤리타 콤플렉스를 구현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라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장치로 보인다. 이 인물은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모습 때문에 실감이 덜하다. 이렇게 사랑받지 못해 불행한 남자라니. 앞으로도 듣도 보도 못할 것 같다.


슈타인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는 병약한 십 대 소녀를 보자마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녀가 자신의 '본질 중 굳어 있는 부분을 용해'시켰음을 감지한다. 시대는 연인들에게 낭만적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다. 3,40년대 독일은 정치 선동과 격렬한 토론, 정치범 숙청, 유대인 박해와 검거 등으로 사람들의 삶이 피폐하다. 그러나 이미 중년에 접어든 남자는 과묵하고 평화롭게 삶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는 방관자이다. 그에게 삶은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필름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저 너머 삶이 있다지만 그와는 관계없다. 슈타인에게는 연애, 결혼과 같은 사적 행복이나 드라마틱 변화가 없다. 고요한 학문과 직업의 세계 속에서만 안전하게 머문다. 그런데 느닷없이 뛰어든 이 소녀, 그녀가 그에게 삶을 가져왔다.

그녀의 등장은 변화 없는 슈타인의 세계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녀는 삶의 선택을 받은 자이다. 그녀의 강렬함, 도발적 충동은 슈타인에게  낯설다. 이상적이라기보다는 새롭다. 그래서 여자에게 더 집착하게 되었으려나.

출판연도가 1950년이다. 그때였으니 아직은 이런 터무니없는 순수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 가공의 인물은 모든 사람의 희망 사항이 될 만하다. 험난한 삶의 언저리 어딘가 늘 머물러서 손을 내미는 사람.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안길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우리 삶에도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아무리 실수 범벅을 해도 다 받아주고 안아주는 사람. 그가 그립다. 그녀가 부럽다.

그렇지만 이 인물도 질투에 멍들고 좌절한다. 당연하다. 자기를 남자로 바라보지 않는 여자를 위해 그렇게 오랜 세월 헌신한다는 게 가능할까. 정황으로 보아 개연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두 남녀는 진지하지 않게 여겨진다. 슈타인은 죽음 직전에도, 죽음 후에도 니나로부터 사랑을 인정받지 못했다. 대체 그는 누구에게 충실했던가.

루이제 린저가 ‘삶의 한가운데’에 슈타인이나 니나처럼 극단적으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이념’, 그 여자는 ‘삶’을 뜻한다. 이성과 감정을 대치시키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은 단순한 인물들이라기보다는 ‘관념의 육화’를 구현한다. 로맨스 흉내를 낸 관념 소설이다. 그래서 인물들이 그렇게 어색했던 거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낸 관념의 분신이다.

슈타인처럼 살아가는 인생을 사회 목표로 삼던 때도 있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갔다. 개인의 감정은 가능한 한 억압하고 집단 이데올로기를 숭배했다. 사회에서 지정해준 가치관 외 자잘한 것들은 쉽게 무시되곤 했다. 그게 당연하다는 인식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 자잘한 것들이 모여 삶의 진짜 주인이 되려 나선다. 개인의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한번 세상에 뛰어든 삶은 자동기술적으로,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니나는 슈타인에게 삶의 한가운데를 사는 자신을 옹호하며 소리친다.

‘나는 살려고 해요. 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 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

이에 맞서 슈타인이 니나에게 하는 말은 흔적도 없이 절망적으로 사라진다.

'아, 그 인생, 인생. 나는 소리쳤다. 그게 도대체 뭐요? 모든 인생이 인간적 삶은 아닌 거요. 당신은 오직 인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열광해서, 선택도 않고 그 앞에 서 있는 거요. 한 번은 이 남자 팔에, 한 번은 저 남자 팔에 안겨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거요?'

토마스 만의 ‘마의 산’(1924)에는 삶을 사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소설 속 러시아 여인의 말이다.


'...열정적이라는 것은 삶 그 자 체를 위해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인데, 잘 알 알다시피 당신네 독일인들은 경험을 목적으로 살아가니까요. 열정적이란 말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거에요. 하지만 당신네들은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요...'


다른 사람들은 삶을 사는데 독일인은 무엇인가를 위해 산다는 뜻이다. 의미심장하다. 한동안 이 구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남들은 니나처럼 사는데 왜 당신들은 슈타인처럼 살려고 하냐는 뜻이나 마찬가지이다. 독일인들만의 특수성이랴? 삶을 사는 데에 목적이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살아도 되는 건지 생각해 보게 된다. '태어났으니 산다' VS '사명을 띠고 산다'. 혹은 열정 VS 경험.

한동안 감정 발산을 ‘삶’ 또는 ‘생’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내면을 유보 없이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그 감정 발산이 왠지 낯 뜨겁게 여겨진다. 왜일까. 이제 와서 슈타인처럼 법칙과 목적의식으로 무장하고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도 아니라면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메말라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AI 시대를 맞아 미리 '마음' 없는 안드로이드라도 흉내 내는 건가.

이성과 감정은 인간 내면의 큰 대양이다. 각각 큰 바다지만 모두 하나다. 법과 질서에의 강박이 머물다 사라진 후, 열광/분노의 계절이 세상을 타오르게도 했다. 한쪽만 지나치게 강조한 시절들이 오고 갔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조화가 요구된다. 토마스 만의 자화상인 토니오 크뢰거처럼 예술성과 시민성이 동일하다는 깨달음, 그것이 삶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장 콕토가 그린  '인간의 목소리'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전깃줄을 목에서 풀어내고 냉철해 지기를 바란다. 한걸음 물러나야 한다(그러나 코미디가 된다). 그리고 니나와 슈타인도 언젠가 맺어지길 기원한다. 니나는 덜 뜨겁게, 슈타인은 덜 차갑게(로맨틱 코미디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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